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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Aug 20. 2021

밀크 블루 캔디 -에필로그(하케의 메모)

Milk Blue Candy

에필로그― 하케의 메모 




솔직히 말해서, 이런 기록 따위를 남기기는 싫다. 하지만, 내가 잘못된다면, 수안이 진실을 알 기회는 나와 함께 영영 사라지고 만다. 괴로운 일이지만 만일을 대비해 간단한 메모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임유안이 죽자, 슬라이는 내게 그의 부고를 그의 누이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부탁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웠다. 나는 당연히 거부했고 그에 대한 응징은 처절했다. 그 세부적인 내용까지는 밝히지 않겠다. 사실 한편으로는, 임유안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그 순간에 외쳤던 그 이름의 주인, 그의 누이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만난 순간, 나는 매우 당황했다. 내가 본 어떤 여자와도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남자가 아닌 여자의 눈에서, 그토록 굳은 의지와 날카로운 통찰력이 새어나오는 것을 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 빛나는 눈은 쌍꺼풀도 없었건만 꽤 또렷했고, 게다가 믿을 수 정도로 아름다운 곡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빠져든 셈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집요함으로 그의 남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내가 그녀의 쌍둥이 형제인 임유안을 알고 있노라고, 게다가 내 눈으로 직접 그의 죽음을 목격했노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쉽게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날을 잊지 못한다. 한밤중에 화장실로 들어간 나는 그곳에서 금이 가서 쩍쩍 갈라진 거울을 보았다. 묻지 않아도 그게 누구의 작품인지는 뻔했다. 

그렇게 거울을 박살내고 나간 유안을, 수안은 집요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되돌아와 거울을 원래대로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집안에 낯선 남자를 들이고도 코까지 골아가며 잘만 자는 임수안에게 화가 났지만 그녀를 깨울 수는 없었다. 

잠들어있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느낀 처량한 아픔을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유미는 물론이고, 소예조차 내게 그런 기분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었다. 나는 소예를 떠올리며, 그녀에게 쏟아부어 끝내는 소진해 버린 나의 모든 열정을 되씹었다. 




소예와 헤어진 후, 견딜 수 없는 공포로 나를 내모는 그 존재의 실체에 대해서는 나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이름을 붙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공포의 대상에 슬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의 주인인 내 옛 친구와 유미 어느 쪽도 사실은 아닌,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존재에게 말이다. 

어이없게도 임수안은, 그런 나의 공포를 잠시 잊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의 기준에 무심했고, 직감에 의존해 움직이는 그녀는 임유안이라는 키워드만 제거하고 나면 무섭도록 강인한 여자였다.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며, 그녀의 숨결을 느끼는 동안 나는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곤 했다. 

그녀는 나라는 저울의 균형을 잡아주는 저울추였다. 그녀가 없다면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내릴 게 뻔했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임수안의 균형을 잡아주는 추는 다름아닌 임유안이었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임수안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녀가 없는 곳에서 나는 더없이 이기적이고 잔혹하며 사악했다. 

그녀의 기다림의 무게를 떠올리는 동안, 내게는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그녀를 기다리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게 되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 말없이 나를 자기 집에 들여 재워준 그녀에 대한 측은함 때문에 잠든 그녀를 몇 시간이나 지켜보았던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사는 빌라의 로비에서 앞마당에서 그리고 그녀의 집 뒤편에 있는 공원에서 몇 시간을 서성댔는지도. 

그 중에서도 가장 말하기 힘든 사건은 놀이공원에서 일어났다. 정말이지 임수안과 싸우느라 버스 뒤에서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흥분한 내 몸이 오르가즘을 느끼다가 결국 사정을 해버릴 거라고 꿈에서라도 상상이나 했겠는가. 옷도 벗지 않았고 당연히 삽입도 하지 않았는데 발기는 어떻게 가능했으며 사정은 또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그녀의 존재는 그때까지도 내내 억누르려고 애썼던 소예에 대한 그리움을 폭발시키고야 말았다. 소예는, 내가 진심으로, 아무런 혼탁한 감정 없이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여자다. 그녀를 위해 내가 치른 댓가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임수안을 만난 건 정말이지 실수였다. 



임유안이 죽은 것이 아니라 해외로 도피한 흔적을 꾸며내느라 꽤나 고심했다. 임수안이 그의 행적을 추적해올 때를 대비해서 이런저런 대안을 만들어 두었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임유안의 행적을 추적하지 않았다. 

슬라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내 안의 그 악마가 내게 충고했다.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슬라이라는 이름의 진짜 주인인 나의 옛 친구와 제 3의 슬라이가 된 유미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요컨대 진실을 빨리 가르쳐주지 않는 게 더 가혹하다고들 했다. 

그건 그들의 생각이다. 

임수안을 끝장내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건 나를 죽이는 거나 다름없었다. 죽는다 해도 그녀를 잃기는 싫었다. 다행히 그녀의 안에 자리잡은 유안은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기울어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고달픈 외로움 가운데서도 내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원인불명의 하혈로 인해 그녀가 병원에 실려갔을 때 유미에게 전적으로 부탁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녀에게는 단지 뒤처리를 부탁했을 뿐이었다. 일을 끝내자마자 나 또한 즉시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수안은 쉽게 눈을 뜨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임유안을 부르며 소리를 질러대는 꼴까지 보고 나자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임유안의 죽음을 알리고 싶었다. 천번 만번이라도, 내가 할 수 있었다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하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더라도. 

임유안은 임수안의 영혼 한가운데 어떤 생명보다 생생하게 살아 있었고, 그런 그를 두 번이나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안을 그냥 두고 볼 수 없게 된 것은, 그 혹독한 기다림 가운데 그녀가 병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수안에게 함께 소예를 만나러 가자고 한 제안이 실수였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예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녀에게 퍼부었던 나의 열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소예는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없는 시간을 살아가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행복을 찾았다. 

소예가 갈구했던 행복을 내가 끝내 주지 못했던 그 현실이 나를 아프게 했다. 

그리고 그 현실 때문에, 그리고 슬라이 때문에 나는 결국 수안 또한 잃을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잃어야 할 운명이라 해서 순응하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마지막까지 저항할 생각이었다. 내가 죽지 않아도 되는 마지막 이유였다. 

유미를 밀어 떨어뜨린 것은 어디까지 그녀 자신이지 내가 아니다. 하지만, 미안했다. 어쩌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택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몫이었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수안에게 진실을 일러주지 않을 것이다. 

유안의 행방에 대해서도, 그리고 수안을 기다리는 나의 간절함에 대해서도. 



임수안이 원인모를 하혈 때문에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던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처음에는 유미를 먼저 병원으로 보냈지만, 결국 그냥 있을 수 없어 내가 직접 병원을 찾았다. 새벽까지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다가 잠시 지쳐 잠들었을 때 꾼 꿈이었다.

꿈 속에서 나는 수안과 내가 함께 갔던 놀이공원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날, 수안을 내버려 두고 혼자서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기구 따위를 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도중에 줄을 이탈해 나와 임수안이 줄을 섰던 장난감 기차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이미 장난감 기차를 탔는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를 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내가 섰던 특급열차의 대기열을 향해 걸어갔지만, 이미 줄을 선 사람들은 그 사이에도 몇 배로 늘어나 있었다 . 그때 거짓말처럼 길 한켠에 우두커니 선 수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안이 떠나보내지 못하는 유안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녀의 등 뒤로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었다. 마치 내 뒤를 끈질기게 따라붙는 슬라이처럼 말이다. 그녀의 스산하고도 애잔한 표정이 그 사실을 극명하게 일러주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우리가 갔던 그 놀이공원의 장난감 기차를 탄 모습으로 수안은 나의 꿈에 나타났다. 

꿈에서 수안은 믿을 수 없게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화사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임유안의 옆에 앉아 장난감 기차의 차창 밖으로 손에 든 부케를 흔들어 보이며 그녀는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임유안은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줄 모르고 마냥 행복해하는 수안의 환한 미소를 나는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웨딩사진을 촬영하는 카메라맨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꿈에서 깨어났을 때, 처절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가던 임유안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죽을 때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바보 따위는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바보가 사랑한 여자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언제까지 비밀이 지켜질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생각하는 것은 단 하나다. 봄이 되면, 다시 그녀의 곁에서 걷는 것, 그녀와 놀이터에 앉아 이야기하고, 커피를 마시고, 놀이공원에 가서 기차를 타는 것. 그때가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바보같은 장난감 기차를 꼭 같이 타고야 말리라고 생각한다. 지금으로서는 내게 남겨진 가장 절실한 미완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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