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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Apr 18. 2021

밀크 블루 캔디 10 -(2)

10 -(2)


다시 눈을 떴을 때 유안은 없었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이런 일이 가끔 있어요. 자궁에 물혹이 있었는데, 마치 칼로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터져버렸죠. 아마 출혈이 엄청났을 텐데, 빨리 발견하지 않았으면 저 세상으로 갔겠네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여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은 떴지만 시야는 여전히 깜깜하기만 했다. 그러나 서서히, 망막에 희미한 형상들이 잡혀왔다. 마침내 그 형상은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으로 최종 완성되었다. 

뜻밖에도 유미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케의 슬라이. 

“많이 놀랐죠?”

여의사가 나가고, 내가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을 차린 후 보호자용 의자에 앉은 유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죠?”

입을 열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을 회복한 후 내가 그녀에게 던진 첫 질문이었다. 

“보호자 연락처를 알 수가 없어서, 관리실 직원이 당신 휴대폰에 찍혀 있던 번호 중 하나를 골라 전화를 걸었대요. 그 번호가 하케의 번호였죠. 대신 좀 가달라는 하케의 부탁을 받고 왔어요. 그때 하케가 일하느라 무지 바빴거든요.”

그러고 보니, 하케의 전화번호가 내 휴대폰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쩐지 겸연쩍어져서, 손등에 꽂힌 링거의 주사바늘만 멀거니 쳐다보는 내 앞에 그녀가 한 권의 잡지를 내놓았다. 요즘 한참 유행하는 패션 잡지 중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잡지의 최신호였다. 

“접힌 부분을 펼쳐봐요.”

시킨 대로 접힌 부분을 펼쳤다. 가지각색의 헤어스타일을 선보이는 패션 모델들 사이에서 하케가 웃고 있었다. 그 자신도 화려한 적자주색 머리를 있는 대로 부풀려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옆에 얌전히 자그마한 글씨로 실린 짧은 기사는 최근에 도쿄에서 열렸던 패션쇼와 그 패션쇼의 헤어 스타일링을 맡은 ‘유명 헤어스타일리스트’ 하케에 대한 극찬이 실려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 사진에서 하케가 걸친 망사로 된 가디건에 눈길이 갔다. 그물망이 너무 커서 엉성한 느낌을 주긴 했지만 매우 아름다운 청록색 가디건이었다. 

“이거 예쁘네.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들어봐서,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들어드리죠.”

“이 가디건이 마음에 드는데요. 이걸 하케한테서 빼앗아서 저한테 파실 의향 없으세요?”

내가 생각해도, 죽다 살아난 사람의 요구치고는 꽤나 별나고도 허무한 요구였다. 유미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한 편의 숨막히는 공포영화에서 벗어나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케가 그녀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뭐,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는 해 보죠. 기대는 하지 마요. 하케는, 자기가 아끼는 의상에 손대는 걸 무지 싫어하니까.”

“쩨쩨하게 굴지 말라고 해요.”

그렇쟎아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상이나 소품에 민감한 그를 떠올린 순간 골이 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유미는 문득 웃음을 거두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으로 비치는 눈부신 노을을 보고서야 지금이 일몰 무렵임을 알았다. 일몰. 태양이 침몰하는 시간. 달이 떠오를 준비를 하는 시간. 

“하케는, 달의 기운을 가진 사람을 좋아했었죠. ”

긴 머리를 틀어올린 그녀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매혹적이었다. 

“난 그렇지 못했지만, 소예는 그런 여자였어요.”

“소예?”

“하케가 미치게 사랑했던 여자죠. 그 여자에게서 하케를 빼앗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일로 하케의 마음을 영영 잃었어요. 하케가 그녀를 잃고 자살 시도까지 했다는 걸 알고 있나요?”

“아니오. 몰랐어요.”

“아까 여의사가 들어와서 설명하기 전까지, 나는 당신도 어쩌면 누군가를 잃고 자살을 시도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죠. 혹시 하케와 똑같은 방식으로 시도한 게 아닌가 하고요.”

말을 맺는 유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조금 전 나를 찾아왔던 그의 이름을 소리내어 말했다. 

“유안.”

유미가 듣거나말거나 상관없이 나는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예요.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내 곁을 떠나고 없다. 나는 그를 떠나보내지 않았지만, 그가 되돌아오지 않는 이 현실을 바꿀 힘은 내게 없었다. 그것은 유미도 마찬가지였다. 

죽기보다 싫은 현실을 바꿔놓을 힘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나는 퇴원 수속을 밟았다. 



하케의 요청



하케의 망사 가디건을 빼앗아 주겠다던 유미로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지만, 오랜만에 찾아간 <마즈>에서는 내 정신을 홀딱 빼앗을 만한 아름다운 의상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사로잡은 것은 진한 와인색의 짧은 원피스였다. 어깨와 소맷단에 적당히 두툼한 깃털 장식이 붙어 있었다. 내게는 좀 작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어차피 소장용으로 사는 거라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 입어보니 몸에 꼭 맞았다. 그러나 늘 그렇듯, 그렇게 아름다운 옷들은 밖에 걸치고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옷장 속에 가둬놓기 위해서 산 것이다. 옷들의 무덤이나 다름없는 내 옷장 속으로 옷을 보내면서 나는 하케를 생각했다. 내 옷장을 못내 뒤져보고 싶어했던 하케.

<마즈>에서 산 원피스 대신, 몇 년 전부터 가끔 꺼내 입던 까만 후드집업 쟈켓에 청바지 차림으로, 실로 오랜만에 나와 작업중이던 영화감독을 만났다. 돌아가신 양부의 친구였던 그가 아니었다면 이 계통으로 무사히 입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몇 가지 중요한 수정안에 서로 합의한 결과, 만족스러운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스토리를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분위기도 바꿔야 했지만 어느 쪽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번거롭고 귀찮기는 했지만 그게 최선이라는 점에서는 생각이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적절한 합의에 성공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그와 나는 술을 마셨다. 안주는 곱창전골이었고, 나는 그가 정성껏 말아주는 소맥을 마셨다. 

“유안은 아직도 안 돌아왔어?”

“대만이 마음에 드나 봐요.” 

유안의 엽서가 대만에서 날아왔다 해서 유안이 대만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일단은 유안이 대만에 가 있는 것으로 해 두었었다. 날카로운 송곳은 거의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그 영화감독과 헤어질 때 나를 찔러왔다. 다름아닌,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했던 질문이었다.

“너, 유안이랑 잤었지. 그렇지?”

그가 대답을 요구하고 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로서는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만이었지만, 그 아니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쩌면 이 모든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친남매가 아니라고 해서, 보육원 시절부터 함께 자란 우리의 관계가 쉽게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임유안’과 ‘임수안’이 아닌 그저 ‘유안’과 ‘수안’이었던 그 시절부터, 우리는 서로를 떠나 사는 삶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 것이다. 

가까스로 잡아 탄 택시에서 내려 공원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터벅터벅 걷던 내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하케였다. 손에 귤 두 개를 쥐고 있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무척 반가웠지만, 새삼스럽게 이해할 수 없이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거의 맨얼굴에 가까웠다. 눈썹과 약간의 아이라인과 볼터치를 제외하고는 색조 화장을 하지 않았다. 어찌된 셈인지 머리가 한층 짧아진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잦은 염색으로 상한 머리카락을 꽤 많이 잘라내야만 했다. 그렇게 잘라낸 머리를 다시 짙은 금발로 염색하고 분홍색 브릿지를 넣었다. 

“입원했었다더니, 잘만 돌아다니네?”

그렇게 말한 그는 귤을 내밀었다. 받기가 망설여지는 마음과는 반대로 귤을 덥석 집어들어 껍질을 깠다. 길을 걸으며 하나씩 까먹는 귤은 새콤하고도 달콤했다. 

“유미 말로는 피를 엄청 흘렸다던데. 이렇게 나다녀도 돼?”

“일 때문에 나갔다 온 거야. 너한테만 직업이 있는 건 아니야.”

“그렇군.”

어쩐지 풀이 죽은 듯한 하케의 대답에 마음이 아파왔다. 집에 데리고 가서 커피라도 끓여 주고 싶었지만, 유미를 떠올리자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새 귤 하나가 껍질만 남긴 채 고스란히 입 속으로 사라졌다. 

“귤, 더 없어?”

하케는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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