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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Apr 18. 2021

밀크 블루 캔디 10 -(3)

10 -(3)


고심 끝에 나는 그를 맥도날드로 데려갔다. 

“미안해.”

마주앉기가 무섭게 하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네가 죽을 뻔했다는 걸 알고 소름이 끼쳤어. 그 정도로 위험했는데도 나한테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는 걸 알고 하마터면 그년 목을 졸라버릴 뻔했어.”

그년이라니, 유미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넌 도쿄에 있었잖아. 유미 씨가 알리지 못했다면 그건......”

“아니. 네 소식을 들은 건 도쿄에서 돌아온 후야. ”

하케는 여전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일단 유미에게 부탁했던 거야. 가서 어떤지 대신 좀 봐 달라고. 나중에 병원 의사와 널 처음 발견한 관리사무소 직원을 다 만나서 얘길 들었어. 그러고 나서야 네가 위험했었다는 걸 알았지. 유미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어. 내 가디건이나 탐내더라고 하면서.”

그것은 아마, 하케가 내 걱정을 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유미의 의도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디건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유미의 말이 사실이라고 말하자 하케는 웃었다. 

“그 가디건 주면, 뭘 해줄 거야?”

“뭘 해주길 바라는데?”

“같이 가줬으면 하는 데가 있어서.”

“또?”

설마 제 3의 슬라이가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며 나는 반문했다. 

“소예를 꼭 한번만 다시 만나고 싶은데, 혼자는 못 가겠어서.”

소예라면, 하케가 죽을 정도로 사랑했다는 그 여자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미 씨한테 들었어. 그 이름은. 근데 너, 그 소예 씨가 어디 사는지는 알고 그러는 거야?”

“부산.”

그렇게 이야기하는 하케의 안색이 창백했다. 여전히 그 여자를 사랑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그를 향한 전에 없이 애틋한 마음이 생겨났다. 일종의 인간적인 동지애라고나 할까 혹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이게 바로 진짜 우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처럼 바래지 않고, 순결처럼 더럽혀지지 않는 무색의 영원한 우정 말이다. 

“가자.”

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네가 한번으로 족할지는 모르겠지만,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보자. ”



기차 



언젠가는 놀이공원의 장난감 기차를 함께 타기로 약속했지만, 그 전에 장난감 기차가 아닌 진짜 기차를 하케와 함께 타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눈부시게 쾌청한 파란색 하늘을 올려다보며, 새삼 살아 있음을 절감했다. 웬일인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가끔은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이상하게 의아한 기분이 들 때가 더러 있다. 마치 나 자신이,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낯선 타인 그 자체인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만날 지점과 장소를 미리 정해두고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하케는 챙이 좁은 하얀 모자를 쓰고 선글러스를 낀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 아래로 금발 머리가 살포시 삐져나온 모양새가 귀여웠다. 그는 내가 다가오자 선글러스를 잠시 벗었다. 내가 입은 연두색 니트 블라우스를 본 하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옷을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꽤 여러 번 입었던 탓에 여기저기 늘어나기는 했지만 특유의 밝은 연두빛이 선명하게 살아 있는 옷이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때로는 붙들 것 없는 삶에 천착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수단이 된다. 돌아가신 양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다. ‘여자는 아름다워야 하고,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한결같은 신조였다. 비록 낳아준 분들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분들을 좋아했다. 

기세 좋게 동행하기는 했지만, 막상 기차를 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케를 따라나선 것이 잘한 건지, 아니 그 전에 소예를 만나려는 하케를 말리지 않은 것이 잘한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말렸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간절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죽은 사람이라면, 보고 싶어도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이 된다. 하물며 같은 하늘 아래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안은 어떤가. 

유안에 대한 생각을 가슴에서 떨쳐내기 위해 일부러 옆자리에 앉은 하케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후회와 불안으로 똘똘 뭉친 나와는 달리, 하케는 즐거워 보였다. 낮은 목소리로 휘파람을 불기까지 했다. 평일 아침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KTX를 타고도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 때문에 이른 시간에 출발해야 했지만, 역시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에는 너무나도 먼 거리였다. 나는 산 지 몇 년이나 지난 구형 전자책 단말기를 꺼냈고 하케는 MP3 플레이어를 꺼냈다. 우리는 둘 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적어도 전자기기에 관한 우리는 둘 다 얼리어답터는 아닌 셈이었다. 

하케는 이어폰의 한쪽을 내 귀에 꽂아 주었다. 그의 찬 손가락이 귓바퀴에 닿았다. 아마도 차가운 아침 공기 탓이겠지. 그는 편하게 자세를 고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짓궂게 중얼거렸다. 

“수안, 너 귀는 못생겼다.”

하케의 눈에 내 귀가 못생겨보인들 어쩔 것이며 예뻐보인들 어쩔 것이냐마는, 어쨌든 못생겼다는 말이 좋게 들릴 리는 만무했다. 음악이나 듣자는 심정으로 나도 등받이에 몸을 기댔지만, 어찌된 셈인지 이어폰에서 음악이 나오지 않았다.

장난감 기차가 아닌 현실의 기차 안에서 나는 조용히 꿈나라나 헤매자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꿈에서도 기차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영화관의 스크린을 들여다보듯이 나는 내 모습을 마치 제삼자인 양 태평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놀이공원의 장난감 기차를 탄 나는 눈처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웨딩드레스는 흔히 쇼윈도에 진열된 그런 웨딩드레스들에 비하면 꽤나 평범한 편이었다. 어정쩡하게 드러난 어깨와 흔해빠진 면사포가 실소를 자아냈지만, 그래도 어쨌듯 그럴듯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는 그럭저럭 행복한 신부의 모습이었다. 저렇게 환하게, 얼빠진 바보처럼 웃으며 기차를 타는 나를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지면서 자신이 측은해졌다. 

그런데 신랑은 어디로 갔을까? 

신랑은 내가 입은 웨딩드레스에 거의 가려져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드러난 머리와 어깨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유안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 옆자리에 앉아 나와 함께 장난감 기차를 타고 장미 정원을 신나게 돌고 있었다. 

눈도 뜨기 힘들 만큼 눈부신 태양의 역광 아래서 나는 차창 밖을 향해 부케를 흔들어 보이며 환호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런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잠시 후, 바보처럼 좋아하며 환하게 웃는 나는 남았지만, 내 곁에 있던 유안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혼자 찍힌 사진이 내 앞에 남았다. 

눈을 떴을 때 하케가 창 밖을 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녀를, 소예라고 부르는 여자를 막상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가능하면 자리를 옮겨 그와 떨어져앉고 싶었다. 그를 방해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전 내가 꾼 꿈을 그에게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하케는 나를 돌아보더니, 엷은 미소를 지었다. 행복해하는 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아직도 귀에 걸려 있던 이어폰을 뺐다. 

“아무것도 안 들으면서 무슨 이어폰을 끼고 있는 거야?”

“그냥. 버릇이야.”

“그러면 왜 이걸 내 귀에?”

“아아, 혼자만 양쪽 이어폰을 끼고 있으면 혼자인 기분이야. 하지만 같이 끼면, 그 사람하고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잘 봐. 이 긴 줄, 혼자만 끼고 있으라고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을 거거든.”

듣고 보니 그랬다. 나는 다시 이어폰을 꼈다. 신기하게도, 오래 끼고 있으면 귓구멍이 얼얼하게 아파오는 다른 이어폰과는 달리 귀가 아프지 않았다. 조금 전 내가 꾼 꿈은 어쩌면 이 이어폰을 통해 그에게로 전달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괴상한 상상을 하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꽤 괜찮은 발상이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뭐가 우스워?”

“그냥. 꿈을 꿨거든.”

나는 장난감 기차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치 혼자 타고 있었던 것처럼. 하케는 주의깊게 얘기를 들었고, 내 얘기가 더 이어지지 않는 시점에 이르자 한 마디 했다. 

“그리고 네 곁에는 누군가가 있었겠지.”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케는 기지개를 켰다. 창 밖으로는 단조로운 시골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디까지 온 걸까. 나의 기다림은 어디쯤을 지나는 중일까. 

“넌 인형 같아.”

“응?”

“인형 말이야. 사람 인형 말고. 곰인형 같은, 그런 거. 테디 베어라고 하나? 수안 널 보면 그런 인형과 함께 있는 기분이 들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칭찬은 아닌 것 같아.”

“나쁜 뜻은 없어. 그냥 내 느낌을 말한 거야. 그래, 어쨌든 포근하지. 참을성도 많고.”

“......”

“가끔 가다가 날카로워지기는 하지만.”

때마침 간식거리를 실은 자그마한 손수레가 우리 곁을 지나갔다. 나는 맥주 한 캔과 땅콩 한 봉지, 아이스커피를 샀다. 맥주를 받아든 하케의 표정이 환해졌다. 

“좋냐?”

하케는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는 가지런하고 매우 작았으며 전체적으로 안으로 약간 말려든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가늘게 뜬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 그 모습을 보자 불안으로 얼어 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하케의 여행에 동참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이 여행을 나의 여행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만의 짧은 기차여행에 하케가 동참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비로소 옆자리에 앉은 그의 존재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우리는 지겨워하지 않고 느긋하게 각자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낚시줄을 잡은 낚시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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