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lsavina Mar 16. 2023

래셔널 다우트 (Rational Doubt)

합리적 의심


1



“동석이, 외제차 뽑았다매?”

담배를 피워 문 남 과장이 내게도 한 개피를 건네며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휴대폰으로 부지런히 여동생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돈 좀 빌려달라는 문자였다.  

-카드 없어?

-현금이 있어야 해서. 알잖아. 나 현금 거지인 거.

주차장 모퉁이를 따라 설치해놓은 화단 뒤로 커피숍과 이어진 작은 공터에, 이웃 커피숍에서 쓰다 폐기처분한 의자와 탁자를 임시로 빌어 가져다 놓은 자리가 우리 사무실 직원들의 흡연구역이었다. 키작은 관상용 나무 몇 개로 급조한 화단 덕에 사각지대가 형성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장소였다. 덕분에 코로나 시국에도 여기 숨어 있다 보면 잠깐씩이나마 마스크를 벗고 담배를 피우는 게 가능했다. 단, 화단 곁을 스쳐가는 행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면서. 

“못 보셨어요? 오늘 몰고 왔던데요.”

“아, 그럼 그 차가 동석이 차였어? 9849?”

“네.”

“하, 씨바 부럽네.”

남 과장의 폐로 들어갔다가 코를 통해 다시 뿜어져나오는 담배 연기가 여느 때보다 더욱 탁하게 느껴졌다. 농도 짙은 질투가 뒤섞인 탓이리라. 직급은 과장이라고 하지만, 바로 아래 부하직원인 나보다 불과 세 살 더 많았다. 

“넌, 안 부럽냐?”

“부럽죠.”

대답은 무심하게 했지만, 사실은 이미 부러워하기에도 지친 상태였다. 

회사를 취미로 다녀도 될 만큼 집이 잘 사는 편이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딱히 그런 티를 내고 다니지는 않아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부러워할 빌미가 없었다. 다만 꽤나 인물이 좋아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얼마 전 회사로 찾아와 인사했던 여자 친구도 꽤나 내 타입이라 그게 부러웠던 것이다. 딱히 직급이 의미없는 세무사 사무실인데다 나이도 업무도 비슷하다 보니 노상 녀석과 비교당해야 하는 고달픔이 있었지만, 부러워해본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얼마 전, 비트코인으로 큰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돌더니 그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떡하니 외제차를 몰고 나타난 것이다. 비트코인으로 벼락횡재했다는 소문이 그닥 신빙성있게 들리지 않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간에 횡재수가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저만치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자 남과장은 나직한 목소리로 욕을 씨부리며 팽개쳤던 마스크를 주워들어 집어썼다. 

“빌어먹을 답답한 마스크. 살아 생전 내던지는 날이 있기는 할까나.”

“향후 3년간은 힘들 거라고 하던데요.”

“그나저나 궁금하네. 동석이 놈, 난데없이 포르쉐라니. 무슨 돈이 어떻게 생긴 건지.”

“비트 코인으로 벌었다잖아요.”

“씨바 너 그 말을 믿냐? 가서 좀 물어봐. 너 동석이랑 안 친해?”

“안 친해요.”

간단히 잘라 대답하자 남 과장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대답에서 아주 그냥, 질투가 뭉게뭉게 뿜어져 나와.”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이 자식아, 라고 대답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 자식, 내가 그냥 안 둬.”

“네?”

“동석이 그거, 내가 그냥 안 둘 거라고.”

“왜 그러세요. 갑자기? 동석이가 뭘 어쨌는데요?”

“지난 번에, 그 거래처 중에 B업체, 중간 보고 들어간 거 있었잖아. 일처리 개판으로 해 놔서 하마터면 우리 다 물먹을 뻔한 거.”

“아, 그거요? 왜요?”

“지은이가 잘못한 건 줄 알고 우리 다 지은이 몰아붙였잖아? 그 덕에 걔 마음고생 하느라 아파서 병원신세 지고. 근데 알고 봤더니 그거, 동석이 작품이었어. 그 자식이 일 개판 쳐놓고 지은이한테 뒷수습 맡긴 거라고.”

“근데 유 대리가 왜 동석이 실수를 대신 뒤집어썼대요?”

“동석이가 하도 간곡하게 부탁해서 그냥 덮었대. 내 생각에는, 뭐 커피숍 쿠폰이나 상품권 같은 걸로 무마했지 싶어. ”

“하, 참. 그렇다고 덮어줄 게 따로 있지, 그런 걸 덮어줘요?”

“내 말이. 그 뿐인 줄 알아? 허구헌날 뺀질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지가 할 일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떠넘기고. 하 그런 놈이 주제에 외제차를 뽑으셨어? 세상 불공평해.”

여동석이 재수없는 자식이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녀석과 비교당하면서 내 자존심이 갖은 수모를 당하는 현실을 인정하는 순간 남는 것은 비참한 굴욕감이다. 그건 결국 내가 견뎌내야 할 또 다른 고난 하나가 추가되는 꼴이다. 내 앞에 놓인 현실은, 남 과장처럼 한가하게 그 잘난 녀석이나 질투하며 허송세월할 수 있을 만큼 녹록하지 않다.  

세상 불공평한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라고. 



2

그 동석이가 실종됐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실수로 여자애 하나를 잘못 건드렸는데 아직 민증발급을 안 받은 미성년자였다고 한다. 애들 부모한테 고소장이 날아와서 경찰서로 출두했다는데, 그 다음날 휴대폰을 꺼놓고 종적을 감춘 것이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난리가 났고, 녀석이 해야 할 업무는 자연스럽게 지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유 대리와 내가 떠안아야 할 몫이 되고 말았다. 

동석이가 해야 할 일을 대신 떠맡아 처리하는 동안, 모종의 허탈감이 밀려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 허탈감의 정체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녀석을 향해 타오르던 불 같은 질투가 허무하게 사그러지면서 밀려든 허탈감이었다. 어떤 종류의 질투심은 인생을 지탱하는 원동력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는 깨닫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런 질투심의 원천이 되는 존재 또한 인생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는 것도. 

동석이가 실종된 지 사흘째 되던 날, 결국 회사에서는 동석이를 무급휴가 처리하고 (아마도 길어지면 해고할 게 뻔했지만 일말의 의리 차원에서 그렇게 처리하기로 한 모양이다) 대표이사가 잘 아는 타 업체를 통해 급파된 직원이 동석이의 일을 대신 맡아 처리하기 시작했다. 

동석이가 실종된 지 일주일쯤 된 어느 날, 남 과장이 나를 따로 불러냈다. 

“동석이 어디 있어?”

“네?”

난데없이 날아든 대답에 나는 그만 어리둥절해져서 되물었다. 

“동석이 어디 있냐고.”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예요.”

“내가 다 봤어. 이 자식아.”

“뭘 보셨는데요?”

“동석이 실종되기 전날, 너하고 동석이가 U시티프라자 꼭대기층 올라가는 거 내가 다 봤다고.”

“아, 그거요?”

“거기 꼭대기층 꽤 높지? 거기서 동석이 떠다민 거 아니야?”

“제가 걔를 거기서 떠밀었으면 바로 시체가 바닥에 떨어졌을 거고 경찰이 달려왔겠죠. 안 그런가요?”

“그러니까, 둘이 거기까지 올라간 건 맞는 거네?”

“보셨다면서요? 보셨으면 아셨을 거잖아요?”

“어, 그거는 발뺌 못 하네?”

“뭐 사실이긴 하니까요?”

“거기서 둘이서 뭐 했어?”

“담배 한 대씩 피우고, 얘기 좀 했죠.”

꼭 형사 내지는 수사반장처럼 구는 남 과장의 태도가 몹시 비위에 거슬리는 것을 꾹 참고 나는 대답했다. 

“무슨 얘기? 외제 차 무슨 돈으로 뽑았는가 하는 얘기?”

“그건 아니고요.”

“네가 동석이 데리고 거기까지 간 거야?”

“아뇨. 동석이가 절 데리고 간 거죠.”

“무슨 얘기 했는데?”

“돈 빌려달라고 하던데요?”

“뭐?”

“말 그대로요. 저한테 돈 빌려달라고 했어요.”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여동석이 황태문 너한테 돈을 빌려? 월말만 되면 오피스텔 관리비를 못 내서 여동생한테 허구헌날 돈 꿔달라 전화하는 너한테?” 

“네.”

“얼마나?”

“한 삼천 정도요?”

“지 외제차 팔아서 마련하라 하지 그랬어?”

“자기 차 아니래요. 외삼촌 거래요.”

“어이가 없네.”

남 과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냥 그 얘기만 하고 내려온 거야? 그 뭐냐, 여자애랑 사고 쳐서 경찰서 간 얘기는 안 하고?”

“그 얘기도 했는데, 그거 누가 자길 무고한 거래요. 자긴 그 여자애랑 길에서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대요. 그런데 어떻게 입수했는지 자기 신분증하고 지갑을 가지고 있더래요. 그리고 자기 여자친구랑 가끔 갔던 모텔 이름을 귀신같이 대고. 빼박 걸려들었다고. 자기도 미치겠다고.”

“합의금 때문에 빌리려고 했나 보네.”

“그렇겠죠.”

순간, 의혹으로 그득하던 남 과장의 안색이 슬쩍 변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그는 착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다시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냈다. 

순간, 확신이 샘솟았다. 

동석이를 함정에 빠뜨린 건, 남 과장이다. ‘내가 그 새끼 가만 안 둘 것’이라고 했던 남 과장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 남 과장이 아닌 다른 누가 동석이의 지갑과 신분증을 귀신같이 빼돌릴 수 있단 말인가. 어린 꽃뱀을 매수해 동석이를 사지로 몰아넣은 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남 과장이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백퍼 확실하다. 이런 걸 래셔널 다우트(Rational Doubt)라고 하던가. 합리적 의심. 



3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네가 동석이를 죽인 것 같단 말이야?”

동석이가 실종된 지 한달쯤 지난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리들의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워물며 남과장이 말했다. 

“무슨 근거로요? 그날 동석이랑 그 빌딩에 갔던 거 때문에요?”

그날, 내가 동석이와 U시티 플라자 옥상에 함께 올라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밝혀졌지만, 두어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우리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건물을 나가는 모습이 CCTV에 찍힌 시점에서 경찰은 더 이상 나를 추궁하지 못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뭔가 느낌이 묘하게 그러네.”

“하지만 증거가 없잖아요?”

생각보다 내가 억울해하거나 놀라서 펄쩍 뛰는 기색이 없어서였을까. 남 과장은 나를 빤히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남 과장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너, 동석이 가족이 그 꽃뱀을 무고죄로 고소한 건 알고 있어?”

“그랬어요?”

“그 계집애가, 좀 세게 추궁하니까 겁이 났는지 울면서 사실대로 불더란다. 자기도 모르는 사람한테 신분증 지갑 돈 다 받고 사주받고 한 거라고. 그런데 경찰 말로는, 그게 누군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거야. “

“과장님이시잖아요.”

“뭐?”

“과장님이 그러신 거잖아요.”

남 과장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맞물린 순간은 극히 찰나였지만, 동시에 영겁이나 다름없이 느껴지는 찰나이기도 했다. 시간이라는 게 그렇다. 영겁이나 다름없는 찰나의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찰나와도 같은 영겁의 시간 또한 없으라는 법이 없지 않을까. 

“너, 증거 있어?”

“아뇨. 뭐, 래셔널 다우트(Rational Doubt), 같은 거요?”

“래셔널 다우트?”

“합리적인 의심요?”

“영어 쓰지 마 임마. 어따 대고 유식한 척 영어를 쓰고 있어 이게. 나 영어고자인 거 알면서.”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이 정도는 기본이죠.”

“너, 아무리 그래도 나 의심하는 데는 뭔가 근거가 있을 거 아냐?”

“음, 과장님이 먼저 절 의심하는 근거를 대시면 저도 그 근거의 타당성을 봐서 말씀드리도록 하죠.”

“근거랄 게 뭐 있어. 그냥 네가 동석이 실종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자식을 본 사람이란 거지.”

“마찬가지에요. 동석이가 여자애 건으로 경찰서 가기 한 일주일 전쯤인가 술 댑따 취해서 과장님이 차로 데려다 주신 적 있잖아요.”

그쯤에서 우리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남과장이 입을 열었다. 

“점심시간 끝났다. 올라가자.”

“네.”

“저기, 그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거 말이야.”

“네.”

“아무리 합리적이라고 해도, 정확한 물증이 안 나오면 구속수사 못하는 거 맞지?”

“그냥 감옥에 처넣을 수가 없는 거죠. 물증이 없는 한은. “

“설령 그 의심이 진짜 팩트라 해도 말이지.”

“그렇죠.”  



4

“안 돼. 안 된다니까. 포기해. 그래도 그만한 게 어디야. 진정하고, 일단 날짜 잡고 수술부터 하고 봐.”

“형부도 안 믿는 거죠? 맞다니까요. 이거 분명히 백신 부작용이라구요.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떡해. 아버지 일찍 바람 나가지고 집 나가고 돈도 안 주고. 우리 엄마가 우릴 어떻게 키웠는데, 이제 와서 암이라니 이게 뭐냐고요.”

이종사촌 여동생, 그러니까 내 여동생과 동갑내기인 이모의 딸이 의자를 잡고 꺼이꺼이 우는 동안 여동생과 매제는 이종사촌 여동생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난 봄 건강검진 받았을 때만 해도 멀쩡했잖아요. 지금 백신 맞고 두 달도 채 안 지났어요. 어떻게 두 달 만에 없던 암이 생기냐고요. 이게 백신 부작용이 아니면 뭐예요.”

듣다 못한 매제가 골치아프다는 듯, 냉정한 말투로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처제 심정은 백번 이해가 가. 그리고 사실, 백신 부작용이라는 것도 누가 봐도 뻔하고. 근데 있잖아. 아직 과학적으로, 그렇지 의학적으로 말이야. 백신하고 암 사이의 연관성을 정확하게 밝혀낸 게 없어. 정부에서 이걸 백신 부작용으로 인정 안 해주는 거 그런 이유야. 아닌 말로, 그렇다고 지금 이 시국에 방역 안 할 거야? 부작용이 무서워서 백신 안 맞으면, 코로나 어떻게 잡을 거야? 그냥, 이모님은 다수를 위한 불가피한 소수의 희생자 대열에 끼신 거야. 억울하지만 어쩌겠어. 진정해. 그래도 수술하면 된다잖아.”

“그런 게 어딨어요? 왜, 우리 엄마가 뭘 잘못해서 소수의 희생자 대열에 껴야 되는데요? 이거 백신 부작용 맞다고요. 내가 언제 돈을 달랬어요?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고요. 이거 백신 부작용 맞다고요. 그거 인정해 달라고요.”

“형님, 제발 형님도 그러고만 있지 말고 한 말씀 좀 해주세요.”

이종사촌 여동생을 달래다 못한 매제가 골치아픈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건의 핵심은 그러니까, 지난 5월까지만 해도 멀쩡했던(건강검진 결과로 봐서는 그렇다) 이모가 백신 2차 접종을 맞은 지 한 달 반만에 암 판정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겨드랑이에 종기 같은 것이 생겨 아파서 병원을 갔는데 며칠이 지나도 차도가 없자 의사가 대학병원 조직검사를 권했고 검사 결과 뜻밖에도 암이 발견된 것이다. 

사실 외갓집은 너나 할 것없이 암을 앓았던 이력이 있으므로, 백신을 맞기 전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만 아니었던들 굳이 백신을 탓할 이유는 없었을 상황이었다. 문제는 검강검진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암이 갑자기 생긴 상황에서 중간에 백신이 껴들었으니 당연히 백신 부작용을 의심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억울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이종사촌 여동생을 달래느라 동생 내외가 진땀을 흘리는 동안 미안하게도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합리적인 의심.

-아무리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해도, 정확한 물증이 안 나오면. 

정확한 물증이 나오지 않는 한, 의심은 의심으로 끝난다. 그 어떤 효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남 과장은 그다지 머리가 좋은 사내가 아니다. 이 명제의 행간에 숨은 또 다른 진실을 간파해낼 능력이 없다. 

만약, 정확한 물증이 나온다고 해도. 

정확한 물증이 물증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그 순간 그 물증은 그대로 합리적인 의심의 연장선에 머무르고 만다.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하거나 마무리짓지 못하고, 물증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한다. 

“형님도 한 말씀 하시라니까요?”

채근하는 매제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이종사촌 여동생은 여전히 흐느껴 울고 있었고, 여동생은 그녀의 어깨를 여전히 팔로 감싸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들먹이는 이종사촌 여동생의 어깨에 시선을 두고 입을 열었다. 

“예은아.”

“응?”

“오빠 말 잘 들어. 나도 알아. 이모 억울한 거. 그거, 백신 부작용일 수 있어. 그런데 있잖아. 네 형부 말대로, 백신하고 암 사이의 정확한 알고리즘을 의학적으로 규명하기 전에는, 너나 우리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울어 봤자 방법이 없어. 이건 그냥 합리적인 의심에 불과해. 무슨 뜻이냐 하면, 아무도 우리 말을 안 들어줄 거라는 거야.”

“…….”

“이모가 너 백신 맞는 거 보고 따라 맞았다며? 네가 이모한테 백신 맞으라고 했다며? 그래서 너 죄책감 때문에 이러는 거지? 그거, 죄책감 갖지 마. 너, 사람들이 부작용 때문에 백신 안 맞으려고 하는 사람들 어떻게 취급하는지 봤잖아? 이모가 백신 안 맞았으면, 암이 안 생겼을 거 같아? 아마 주위에서 방역에 협조 안 하는 범죄자 취급했을 게 뻔한데, 고달파서라도 없던 암이 저절로 생겼을걸? 백신 맞고 죽느니 코로나 걸려 죽겠다는데, 이래저래 마찬가지일 바에는 내 방식대로 죽겠다는데. 어쨌거나, 그 교수님이 수술만 하면 된다 했다며. 간단히 끝나는 거라 했다며. 어제 엄마가 이모랑 통화하는 거 옆에서 들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어. 수술비는 어떻게든 해결해 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5

“이제 좀 살 것 같다.”

마스크를 벗어던진 남 과장이 후련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혹여 이 뒤로 돌아드는 사람 있을까 눈치보면서 마스크 내렸다 올렸다 하며 도둑담배 피우는 거 진절머리 나서 죽는 줄 알았네. 이제 6인 이상 회식도 할 수 있다며?”

“백신 접종율 70프로 넘었으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일부러 주고받는 건, 피차 동석이 얘기는 꺼내지 말자는 암묵적인 불문율이 회사 전체로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남 과장과 내가 단둘이 대화한다고 해서 이 불문율을 깨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며칠 전, 경찰이 동석이의 시신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동석이를 죽인 놈들 또한 검거했다. 동석이가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를 타려는 순간 잽싸게 동석이의 차에 올라타는 놈들이 찍힌 CCTV를 경찰이 잡아낸 게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놈들은 잡혔고, 동석이는 죽었으며, 나는 남 과장이 아닌 다른 그 누구도 내게 뒤집어씌운 적이 없는 살인 혐의를 벗게 되었다. 

말하자면, 남과장의 합리적인 의심은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의심으로만 남고 말았다는 뜻이다. 



6

남과장에게는, 나를 U 시티프라자 옥상으로 데려간 동석이와 내가 나눈 대화를 적당히 내 마음대로 지어내어 둘러댔다. 그러니까, 동석이와 내가 그 건물 옥상에서 나눈 대화는 남과장에게 둘러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화였다는 뜻이다. 

별 생각 없이, 다만 그간 녀석의 행적이 궁금한 마음에 순순히 녀석이 나오라는 장소로 간 나는 녀석이 걸친 쟈켓을 보고 피식 웃었다. 고급스러운 타탄 체크무늬의 아르마니 쟈켓은 우리 같은 월급쟁이들이 쉽게 사입을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어찌됐든 탐나긴 해도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쟈켓이라 생각하며   나는 녀석이 이끄는 대로 군말없이 옥상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날씨 좋네.”

“어떻게 됐어? 내일 출근은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겠다.”

여자아이 건드린 건으로 경찰서를 다녀온 게 이미 회사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터라 그걸 물어본 건데, 녀석은 지극히도 태평하게 대답했다. 

“남 과장 짓 같아.”

“응?”

“나, 여자애 건드린 적 없어. 경찰에서 여자애가 내 지갑하고 신분증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나 자주 가는 모텔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빼박 걸린 건데, 생각해보니까 남 과장 차 탔을 때 지갑을 거기 흘리고 왔던 거 같아.”

“그러면 그렇게 얘기하면 되잖아.”

“얘기하면? 남과장이 뭐 ‘예 내가 그랬소’ 하고 순순히 인정할 위인이야? 그거보다, 내가 지금 너 부른 거. 다른 일이야. 그러니까 내 부탁 좀 들어 줘.”

“부탁?”

“돈 줄게.”

동석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다급했다. 

“3천 줄게. 어때? 들어줄 수 있어?”

“무슨 부탁인지 말해 주면, 상황 봐서.”

“오늘 하루만, 나 대신 내 대역 좀 해 줘. 그러니까 네가 여동석이 되고 내가 황태문이 되는 거야. 오늘 하루만, 딱 오늘 하루만.”

“왜 그래야 하는데?”

“나, 조폭한테 쫓기고 있어.”

“뭐?”

“네가 나인 척하고, 내 행세하면서, 조폭들 눈만 따돌려 줘.”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마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처럼 녀석은 주위를 휘 돌아보고는 별안간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끄고는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뭐, 어려운 부탁은 아닌데.”

나는 슬쩍 딴청을 피우는 시늉을 했다. 

“널 쫓는 사람들이 우릴 헷갈리겠어? 이미 네 얼굴 알잖아?”

“얼굴은 알지만, 우리 체형도 비슷하고 얼굴형도 비슷하잖아. 물론 내가 더 잘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반박불가한 사실이었다. 적어도, 녀석의 페이스가 더 여자애들에게 잘 먹히는 페이스인 건 맞다. 

“어차피 입고 나온 바지 색도 똑같겠다, 지금 머리도 비슷하게 자른 상태잖아. 그냥 내 쟈켓만 네가 대신 걸치면, 멀리서 봤을 땐 다들 네가 나인 줄 알 거야. 어차피 마스크 때문에 정확하게 구분하지도 못할 테니까. 부탁해. 하루만 내 행세해주면 3천 준다니까?”         

“한 마디로 네 행세하면서 너 대신 죽을 고비 좀 넘겨 달라는 거네?”

“일단 끌고 갔다고 해도, 너라는 걸 알면 죽이지는 못할 거야.”

“자기네들 정체 알았다 싶으면 살려두지 않을 텐데?”

“못해. 무엇보다 너한테까지 그럴 이유 없어. 그리고 너한테 정체 들킬 놈들도 아니야.”

“대체 왜 그러는데? 너 무슨 사고 쳤어?”

“우리 엄마 가게, 내 맘대로 팔았어. 그 포르쉐, 그 돈으로 산 거야. 그 새끼들한테 협박당하고 있어서 마음대로 팔면 안 되는데, 까딱하다간 우리 엄마가 그 새끼들한테 끌려갈 판이라 내가 그냥 엄마 몰래 등기필증 가지고 나와서 팔아 버렸어.”

말을 듣고 보니 아닌게아니라 대형 사고 축에 속하는 사고를 치긴 했다. 

“3천, 계좌이체로 바로 입금해 줄 수 있어?”

“이체한도에 걸려서 3천 한꺼번에 넣는 건 힘들고, 일단 천만 계약금으로 줄게. 그래도 손해보는 건 아니잖아. 너 그거 알지? 보이스피싱 때문에 은행들 연속출금 막아놓은 거. 30분 있다가 천 더 줄게. 그리고 30분 있다가 나머지.”

그런 조건이라면, 나쁠 거 없었다. 

“이 쟈켓 바꿔입고 일단 건물 나가면, 콜택시 좀 잡아줘. 그리고 이거, 내 차 키.”

번쩍이는 은색의 묵직한 키가 손에 잡히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이 차가, 오늘 하루만큼은 내 차가 된단 말이지.

“오늘 하루는, 네 차야.”

내 마음 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동석이 말했다. 

“길 건너편 H약품 지하주차장. 4층 C-A1 기둥 바로 옆. 근처까지 가서 시동 켜면 소리 날 거야. 대충 7시까지 Y천 국도변 옆 낚시터에 세워 두면 내가 그리로 갈게. 폰은 아마 꺼 둘 것 같으니까 연락은 못 받겠지만, 그래도 돈은 틀림없이 이체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쟈켓을 바꿔입고, 차 키를 챙긴 후 다시 마스크를 쓰고 동석이와 함께 U시티 프라자를 나온 나는 지체없이 콜택시를 부른 후 동석에게 내가 부른 택시의 넘버를 알려주었다. 동석은 고맙다는 뜻으로 간단히 손을 들어 보였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녀석의 눈빛이  스산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동석이의 눈을 제대로 본 기억은 아마도, 그 이전에는 없었던 것 같다. 



8

주차장에 도착해 시동 키를 누르자 빽빽거리는 소리가 아름답게도 울러퍼졌다. 기분 좋은 메탈 키의 묵직한 촉감만큼이나 감동적인 소리라고 생각하며 나는 신이 나서 차를 타기 위해 문을 열었다. 

운전석이 올라앉아 막 문을 닫으려는 순간, 날렵하게 마스크를 쓴 괴한이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고 뒤이어 뒷좌석의 문이 열리며 또다른 한 놈이 올라앉았다. 이런 썩을, 순식간에 욕이 터져나왔다. 동석이 이 새끼, 차 앞에 놈들이 잠복하고 있다는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

다음 순간, 합리적인 의심이 다시 또아리를 틀고 혀를 내밀었다. 녀석은, 과연 차 주위로 괴한이 잠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건가? 그게 아니면, 알면서도 얘기를 안 한 건가? 설령 내가 놈들의 손에 죽는다 한들, 3천 정도면, 아니 천 정도면 목숨값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건가? 이런 발칙한 새끼, 사람 목숨을, 아니 이 천하의 황태문을 겨우 천만원어치 일회용 목숨으로 취급했어?

두고 보자. 두 번째 천만원을 과연 입금하는지 안 하는지. 그러는 동안 어느 새 조수석에 있던 괴한은 핸들을 쥔 내 손을 꼭 그러쥐고 있었다. 목 뒤에서 칼날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뒷좌석에 올라앉은 놈이 들이민 칼이었다. 

“운전해.”

“잠깐만, 마스크 벗겨 봐.”

“왜?”

“마스크 벗겨 보라고.”

조수석에 있던 놈은 잠시 망설이더니, 시키는 대로 마스크를 벗겼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 그래도 내 손으로 마스크를 벗고 싶었으나 함부로 손을 놀렸다가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못 벗고 있던 참이었다. 

“뭐야? 여동석이 아니잖아?”

“하, 이런 씨바, 쥐새끼같이 빠져나갔네?”

나는 눈으로 네비게이션 위에 붙은 디지털 시계를 확인했다. 녀석이 U시티 프라자 옥상에서 천만원을 이체해 준 시점에서 거의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녀석이 계좌이체를 해 오면, 굳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지 않아도 알람만으로 알 수 있다. 잠시 숨을 죽이고 녀석의 계좌이체 메시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주머니를 요란하게 울린 사운드는 계좌이체 알람이 아닌 전화벨이었다. 

“받아.”

나는 시키는 대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택시인데요. 지금 제가 신호를 좀 많이 받아서 가는 길이 늦어서요. 죄송합니다. 곧 도착하니까 기다리세요. 번호 아시죠? 9818이요.” 

네, 하고 태평하게 대답한 후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니까 지금 전화를 건 택시 기사의 말대로라면, 황태문이 된 여동석은 아직 내가 부른 콜택시를 타지 못하고 있다. 

“누구야?”

“택시요.”

“택시? 택시 왜 불렀어?”

“여동석이 타고 가라고요.”

“이런 시베리아 허허벌판에 내던질 놈을 봤나. 대가리 뒤통수가 영락없이 똑같다 했더니만, 이 새끼가 사람 바꿔치기 했네?”

“저기요. 어차피 사람 잘못 보셨으니까 말인데요. 그냥 여기서 조용히 내리시면 안될까요? 그러면 경찰에 신고는 안 할…….”

아차, 여기서 경찰을 입에 올리면 안 되는데. 칼날이 목 뒤를 거세게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일단 운전해서 빠져나가.”

나는 시키는 대로 운전을 시작했다. 아, 이 승차감, 타이어가 매끄럽게 바닥을 구르며 빠져나가는 감촉. 이 개새끼들만 아니면 이 기분을 마음껏 만끽하겠는데, 아쉽고도 아쉽다. 젠장.

그건 그렇고, 벌써 35분이 지났는데 여전히 계좌이체는 되지 않고 있다. 이 새끼, 콜택시를 타든 안 타든 이제쯤은 계좌이체를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택시 넘버 뭐야?”

“9818요. 근데, 동석이가 그걸 탈지는 모르겠는데요?”

뒷좌석에 앉은 놈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택시 9818타는 놈 추적해.”

미안하다, 동석아. 네가 약속만 지켰어도 택시 번호는 안 불렀을 건데. 나는 괴한들이 시키는 대로 신도시를 빠져나와 도로변을 달렸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녀석들이 나를 그리 쉽게 죽일 수는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녀석들의 타겟은 여동석이지 내가 아니었고, 단지 자신들의 정체가 들킬 염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뭐야, 샜어? 갑자기 택시를 내려? 이런 썅!!!”

걸려온 전화를 받던 뒷좌석 놈이 분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빠져나갔구나. 순간, 녀석이 남은 돈을 내게 이체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자 그 긴박한 순간에도 욕이 나올 뻔했다. 녀석은 아마, 이 작자들이 택시 넘버를 알아냈다는 걸 눈치채고 내가 자신을 밀고했다는 걸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제대로 밀고하지 않으면 내 목숨도 날아갈 판이었는데, 약속한 돈만 입금했어도, 아니 그 전에 이 새끼들이 차 앞에 진치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만 했어도 내가 최소한의 의리 정도는 지켜주려고 했는데!!

처음에는 이대로 경찰서를 향해 차를 몰까도 생각했으나, 여러 모로 생각한 끝에 마음을 고쳐먹은 나는 CCTV가 없는, 한적한 국도변에 이르러 녀석들을 내려 주었다. 

“이 새끼 이거 보통 놈이 아니네. 다른 새끼 같으면 오금을 떨면서 살려달라고 발발 떨 텐데.”

“지금 여동석이랑 짜고 그놈 사칭해서 그 놈 차를 몰고 있는 거 보면 모르겠냐? 일단 여기서 내려. 일 크게 만들지 말자. 그리고 너 이 발칙한 새끼,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오늘 재수 좋은 줄 알아. ”



9

동석이 녀석이 부탁한 곳에 차를 세워놓고, 차 키와 쟈켓을 운전석에 던져놓고 문을 닫았다. 

녀석은 그로부터 거의 네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그 동안 나는 내가 결심한 바를 실행에 옮길 도구를 녀석의 차 트렁크에서 찾아냈다. 타프를 고정할 때 쓰는 로프와 바닥면이 코팅된 면장갑이 다른 캠핑용품들과 뒤섞인 채로 굴러나왔다. 녀석의 취미는 캠핑이었고, 울적할 때면 종종 캠핑으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돌아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탄 녀석은 등받이에 등을 털썩 내리치듯 기대며 요란하고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운전석 뒷좌석에 태평하게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 녀석이 깜짝 놀란 건 그 다음이다. 

“아, 다행이다. 너, 괜찮아? “

“보시다시피.”

“안 가고 있었어? 그 새끼들은?”

“그 새끼들?”

“아……없었던 거야? 그냥 그 지하주차장에서 여기까지 그대로 운전해서 온 거야?”

그렇다, 녀석은 그 조폭 새끼들이 차 주위에 잠복해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말을 안 한 거다. 하다못해 ‘그럴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여동석이 대신 나 황태문이가 대신 죽어 달라는 거였다. 녀석의 속셈이 그거였다면, 이제 와서 내가 한 결심을 되돌릴 길은 없는 셈이었다. 

“약속이 틀리다?”

“아, 미안해. 지금 입금해 줄……”

“아냐, 됐어. 그만둬.”

“입금할게.”

“됐다니까?”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작업을 떠올리면서 녀석의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녀석은 휴대폰을 집어넣으려다 말고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천만원, 도로 나한테 입금한 거야?” 

“응.”

“내 계좌는 어떻게 알고?”

“한 회사 다니면서 그걸 모를까 봐?”

“그냥 받아도 되는데, 대체 왜?”

“네가 탄 택시 넘버, 그 조폭 새끼들한테 꼬발랐거든. 그게 미안해서.”

“아, 괜찮아. 나 그 택시 안 탔어. “

“안 탔어?

“타려다가, 촉이 좀 안 좋아서 그냥 내려서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고 길 건너서 버스 탔어.”

“차라리 타지 그랬어.”

“무슨 소리야?”

“너, 내가 만약 그 새끼들 손에 죽고, 그 새끼들이 차 가져가면 그땐 어떡하려고 했냐?”

“그럴 일은 없었어. 그 자식들은 네가 여동석이 아닌 거 알고는 너 못 죽여.“

“너로 오인해서 죽였을 수도 있는데?”

“뭐, 일단은 무사히 여기 와 있잖아.”

“못 왔으면?”

“오면서 생각은 했지. 네가 여기 차를 안 갖다놨으면, 도난신고 해야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내 실종신고는 안 하고?”

“아마 같이 했겠지. 에이, 이제 그만 해. 다 끝난 일이잖아. 부탁 들어줘서 고맙다. 진짜 돈 입금 안 해도 돼?”

“응. 필요없어.”

“집까지 태워다 줄까?”

“아니, 오히려 내가 널 태워 줘야 할 것 같은데?”

“네가 날? 우리 집까지?”

“아니, 너네 집 말고, 다른 곳.”

“다른 곳이라니, 어딜 말하는 거야?”

“네가 가야 하는 곳.”



10 

목이 졸려 숨진 여동석이 탄 차는, 누가 봐도 딱 살인을 저지르기 좋은 인적 드문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추후 검거된, 지하주차장에서 여동석이 자신의 차에 오를 때 그를 따라 차에 탔던 괴한들은, 자신들이 여동석의 차에 따라 올라탄 것은 사실이지만 여동석의 차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여동석이 아니었다고 우겨댔다고 한다. 

물론, 경찰은 그게 여동석이 아니라 나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 전까지 옥상에 같이 있었던 게 나라는 걸 알아내서가 아니다. 

여기서 다시 합리적인 의심, 이라는 게 튀어나온다. 

그 개자식들의 주장, 그 차에 올라탄 사람이 여동석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주장에 대한 증거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CCTV에 찍힌 영상에서 보이는 남자는 누가 봐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타탄체크 쟈켓을 걸친 여동석이었다. 차에 잠복하고 있던 녀석들의 꼬리는 그 CCTV가 아닌, 어이없게도 주차장에 있던 근처의 다른 차에 찍힌 블랙박스 영상을 통해 밟히고 말았다. 동석이 녀석의 포르쉐로 말하자면, 블랙박스의 전원이 꺼져 있었다. 요즘 외제차들은 사고가 났을 경우 만만찮은 수리비 때문에 다른 차들이 알아서 피해 다니고, 게다가 블랙박스를 평소 켜놓고 다니면 배터리가 방전될 우려가 있어 블랙박스를 꺼놓고 다니는 차들이 많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매제로부터 들은 바 있다.   



11

“동석이 차에 탔던 거, 동석이가 아니고 너였지?”

그렇다 한들, 설령 아닌 말로 남 과장이 그걸 직접 목격했다 한들, 그게 내가 동석이를 죽였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백신을 맞고 난 후 한 달 만에 암이 발병했다고 해서, 백신이 암을 만들어냈다고 우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보셨어요?”

“보긴 뭘 봐. 그냥,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본 거지.”

“아, 타긴 탔었거든요.”

“탔었다고?”

“동석이가 처음 포르쉐 끌고 출근했던 날 말이에요. 필요없다는 데도 기어이 차로 바래다주겠다고 해서 타 봤거든요. 승차감 죽이던데요. 집까지 가는 동안 어찌나 자랑을 해대던지. 이런 차는 도로에 끌고 나가기만 하면 다른 차들이 알아서 길을 쫙 내 준다고. 덕분에 블랙박스도 굳이 전원을 켜 놓고 다닐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요.”

“아까운 녀석이었는데, 허무하게 갔네. 사람 재미없게.”

“그러게요. 과장님, 마스크 빨리요. 저기 경찰차, 경찰차.”

“응?”

남 과장은 담배를 피우느라 턱까지 내렸던 마스크를 다시 급히 코 위로 올렸다.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휴대폰과 지갑을 챙기는 동안 남 과장이 중얼거렸다. 

“역시, 합리적인 의심이라고만 넘기기에는, 너무 촉이 쌔해.”

“뭐가요?”

“동석이, 네가 죽인 거야. 내 촉은 말이야. 지금껏 틀린 적이 없어. 물론,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의심일 뿐이니까, 이제 와서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겠지만.”

“저도 마찬가지에요. 계집애 매수해서 동석이 함정에 빠뜨린 거, 남 과장님 작품이잖아요. 뭐,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그걸 경찰에 신고해봤자 소용도 없지만.”

“피차,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의심일 뿐이니까.”

“그렇죠.”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는 저 달빛을 달빛이라 부르지 않으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