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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Jun 26. 2021

JAZZ 99 -3

재즈 나인티나인

 3



  “네 삼촌이, 계양동에 있는 집을 1년 간 쓰도록 허락해 주셨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정확히 나와 같은 농도의 패배의식으로 인한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도 맏딸인 내게 큰 기대를 걸었었고, 그 기대를 이제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안 될 판이었다. 

  “너 혼자 지낼 수 있겠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내가 혼자 지내야 할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의 오만에 가까운 자긍심, 아니 나의 오만을 익히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패배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내게는 적이 많았다. 아니,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들은 내 적이 될 수 없었지만, 나는 항상 그들을 내 적으로 간주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나는 적이든 친구이든 어느 누구와도 접촉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패배의식과는 또 다른 어떤 원인에서 기인한 것이었지만 그에 관해서는 앞으로 차차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단지 여기에서는, 내가 경산으로 가기 위한 짐을 지체 없이 꾸렸다는 사실만 일러두도록 한다.

  계양동에 있는 삼촌의 원룸은 운 나쁘게도 개발제한구역에 속하는 산등성이의 일부를 낀 언덕 위에 있었다. 몇 개의 고시원이며 원룸이 밀집해 있다고는 하지만 눈앞에 면한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냉기에 나는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말하자면 홀로 조용히 명상이나 하며 세월을 보내기 위해서는 최적이라고 할 만한 장소에 도착한 셈이었다. 

  고즈넉하고, 조용하고, 을씨년스러운 동네였다. 몇 채의 고시원과 원룸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고, 그리 많지 않은 수의 가구로 이루어진 주택가가 근처에 있긴 했지만 역시 생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마저도 걸어서 20분이 걸리니 확실히 생활하기에 적합한 마을은 아니었다. 아니, 매우 불편한 곳이었다. 

  쓸쓸하고 괴괴한 황무지였다.  


  ‘무호 원룸’.

 내가 살 집의 이름을 확인한 나는 미리 받아 온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비로소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약간 낡긴 했어도 예상 외로 깨끗하고 널찍한 원룸이었다. 이 정도라면 당분간 혼자 지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두 다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교통수단도 갖지 못한 터라 장을 볼 때 다리품을 팔아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겠지만, 그 이외에는 이렇다 할 문젯거리가 없을 것 같았다.

  가지고 온 빈약한 짐을 정리하던 나는 문득 일어나 베란다 쪽을 바라보았다. 커튼이 달리지 않은 베란다 밖으로 창밖의 나무들이 얼핏 비쳐 보였다. 그 뒤로는 먼 산과 잡초로 뒤덮인 언덕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베란다로 나간 후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층이었던 탓에 나무를 타고 침입할 가능성이 충분한 도둑을 막느라 그랬는지 간격이 넓은 쇠창살을 군데군데 박아 넣은 방범창이 눈에 거슬렸지만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도시에서는 이런 풍경을 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제야 내가 변두리로 이사 왔다는 사실을 좀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사? 아니다. 이사가 아니다. 

  나는 그저 도망쳐 온 것뿐이다. 

  이 곳에서라면, 죽어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어느 날 문득, 절실하게 죽고 싶을 때, 애써 자살을 기도할 필요도 없이 잠든 채 고요하게 숨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고즈넉한 언덕 위의 작은 마을에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견딜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가지고 온 많지 않은 돈을 생각했다. 돈이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그때도 지금처럼 주저앉아 굴욕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을까. 유배지에 다다른 죄수여, 노동하지 말고 감옥에 갇혀 죄를 반성할지어다? 혹은 노동하여 스스로 먹고 살 길을 모색할지어다? 

  이곳은 일하기에는 적합한 곳이 못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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