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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Apr 18. 2021

밀크 블루 캔디 10 -(1)

10 -(1)

10




지금 생각해 보면, 하케는 매 순간을 쫓기고 있었다. 지금도 그를 집요하게 추적했던 그 거대하고 추악한 덫의 실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렴풋하게 그의 주변에 도사린 위협과 그의 내면을 잠식한 공포를 감지하면서, 그가 전에 없이 안쓰러워졌다. 한번 사람의 마음 속에 심어진 공포는, 한 번 날뛰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진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병명을 알고 집안의 모든 유리를 박살내던 유안의 허리를 끌어안고 울부짖었던 기억이 의식의 표면 위로 소리없이 솟아올랐다. 아직도 금이 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화장실의 거울을 그대로 내버려 둔 것도, 지금도 슬리퍼를 신지 않고 마루를 걸으면 발바닥에 유리조각이 박혀 오는 것도 모두 유안의 흔적이었다. 

이제는 지워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운다고 해서 지워질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삼십 분에서 사십 분 정도 눈을 붙였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슬라이는 없었고 불안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담배를 피우는 하케 이외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방이 어두웠고 몹시 추웠다. 바 구석에 놓인 스탠드에서 나오는 희미한 조명 하나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있는 공간으로부터 어둠을 쫓아주고 있었다. 

고맙게도 새벽 버스는 우리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버스 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지만, 이렇다 할 대화를 하지는 못했다. 다만,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 하나만이 차츰 뚜렷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짐이었다. 

이제는 하케를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는 하케의 행선지인 그의 헤어샵 근처에서 우리를 내려 주고는 휭하니 다시 떠나갔다. 이곳에서부터는 혼자 돌아가야 했다. 멀거나 힘든 길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서러워져서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데려다 줄게.”

“아니. 됐어. 괜찮아. ”

나는 하케를 돌아보았다. 그는 얼른 고개를 저쪽으로 돌려 버렸다. 자신의 표정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독한 염색약 냄새를 풍기는 그의 머리카락이 형편없이 헝클어져 있었다. 하기야, 나 역시 이런 초췌한 몰골을 굳이 하케의 면전에 들이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제 혼자 돌아갈게. 금방 도착할 테니까. 조심해서 들어가.”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는 아마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꼭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의 발로라기보다는, 그저 나의 의견을 피력한 데 지나지 않는, 그야말로 무의미한 그 멘트가 문제였다. 별로 신경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뜻밖의 반응이 날아왔다. 언젠가 내 팔꿈치 관절을 잡았을 때처럼 이번에도 정확히 팔꿈치를 잡았다. 엄지와 검지 중지 약지로 한꺼번에 팔을 찌르듯 눌러대는 악력에 팔이 아파왔다.

“아파!”

“이유가 뭐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하케의 팔을 뿌리쳤다. 그 다음에는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상처입은 사람의 눈빛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이제 와서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여력은 내게 없었다. 

“이유를 가르쳐 줘.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 보라고.”

더 이상 나를 만나면, 그가 위험해질 것 같았다. 단지 유미와 슬라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유안 하나로 족하다. 더 이상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내 판단이 옳았다. 이런 말을 하케에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면 묻자. 우리가 계속 만나야 하는 이유는 뭔데?”

이 말이 하케를 상처입힐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하케가 입은 상처의 핵심은 내 말 따위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하케가 대답했다. 

“네가 나를 지켜주니까.”

말문이 막혔다. 그랬다. 언젠가 하케는 내게 말했었다. 슬라이로부터 날 지켜 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슬라이의 실체는 유미도 아니고 하케의 전 애인이었던 바텐더 청년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그저 하케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실체 없는 악령에게 그가 붙인 호칭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넌 내가 싫어?”

하케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 와중에 어이없게도 그는 또다시 담배를 꺼내들고 있었다. 그 담배갑을 빼앗고 싶었지만 내버려 두었다. 다행히 그의 담배갑에는 담배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입고 있던 체크 무늬 쟈켓의 주머니를 뒤져 구겨진 천원짜리 몇 장을 꺼내 하케의 손에 쥐어 주었다. 

“저기 길 건너가면 편의점 있어. 갈 때 담배 사 가지고 가. 그리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정리가 되지 않아 곤혹스러웠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싫은 건 아니야. 다만, 나는 네가 걱정이 될 뿐이야.”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않겠지만, 가장 간결하고도 명확한 나의 진심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하케의 손을 놓았다. 

때마침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고 나는 황급히 버스에 올라탔다. 올라탈 때 일부러 하케를 돌아보지 않았다. 버스는 고맙게도 서둘러 출발했다.




하혈 



워낙 생리 주기가 불규칙했기 때문에, 꽤 오랫동안 생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래서 단순히 생리가 다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물처럼 빨간 피가 그치지 않고 비오듯 쏟아져내린 지 거의 닷새가 지나도록 태평스럽게 잠들었다가 깨어나기만을 반복했다. 하케와 돌아다니는 동안 제대로 자지 못했던 잠의 양이 두 배로 늘어나 되돌아와 몸을 덮치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끝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썰렁한 침실 대신 거실의 카펫 위에 깔개를 깔고 그 위에 누워 극세사 담요를 둘둘 말았다.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마셔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대로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끝없는 동면으로 빠져들 뻔한 나를 일깨운 것은 어이없게도 관리비 납부를 독촉하러 찾아온 관리실 직원이었다. 어지러워서 벽에 걸린 인터폰을 향해 가는 데도 기어서 가야 할 지경이었다. 벽에 손을 짚고 팔을 뻗어 인터폰을 잡아서 아래로 떨어뜨린 후 전화를 받아야 했다. 

-집에 계세요? 저, 관리비 때문에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셔서요. 

도대체 어떻게 문을 열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을 열자마자 나를 본 관리실 직원의 경악하는 표정을 본 것을 끝으로 눈 앞이 깜깜해지고 말았다. ‘얼굴이 왜 그래요? 괜찮으세요?’라고 외치던 관리실 직원의 목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나는 앰뷸런스로 병원에 옮겨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누웠던 자리는 거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중에 집에 돌아오고 나서 얼마나 경악했는지 모른다. 응급실에 실려 들어왔지만 의식은 잃지 않았던 내게 의사가 보호자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남편이 장기 출장으로 외국에 나가 있노라고 대답했다. 이따금 유용하게 써먹는 편리한 거짓말이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의식이 끝없이 혼미해졌다. 

얼마 후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빛깔의 무늬들을 감상해던 내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유안의 목소리였다. 나를 부르고 있었다. 

“수안.”

나는 눈을 떴다. 믿을 수 없었지만, 유안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이상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가 내 앞에 와 있었는데, 당연히 일어나야 할 것 같은 가슴벅찬 감정이 일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텅 빈 것처럼 허망했다. 이렇게 막상 돌아온 그를 보게 되면, 그의 귀싸대기를 열두 번도 더 후려갈기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내 가슴 속은 비집고 들어올 분노조차도 없이 먼지만 쌓여 있었다. 호흡곤란을 부르는 텁텁한 먼지를 떠올리자 저절로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오랫만에 돌아왔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대체 어딜 그렇게 돌아다녔어? 혼자 다녀서 즐거웠니?”

“그럴 리가. 하나뿐인 누이를 두고 싸돌아다니는 길바닥이 즐거울 리가.”

그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서는 맡을 수 없는 그의 독특한 체취가 코 끝에 와 닿았다. 이 냄새를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갈망해왔던가. 그제서야 그가 환상도 환각도 아닌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내게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아니다. 떠나기 전의 모습은 아니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내 곁을 떠나기 전 그가 지녔던 어떤 것들이 그에게서 사라지고 없었다. 반대로 없었던 것들이 깃들어 있었다. 다정하고 미덥던 하나뿐인 동생이자 연인의 모습은 간곳없고, 그 눈 속에 정체모를 연민과 더불어 내면 깊숙이 자리잡아버린 냉혹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것은 내가 아는 유안이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돌아오기를 바란 유안도 아니었다. 그는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너무 늦게 돌아와서 미안해. 이제는 떠나지 않을게.”

“아니야.”

나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말했다. 

“넌 너무 늦게 돌아왔어.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너하고 여기 머무를 수가 없어! 그러니까, 떠나. 다시 떠나라구. 이제는 돌아오지 마!”

마침내 나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야 했다. ‘돌아오지 마’라는 말이 좀처럼 목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밖으로 내뱉어야만 했다. 마치 들이쉬었다가 좀처럼 내쉬어지지 않는 숨을 바깥으로 내뱉듯이. 

그러면서 나는 긴 호흡곤란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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