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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Jul 08. 2021

밀크 블루 캔디 12 -(1)

12 -(1)

12



나는 다시 고독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어찌된 셈인지, 그날 새벽에 벌어진 모든 일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욕정 없는 섹스를 어설프게 시도하다 포기한 후, 하케가 내 팔꿈치 안쪽을 끈질기게 물고 놓아주지 않던 기억만이 남아 있다. 아니 그는 내가 아닌 내 팔꿈치 안쪽과 딥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간지러워서 팔을 빼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차라리 혀를 입에 집어넣는 편이 나았다. 

항상 나를 잡아끌 때 손목이 아닌 팔꿈치를 잡아 끌던 그 손의 강한 악력이 나를 아프게 했다. 



다음날 오후 예정된 기차로 집에 돌아오면서 우리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서로 어색해하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그러기에는 둘 다 너무 피곤하고 지친 상태였다. 팔꿈치가 아파서 팔을 걷어보았더니 팔 안쪽의 연한 피부가 멍과 키스 마크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상처줘서 미안.”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서기 직전 하케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먼저 내리고 뒤따라 내가 내렸다. 

“상처주지 않았어.”

너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해서, 하케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상처를 준 건 내 쪽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아는 하케는 짓궂기는 해도 알고 보면 소심한 사람이었다. 묘하게 가슴이 아팠다. 



한동안 끔찍한 꿈을 꾸었다. 유안에 관한 꿈이었다.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유안이 길거리에 맥없이 쓰러져 있는 꿈이었다. 

거의 사흘 혹은 나흘에 한 번 꼴로 반복되던 그 꿈은 거의 한 달을 질질 끌고 난 다음에서야 마침내 사라졌다. 

부산에 다녀온 후 하케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케로 인해 내 안의 유안이 파괴되어 버렸다고 생각하면, 하케를 죽이고 싶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를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시점에서 그가 찾아오지 않는 것이 못내 나에게는 다행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네가 날 지켜주잖아. 

슬라이를 만나러 갔다가 빠져나왔던 그날 새벽, 길거리에서 하케가 외쳤던 그 외침을 떠올리고 나는 때때로 깜짝 놀란다. 

그는 이제 누구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일까. 슬라이로부터 줄기차게 도망치는 그를, 지켜줄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을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그는 더 이상 소예라는 여자에게 일말의 희망도 품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늦가을이 되어 마침내 나의 생일이 돌아왔다. 나의 생일이자 유안의 생일이기도 했다. 우리는 둘 다 서른 살이 되었다. 

만으로는 아직 스물 아홉 살이다.

나의 생일을 정확히 아는 친구들이 많지 않은 탓에 생일을 축하해준 이는 적었다. 게다가 모두들 내가 생일 파티라는 명분으로 거창한 파티를 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S브랜드의 커피를 다섯 잔 정도 살 수 있는 카드를 선물로 받았다. 나로서는 더없이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날 저녁, 별 생각없이 클릭한 인터넷 뉴스에서, 나는 뜻밖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유미가 죽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아버지는 본사가 외국에 있는 다국적기업의 한국지사장이었다. 1남 2녀 가운데 막내딸이었던 그녀가 홍콩의 어느 빌딩에서 추락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유서가 없어 처음에는 자살인지 확인되지 않았으나 이미 전에 자살을 시도했던 전적이 있는데다 죽기 전날 애인과 싸운 후 결별을 피할 수 없게 되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는 내용이 3류 인터넷 기사답게 제법 선정적으로 각색되었다. 오래 전 죽은 홍콩배우 장국영이 투신한 그 빌딩으로부터 불과 몇 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상세한 정보마저 실려 있었다. 아버지인 회장이 정략 결혼을 강요하는 데 대한 반발이 극심했다는 주위 증인들의 제보도 잇따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은 기사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경찰은 요컨대 그녀를 자살로 몰고 간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그녀의 애인의 행방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기사와 더불어 실린 사진 속 주인공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유미였다. 

유미, 하케의 또 다른 슬라이. 하케는 그녀로부터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도망다녔었다. 그리고 또 다른 슬라이가 있었다. 하케는 그를 두려워했지만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했었다. 

하지만, 하케를 괴롭혔던 슬라이는 어느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의 내면이었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의 내면에 자리잡은 깊은 함정을 그날 새벽에 보았다. 그가 모든 걸 펼쳐 내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자리잡은, 눈물로 채워진 끝이 없이 깊은 구덩이를. 

경찰이 쫓고 있다면 상황은 골치 아파진다. 하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오기나 한 걸까. 아니면 홍콩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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