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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Apr 14. 2021

밀크 블루 캔디 9 -(3)

9 -(3)


“꽤 잘 자네.”

잠시 졸았던 것일까. 눈을 떠 보니 눈 앞에 슬라이가 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하케가 앉아 있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하케는 내 곁에서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피곤했나 보군.”

눈을 비비고 자세를 고쳐앉은 나는 하케가 두려워하는 이 존재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확실히, 그에게서는 유미에게서 느끼지 못한 어떤 색다른 느낌이 있었다. 깔끔하고 반듯하며 빈틈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이런 종류의 인물이 위험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은 예전부터 하고 있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이 녀석에게 널 데려오라고 했을 때 이 녀석이 부린 난동을 너도 봤어야 했는데. 의자 하나를 던져서 통유리를 박살내 버렸지. ”

그렇구나. 그래서 날 이곳으로 데려온 거였구나. 

“혹시.....유미 씨도 당신을 알고 있나요?”

“그럼, 모를 리가 있나. 하케가 내 이름을 붙여준 여자인데.”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미소를 보며 나는 의아했다. 어째서 이토록 선량해 보이는 사람에게 그렇게 사악한 의지가 깃들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상관없어. 유미 정도는. 오히려 그 여자가 불쌍하지. 그깟 알량한 몇 번의 잠자리에 그렇게 비참하게 매달려야 한다니. 하케는 늘 넌덜머리를 내곤 했지. 섹스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하고 나면 더 짜증이 밀려온다면서. 그리고.”

“.....”

“얼마 전에, 이상한 얘기를 들었어. 옷을 입은 채로 사정을 했다는 거야. 아무런 성적 자극을 받지 않는 상황이었는데도 믿을 수 없게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며. 상대가 누구인지를 물었지만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어. 뭐 그 정도의 거짓말쯤이야 굳이 추궁할 필요도 없어. 여기 이렇게 그 상대를 모셔왔으니까.”

나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나, 어렵지 않게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아마도, 그 날이 아니었을까. 놀이공원에서의 몸싸움. 펜던트를 빼앗으려고 벌였던 그 심한 몸싸움. 함께 나동그라진 기억.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날 이외의 다른 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떠올려보니 묘하게 낯이 뜨거워졌지만 애써 기억을 지웠다. 어차피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기억이다. 

“그래서 널 꼭 한 번은 보고 싶었지. 음, 뭐 더 궁금한 게 있다면, 질문해도 좋아. 대답할 수 있는 건 해 줄 테니까. 물어봐. 수안.”

줄곧 궁금했던 어떤 것이 있었다. 다름아닌, 유미와 슬라이가 하케로부터 빼앗아간 것. 유미가 언급했던 하케의 애인. 그녀는 누구였을까. 

“하케의 연인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하케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슬라이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미치게 사랑했지. 당연히, 의심없이 결혼하려고 했었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군요.”

“상상도 못할 액수의 빚에 허덕이고 있었거든. 게다가 병까지 들었어. 병이야,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수술만 마치면 되는 거였지만 돈은 어떻게 마련하겠어? 그때 유미가 접근한 거지.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어. 이 녀석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그렇지만.....영혼을 팔았다는 건 무슨 뜻이죠?”

“이 녀석이 그런 말을 했어?”

“네.”

“음.....아마도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이 녀석 말이야. 녀석이 사랑한 그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동성애자였어. 그리고 나와 둘도 없는 사이였지. 그 여자를 만나면서 진짜 섹스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나를 떠나간 거야. ”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하케가 동성애자였다니. 

슬라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유미에게 붙들리면서, 아마 영혼을 판 기분이 되기는 했겠지. 병들고 빚도 많았던 그 여자가 아니면 어떤 여자와도 자고 싶지 않다고 했거든. 남자는 물론이고.”

“하지만 결국 유미 씨와 잔 거죠. 그래서, 그 여자는 살아났나요?”

“물론 살아났지. 하지만 하케를 떠나야 했어. 그게 조건이었으니까. ”

나는 내 옆에서 잠든 하케를 돌아보았다. 그는 내 어깨가 아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참으로 불편한 자세로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었다. 

“그 일로 인해서 거의 죽다 살아났지, 이 녀석은. 이 녀석을 죽이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 어쩌면 이렇게 살아 있는 걸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자기 영혼을 판 댓가로 애인을 잃고 의미없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거라고. ”

“유미 씨한테는, 결국 마음을 붙이지 못한 건가요?”

“처음부터 돈 때문에 시작된 거래인데 그게 되겠어?”



새벽 네 시가 넘도록 하케는 깨어나지 않았다. 

슬라이는 가게 문을 닫고 나에게 담요를 가져다 주었다. 하케와 내가 함께 덮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담요였다. 

“아침 여섯 시가 되면.”

슬라이는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피곤해서인지 울어서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그의 눈에 선명한 핏발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케를 데리고 나가. 녀석을 여기 두고 나가면 내가 녀석을 어떻게 할지 나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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