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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Jul 11. 2021

밀크 블루 캔디 12 -(2)

MILK BLUE CANDY

마침내 겨울이 되었고, 나는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약국에서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물론 돈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집 밖을 나가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생활이 내게는 더더욱 필요했다. 

부산을 다녀온 후 하케는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아마도 소예와 유미로 인한 충격에서 헤어날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사랑했고, 자신을 사랑했던 여자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쨌든, 나는 다시 그가 없는 일상에 익숙해져 갔다. 한 때의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를 만들어준 친구라고만 규정하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나도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대로 영영 하케를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케, 다시 나타나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바닐라 쉐이크가 무척 먹고 싶었던 게 문제였다. 머릿속으로는 아이스커피가 필요하다고 줄기차게 외쳤지만 나는 잰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단숨에 한 블록을 걸어 맥도날드에 도착한 후 바닐라 쉐이크를 주문했다. 아이스커피가 아닌 다른 음료를 주문하는 내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묘한 짜증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닐라 쉐이크가 담긴 컵을 들고 막 돌아선 순간 누군가가 잽싸게 컵을 낚아챘다. 너무나도 뜻밖이었던 데다가,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검은 밀리터리 풍의 일자형 롱 코트에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염색한 그의 얼굴은 납빛이었다. 제대로 자지 못한 듯 눈가에는 화장으로 감추지 못한 다크서클의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잘 먹을게.”

하케가 언제 나타났는지 내 앞에 서 있었다. 역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데는 남다른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내게서 빼앗은 바닐라 쉐이크가 담긴 컵을 들여다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이런 거 안 먹잖아? 웬일이야? 설탕 크림 없는 아이스커피가 아닌 다른 걸 주문하다니? 너 임수안 맞아?”

“맞아.”

컵을 다시 빼앗을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이미 하케는 스푼으로 바닐라 쉐이크를 신나게 떠먹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동안, 갑자기 뼈에 사무치는 반가움이 몰려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가게를 나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가 나를 뒤쫓아오는 소리가 났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왜 화가 난 거야?”

뒤에서 하케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내가 만났던 하케의 두 여자가 떠올랐다. 그녀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하케에게 묻고 싶다는 생각이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유미 씨 얘기 인터넷 뉴스에서 봤어.”

하케와 나는 장난감 집 안에 앉아 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행적을 살폈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그렇게 숨어서 대화했다. 다른 때라면 재미있고 즐거웠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뭐 그랬겠지.”

“어떻게 된 거야?”

“난 몰라. 자기가 제멋대로 죽은 걸 어떡하라고. ”

“넌, 아는 게 없어?”

하케는 어깨를 움츠렸다. 

“나하고 싸운 건 맞아. 그래서 의심을 좀 받긴 했지. ”

“헤어지자고 했어?”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내가 아니야. 단지 대답만 했을 뿐이지. 오케이, 라고. 더 이상은 묻지 마. 나도 힘들었어. 홍콩 경찰한테는 취조라면 받을 만큼 받았으니까. ”

“여기서는?”

“다행히 양쪽 다 떠넘길 구실이 좋잖아. 홍콩 쪽은 당신네 나라 사람이니 당신네들이 수사해라. 여기에서는 홍콩에서 벌어진 일이니 수사는 홍콩에서 하라. 뭐 법적으로야 어떤 식으로든 규정이 있겠지만 어쨌든 난 무혐의 처리됐어. ”

하케가 소예와 행복해질 기회를 빼앗은 유미를 떠올린다. 어쩌면 그 울분으로 하케가 극단적인 행동을 해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내 앞에 선 이 남자는 살인자가 된다. 그런 내 심정을 눈치챘을까. 하케의 표정에 분노가 떠올랐다. 

“너,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야. 다만......”

“뭐가 아니야! 네 눈을 보면 알아. 의혹이 가득하군. 상관없어. 네가 믿건 말건,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아. 그리고 만약 죽였다면, 그걸 숨기는 건 더더욱 못하고.”

그의 해명은 간결하고 단호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경찰이 그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믿어 주지는 않았으리라. 뭔가 다른 방법을 써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네가 유미 씨와 싸웠던 건 소예 씨 때문이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헤매던 끝에 가까스로 그런 질문을 했다. 하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피곤하고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무것도 못 해줘서 미안해.”

솔직한 마음을 그렇게 전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장난감 집에서 빠져나오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아마 어린아이가 아니어서, 그런 곳에 들어가 놀기에는 너무 큰 어른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하케와 나는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울 수 밖에 없는 그런 어린아이의 마음 때문에, 둘 다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러면,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떡하긴. 살던 대로 사는 거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느 새 뒤따라 나온 하케는 나를 유심히 살폈지만 나는 그 시선을 외면했다. 

하케의 말을 의심해서가 아니었다. ‘살던 대로 사는 거지’라는 말이 참을 수 없는 서글픔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못 만날지도 몰라. 어쩌면, 봄까지는.”

“그래.”

“그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어. 너는 여전히 날 지켜주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널 보자마자 금세 알았지. 너는 여전히.”

그는 잠시 말을 잇기 힘든 사람처럼 말을 끊었다. 진한 화장 아래로 초췌한 안색이 여과없이 드러나 보였다. 그의 마음고생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전히 기다리고 있구나. 끝내지 않았어. ”

아니다. 이걸로 끝이다. 그가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까. 이걸로 됐다. 

더는 뒤돌아보지 말자고 생각하고 나는 돌아서서 집을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더는 만나지 않아야 했다. 그의 말대로, 살던 대로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싫어도 일상을 지탱해나가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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