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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Apr 29. 2021

밀크 블루 캔디 11 -(1)

11 -(1)

11



가벼운 불안이 멀미처럼 내내 가시지 않았던 시간도 마침내 끝을 보였다. 열차가 부산역으로 진입중임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자 의외로 마음이 평정을 찾았다. 오히려 정체모를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어린 시절, 아주 잠깐 부산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내 기억이 맞다면 일년 정도로 짧다면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다른 기억은 없지만, 부산역 앞의 전경만큼은 확실히 기억한다. 특히, 바람개비와 풍선을 파는 늙은 할아버지가 끌던 손수레를 잊지 못한다. 손수레에 잔뜩 실린 장난감들은 분명히 알록달록하고 화려했지만 몇 가지의 중요한 빛깔들이 결여되어 되었고, 그래서인지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리만치 어색하고 쓸쓸한 기분이 되곤 했다. 부산역에 자주 갔던 이유는 당시 출장이 잦았던 양어머니를 배웅하기 위해서였다고 기억한다. 그 당시 영화 제작자였던 양아버지는 잠시 일을 쉬고 있었고, 배우였던 양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부산역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입이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실내 로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서 하케는 휘파람을 불었다. 

“굉장한데. 정말 크다. 난 왜 부산이 시골이라고만 생각했지?”

부산역을 나온 우리는 무작정 부산역 앞 대로변을 건넜다. 

잠시 거리를 돌아다니던 우리는 괜찮겠다 싶은 식당에 들어가 밀면을 주문했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먹어서 체력을 보충할 필요는 있겠다 싶었다. 

“분명히 약속 시간은 저녁때겠지?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

“뭐라고?”

국수를 입에 밀어넣다 말고 하케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소예 씨 말이야. 만나기로 서로 약속하고 온 거 아니었어?”

“아아.”

하케는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대학 노트에서 찢어낸 것으로 보이는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그게 주소야. 소예가 살고 있는.”

“그러니까, 넌 소예 씨와 미리 만날 약속을 해 둔 게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케는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기약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그녀를 만나러 여기까지 먼 길을 온 것이다. 그는 그렇다쳐도, 나는 뭔가. 대체 뭘하자고 그를 여기까지 따라왔단 말인가. 소예라는 여자에 대한 궁금함은 있었지만, 여기까지 따라와서까지 봐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후회가 솟구쳤지만, 하케는 느긋하기만 했다. 

“얼마 전에, 소예의 오랜 친구와 우연히 마주쳤어. 그 친구가 그 주소를 일러 주더라고.”

“그러니까, 여길 찾아가기만 하면 소예 씨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질 뻔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가장 딱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닌 하케라는 생각이 나의 분노를 막았다. 나는 힘없이 뇌까렸다. 

“못 만날지도 몰라. ”

“괜찮아.”

하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김치 한 쪽을 집었다. 

“맛있네. 우리 동네 음식이 얼마나 맛없는지는 익히 알고 있지만, 남쪽 동네에 와 보니 더욱더 실감나네.”

“진짜 괜찮아?”

“괜찮다니까!”

하케는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체념하고 남은 국수를 마저 입으로 가져갔다. 속으로, 대체 이 주소를 어떻게 찾아가야 하나 하고 고민하면서. 



하케와 내가 둘 다 스마트폰을 가지지 못한 이상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쪽지를 보이고 가는 길을 묻거나 아니면 pc방으로 들어가 주소를 검색해서 위치를 알아내거나. 

먼저 pc방으로 간 우리는 주소를 검색했다. 하케는 컴퓨터 앞에 앉으려 하지 않았기에 주소를 검색하는 건 내 몫이었다. 하케는 남이 만지던 컴퓨터를 만지고 싶지 않다며 내게 대신 검색을 요청했다. ‘내가 니 시다바리?’라는 그 오래된 영화 대사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지만 도로 넘겨야 했다. 어쩌랴, 따라온 내가 죄인이지. 

일단 소예 씨가 사는 동네 근처에 위치한 지하철역을 알아낸 우리는 지하철로 이동하기로 했다. 하케는 주저하면서도 동의했다. 그는 가벼운 밀실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지하 공간에서 그 증세를 심하게 느끼는 편이었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여자에게로 가는 길이 이렇게 예상 외로 멀고 험난한 여정이구나 싶었다.

지하철은 과연 하케가 현기증을 일으킬 만한 곳이었다. 쾌적한 수도권의 지하철과 달리 낡고 지저분했으며 정체모를 묘한 냄새들이 떠다녔다. 의외로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대부분은 관광객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 탓인지 하케의 금발이나 별난 복장도 이 곳에서는 그리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았다. 하긴 하케의 복장 역시 평소에 비하면 매우 얌전한 편이었다. 

“멀미가 나서 죽는 줄 알았어.”

마침내 지하철에서 내린 하케가 그간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듯 긴 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거의 기절할 뻔했어.”

일단 지하철에서는 내렸지만, 소예 씨가 사는 아파트가 있는 동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버스를 타야 했다. 하케는 처음에는 택시를 타겠다고 했지만, 버스 정류장이 한산한 것을 확인하고는 그냥 버스를 타겠다고 했다. 다행히 버스로 20분이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버스는 미어터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타고 보니 좌석이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하케에게 좌석을 양보했다. 지하철에서 꽤나 힘들었는지 하케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버스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KISS의 <Hard Luck Woman>이 스피커에서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전주 부분의 기타 사운드가 달콤 쌉싸름한 그 곡을 무척 좋아했었다. 유안도, 나도. 



Rags, the sailor's only daughter

A child of the water

Too proud to be a queen



귀에 익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다가 어느 순간, 하케를 내려다보니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

“즐거워 보여서.”

“아.”

고등학교 때 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 탓이었을까. 흔들리는 버스의 손잡이를 잡고 있자니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들이 한결같이 고색창연해서 더더욱 그런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널 위해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만은 아니니까.”

“흠.”

“덕분에 여행이라는 걸 하고 있잖아. 그건 너한테 고마워할 일이지. ”

하케는 약간 움찔했다. 버스가 흔들린 탓이었을까. 

마침내 주소에 적힌 아파트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지만, 정류장을 잘못 알고 그만 두 코스나 앞서 내리고 말았다. 속절없이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네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터덜터덜 걷던 우리는 하늘색 간판을 단 깔끔하고도 단촐한 커피숍을 발견했다. 주소에 적힌 아파트 단지의 입구가 멀리 보이는 지점이었다. 마침 여기가 안성맞춤이겠다 싶었다. 

“네가 소예 씨를 만나는 동안, 나 여기서 기다릴게.”

“무슨 소리야. 같이 가.”

“뭐?”

“나 혼자 가면, 나 혼자 가서 소예를 보면, 그냥 그애를 납치할지도 몰라.”

농담이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하케와 함께 걸었다. 

“전화번호도 몰라?”

“몰라. 그건 안 가르쳐 줬어.”

“알아오려면 제대로 알아왔어야지. 그러면 이제 어떡할 거야?”

“기다려야지. 집 앞에서.”

“날 기다렸을 때처럼?”

“아마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과연 오늘 안으로 집에 돌아가는 것은 고사하고, 부산역까지라도 무사히 되돌아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멈춰섰던 걸음을 내딛으려는데 갑자기 하케가 나를 잡아끌었다. 

저 멀리서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하케의 시선이 그녀에게 멎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름아닌 그녀가 소예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나는 재빨리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소예는 천천히 우리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유미와는 대조적으로 매우 가냘픈 체구의 소유자였다. 얼굴은 이렇다 할 두드러진 특징이 없는 느낌이었지만 뜯어보니 예쁘장한 생김새였다. 전체적으로 청순한 느낌의 여성이었다. 볼륨 매직을 한 듯 윤이 흐르는 머리카락을 어깨 정도로 늘어뜨리고 베이지색 원피스에 하얀 가디건을 걸쳤다. 장을 봐 오는 모양인지 제법 묵직해 보이는 천으로 된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하케를 보자 감전이라도 된 사람마냥 멈춰섰다. 이미 하케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경악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만의 독특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고 나서야 하케가 그녀를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푸근한 표정으로 미소지을 줄 아는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만나기 힘들 터였다. 

“하케!”

이쯤에서 물러나야겠다 싶어, 얼른 딴청을 피우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는 뒤돌아서서 조금 전 내가 점찍었던 커피숍으로 향했다. 



If never I met you

I'd never have seen you cry

If not for our first "Hello"

We'd never have to say goodbye



예상했던 대로 커피숍 안은 고즈넉했다. 혼자 쉬어 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런 분위기의 커피숍을 좋아했다. 헝겊으로 만든 귀여운 인형들과 액자들로 장식된 벽이 있고, 딱딱한 철제 의자가 아닌 폭신한 쇼파에 앉을 수 있는 곳. 조명이 너무 어둡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커피값이 점심값보다 비싸지 않은 곳. 

카운터에 선 여학생처럼 앳된 바리스타는 이 계절에 아이스커피를 주문하는 나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 점도 마음에 들었다. 목이 탈 때 뜨거운 커피는 쥐약이나 다름없다. 가끔 겨울에도 아이스커피를 주문하는 이유다. 어쨌든 차가운 커피를 마시며 한숨 돌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뜻밖에도 소예 씨가 들어왔다. 

그 뒤를 하케가 따라 들어왔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하필이면 나를 등진 바로 앞 자리에 앉았다. 일어나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이유까지는 없다 싶었다. 어쨌든 먼저 들어온 쪽은 내 쪽이고 다행히 내가 앉은 방향에서는 두 사람 중 어느 한 쪽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마실래?”

“됐어. 너나 마셔.”

“미안해. 네가 이런 곳 싫어하는 건 알지만, 아까 거긴 내가 아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어서 말이야.”

두 사람의 대화를 이렇게 생생하게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그게 중요해?”

“아니야.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다시는 못 만나길 바란 건 아니고?”

“하케, 너 변했구나. 그런 식으로 비꼬는 거 누구보다 싫어했었잖아.”

“미안해.”

잠시 침묵. 

“일행이 있는 것 같던데. 내가 잘못 본 거야?”

“......”

“말하기 싫구나. 아무튼, 널 봐서.....참 좋다.”

또 다시 침묵. 그러나 잠시 후 들려온 하케의 목소리는 탁하고 힘이 없었다. 

“그냥, 궁금해서. 잘 지내고 있는지. 그래서 와 본 거야.”

“그랬구나. 저, 하케. 지금도 유미 씨하고 같이 지내니?”

“응. 같이 있기 싫어서 혼자 지낼 곳을 찾아보는 중이지만, 어쨌든 같이 있어.”

“그렇구나. 결혼은?”

“안했어. 너는?”

“나는......하케, 사실은 나, 결혼했어.”

하마터면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그 순간 하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버스에서 오랜만에 들었던 그 곡을 떠올렸다. 뭐더라, 그렇지. Hard Luck Woman. 그 곡의 가사를 떠올리며 애써 흐트러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케는, 하케는......

“그러면, 널 납치해 가는 건 불가능하겠다.”

바보, 겨우 그런 말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니었을 텐데. 그러나 어이없는 대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저, 미안하지만 있잖아. 하케. 진짜 미안하지만, 지금 네 시 반이야. 우리 아기,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야 할 시간이거든. 원래는 세 시 반에 데려와야 하는데. 사정이 있어서 이번 주만 좀 더 오래 맡겼던 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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