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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Jun 24. 2021

JAZZ 99 -2

재즈 나인티나인

 2. 



  어떤 추상적인 존재에 대한 패배의식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한 인간에 대한 패배의식보다 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한 인간에 대한 패배감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패배감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먼저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본론에 들어갈 수 없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만약 이 ‘패배의식’이라는 놈이 내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와 앉지 않았던들 나는 결코 내 발길을 계양동으로 향하지 않았을 테니까. 

  “요즘 뭐하고 지내니?”

  내게 가당치도 않은 패배감을 심어준 그녀가 한쪽 어깨를 치켜올린 묘한 자세로 나를 쳐다보며 내게 물었다. 우리가 서로를 관찰할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 이후로 그녀는 항상 나만 보면 ‘뭘 하고 지내느냐’는 질문만 되풀이했다. 나는 어째서 내가 하는 행동들이 그토록 그녀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 있는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글 써.”

  “아, 그 희곡? 그거 잘 되어 가?”

  나는 별로 진척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 이번에 유럽 여행 가. 이번에는 북유럽 쪽을 좀 돌아보려고 해.”

  맙소사! 

  북유럽의 백야 따위가 어째서 내게 패배감 따위를 불러일으켰는지는 잘 모르겠다. 좌우지간 분명한 것은 북유럽의 백야는 현재의 나로서는 꿈속에서나 구경할 수 있을 만한 존재이고 광경이었다. 물론 그날 이후 내 머릿속은 항상 백야 상태가 되어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불모의 땅으로 남게 되었지만 말이다. 무슨 뜻인지 모를 사람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날 이후 창조력을 잃은 내 머리는 더 이상 희곡은커녕 희곡 비슷한 것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패배의식의 근원은 백야보다 좀 더 현실적인 문제에 있었다. 그녀와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전교 1, 2등을 번갈아가며 손에 쥐던 사이였다. 말하자면 라이벌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체로 그녀보다는 내가 1등을 더 자주 손에 쥐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잘 나가는 S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나는 결국 그보다 한 단계 낮은 또 다른 S대학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내가 들어간 S대학은 진짜 S대학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명문대학임에는 틀림없었다. 악연이 되려고 그랬던가, 그녀 역시 나와 같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경쟁은 계속되었다.

  나는 불문학을 전공했고 그녀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했고 그녀는 대학을 중퇴한 후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얼마 후, 나는 석사 학위를 손에 거머쥐었고 그녀는 결혼을 했다. 나는 학위를 딴 직후 유학을 준비했지만 그 상황에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탓에 내 유학 계획은 모조리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결혼을 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유학을 떠났고, 돌아온 후에도 심심치 않게 외국 여행을 다녔다. 그러니까 소위 ‘잘 나가는 남편’과 결혼을 한 것이었다. 

  자, 이쯤 되면 그다지 내 패배의식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으리라. 졸지에 목적지를 잃어버린 기러기 신세가 된 내 가슴은 A에 대한 질투와 증오심으로 불타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A가 탈 유럽행 비행기에 같이 올라타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수는 없었던 노릇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내 유학을 좌절시킨 장본인인 아버지란 작자를 죽인다 해서 내가 예정대로 미국 유학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 모든 것이 한갓 부질없는 망상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 머릿속을 잠식한 백야를 똑바로 응시할 여유를 얻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나는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그 거리, 카페 쎄잔과 열십자로 교차하는 아스팔트 위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언덕을 향해 내리뻗어 언덕을 완전히 내려온 지점에서 주황색과 녹색의 불을 외로이 밝힌 'JAZZ 99(재즈 나인티나인)‘이 있는 바로 그 거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옆도 뒤도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했던 그 패배의식의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내가 서 있던 곳이 왜 다른 곳이 아닌 그 거리여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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