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마녀의 테마에세이
영문학을 전공하고도 이십년여의 생활을 경력단절 상태로 전공을 살리지 못하다가 마흔다섯이 다 되어가는 이 나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을 가르치기에는 일천한 실력으로 많은 걸 다시 새롭게 배워야 하는 데서 오는 중압감이 만만치 않았다. 다른 일을 병행하다 보니 주 6일을 일하면서 오는 체력적 한계는 덤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토요일, 그날도(사실 어제였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내 머릿속에 어떻게 해서 럼 레이즌 버터가 떠오른 건지, 내 의식의 흐름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생각나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새 필요한 재료를 사러 가는 길이었다는 것.
다행히 집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술도매창고가 있어서 급한 대로 바카디 럼을, 바로 옆 N 마트에서 버터와 건포도를 구할 수 있었다. 일단 재료를 구하는 데는 확실히 운이 따랐다.
럼 레이즌 버터는 건포도를 럼에 넣어 불린 후 버터에 박기만 하면 되는 지극히 간단한 레시피이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건포도에 럼을 부어 불리고, 버터는 실온에서 서서히 녹인다. 이 과정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일단 건포도는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치거나 혹은 럼을 부을 때 물을 두세 스푼 넣어주는 게 좋다. 그래야 럼이 건포도에 확실히 더 잘 스며든다.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하는 통에 물을 넣고 30분 더 불리는 과정을 거쳐야 했고 결국 시작한 지 6시간이 지나서야 만들기를 시작했다.
마침내 완성된 럼 레이즌 버터를 일요일 아침에 깨물며, 눈오는 토요일이었던 어제의 슬픔과 분노를 떠올려본다. 그 모든 슬픔과 허망함을 건포도에 버무려 물탄 술에 희석시키고 버터와 함께 녹이면서 나는 자신을 달랬다. 마침내 볼에서 함께 으깨진 럼레이즌과 버터, 그리고 허망한 울분을 하나로 뭉뚱그린 후 칼등으로 두드리며 나는 자꾸 흩어지려 하는 내 의지를 애써 단단하게 다져냈다. 작은 덩어리로 뭉쳐진 내 허망한 감정의 응어리들은 종이호일에 싸여 냉장실로 들어갔고 다시 하룻밤을 그 안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잠들어야 하는 기나긴 겨울밤을.
남은 레이즌 럼에 탄산수와 석류즙을 부어 만든 즉석 야매 칵테일 덕에 불면증에 시달리던 일주일의 피로를 마침내 긴 잠으로 풀 수 있었고, 늦은 아침 커피 한 잔에 곁들여 먹는 럼 레이즌 버터의 맛은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을 만큼 짭짤하고도 달콤하게 맛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힘을 얻었다. 다 괜찮아질 거라고 섣불리 미래를 낙관할 힘이 아닌 다른 힘을 얻었다. 설령 지금의 내 시도가 또 실패로 끝난다 해도, 그럼으로써 온통 실패로 점철된 인생에 또 하나의 실패를 추가하는 꼴이 된다 해도 “무너지지 않을”힘을 얻었다. 살면서 필요한 용기는 근거없는 기대와 희망을 끈질기게 간직할 용기가 아니라, 패배감에 무너지지 않고 다만 지금의 자신을 지켜낼 용기일 것이다. 눈오는 토요일의 럼 레이즌 버터가 그 짭짤하고도 달콤한 맛과 더불어 내게 선사한 근사한 선물이다.
(물론, 스트레스성 불면증 해소에 도움주신 야매 럼베이스칵테일의 은공 또한 빼먹지 말자. 감사 인사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두루두루 나눠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