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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Jun 26. 2021

JAZZ 99 -4

재즈 나인티나인

 4




  며칠을 빈둥거리며 짐 정리로 소일하던 나는 이윽고 남아도는 시간을 쏟아 부을 구덩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황량한 언덕 주위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무호 원룸을 포함한 몇 채의 원룸을 기준으로, 언덕의 북쪽과 서쪽은 제법 큰 산을 면하고 있었으며 그 아래 산기슭을 따라 작은 주택가를 포함한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마을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버스정류장과 시장이 즐비한 제법 번화한(그러나 도시의 번화가에는 어림없는)동네가 나타나지만, 그곳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반대로 언덕의 동쪽은 황량한 언덕이었는데, 무슨 공사를 하다 말았는지 나무나 풀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온통 파헤쳐진 땅이었다. 그야말로 버려진 땅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언덕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아스팔트길이 내가 사는 원룸 가와 그 버려진 땅 사이에 넓고 을씨년스러운 경계선을 긋고는 조금 더 나아가 막다른 지점에서 멈춰 있었다. 아스팔트가 멈춘 자리 한편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소규모의 공장이 서 있었다. 그 앞에서는 항상 정체불명의 술들이 담긴 여러 개의 박스가 겹쳐진 채 쌓여 있었다. 처음에는 빈병이리라고 생각하며 무심히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결같이 뚜껑을 열지 않은 새 술병들이었다. 누가, 왜 그런 곳에 술을 그렇게 많이 쌓아두었을까. 나로서는 의아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아스팔트가 언덕 아래쪽을 향해 가팔라지는 지점에 이르러 건너편의 황량한 땅 쪽을 바라보면, 홀로 덩그러니 자리 잡은 카페 쎄잔을 마주하게 된다. 몇 걸음만 건너 뛰어가면 금방 다다를 수 있는 곳인데도 내게는 그 곳이 어쩐지 내가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구역처럼 느껴졌다. 

  주황색 간판에 씌어진 ‘쎄잔’이라는 글자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 카페의 주인은 무슨 이유에서 카페의 이름을 ‘세잔’이 아닌 ‘쎄잔’이라고 지었을까. 단순한 맞춤법의 착오 문제가 아닌 듯했다. 세잔이라는 화가의 이름은 어지간한 카페나 술집의 이름으로는 너무나 흔한 소스이니까. 그러나 확실히 힘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로 ‘세-’를 발음하는 것보다는 약간 힘을 주어 ‘쎄-’라고 발음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어쩌면 저 카페의 주인은 생각보다 똑똑한 사람인지도 몰랐다.

  나는 마당에 놓인 유럽풍의 작은 탁자를 바라보았다. 황혼녘에 바라보는 카페 쎄잔의 탁자는 매우 쓸쓸하게 보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희고 앙증맞은 탁자와, 그 뒤로 오롯이 선 자그마한 단층 건물 너머로 펼쳐지는 노을은 어딘가 모르게 몽환적인 데가 있었다. 그 노을은 도수가 약한 알콜처럼 하늘이라는 거대한 잔을 채우고 있었다. 

 그 후, 황혼 무협이 되면 나는 습관처럼 카페 세잔이 건너다보이는 아스팔트 맞은편 인도에 멈춰서서 그 덧없이 화사하게 펼쳐지는 노을에 취하곤 했다.        

  확실히 이 언덕은 일반적인 주택가와는 조금 다른 특성을 띠고 있었다. 

  공공건물답지 않게 을씨년스러운 시민회관을 지나 자그마한 파출소에 이르면 길은 가파르게 내리뻗어 언덕 아래까지 이른다. 그 사이로 난 작은 도로들과 음식점, 고양이만 전문으로 분양하는 이른바 캣샵(CATSHOP), 그리고 황태구이 전문점까지 내려오면 비로소 언덕을 완전히 내려오게 된다. 바로 이 언덕의 왼쪽 입구에 해당하는 곳에서 나는 단숨에 내 시선을 사로잡아 버린 그 음울한 녹색과 주황색의 앙상블을 목격했다. 


  JAZZ 99(재즈 나인티나인).


  6차선 도로가 열십자로 교차하는 가운데, 그 중심부의 한 모퉁이에 선 그 카페는 애당초 그곳에 있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카페는 좀 더 번화한 곳, 혹은 좀 더 음습한 곳, 혹은 좀 더 낭만적인 장소에 있었어야 했다. 어째서 그처럼 황량하고 멋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장소, 이상하게도 여기저기에서 부조리한 치장의 흔적들이 주위와 어울리지 못하고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이런 장소에 저렇게 몽환적인 조명이 빛을 발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 

  나는 밤을 잊은 채 2층을 향해 고개를 들고 창문 틈으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불빛을 쳐다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1층은 그야말로 재미없게도 황태구이 식당이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JAZZ 99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매우 좁고 경사각이 큰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계단의 입구는 기차의 연통을 연상시킬 정도로 깜깜했다. 그 계단은 2층이 아니라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동굴의 입구처럼 생각되었다. 게다가 그 안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존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시대의 괴물 따위를 나는 믿지 않지만, 예감이었을까? 나는 저 주홍색과 녹색의 겉살 속에 붉은 속살을 감춘 카페에서 누군가를 만날 것임을, 그 존재는 나를 파멸시키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그게 내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내 운명을 향해 돌진했어야 마땅했다. 낭떠러지를 손으로 더듬어 올라가듯 저 75도로 꺾어진 운명의 계단을 딛고 어둠을 따라 올라갔어야 마땅했다. 내가 주저했던 이유는 단지 파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곳이 그토록 쉽게 나를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또 다른 본능적인 깨달음이 있었던 탓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그 음울하고 고색창연하면서도 동시에 지독하게 나를 매료시키는 그 선명한 조명의 잔치를 지켜보며 얼마간의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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