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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Sep 23. 2022

다시는 저 달빛을 달빛이라 부르지 않으리

나혜석 화백을 추모하며

다시는 저 달빛을 달빛이라 부르지 않으리


수원시 화성행궁길에 자리잡은 전통찻집 <시인과 농부>의 메뉴판 뒷페이지에서 본 나혜석 시인의 시 한 구절. 나혜석은 뛰어난 화가이자 시인이었다.


그 늦은 겨울밤, 교통사고를 당한 내 친구 Z는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고 난 후 새벽녘에 눈을 떴다. 보기 싫은 여드름투성이의 간호사를 둘이나 동반한 의사가 불려왔다가 나가기를 서너 차례 반복한 후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등받이도 없는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졸음 때문에 자꾸만 꼬꾸라지는 상체를 애써 가누며 ‘여기 있을 사람은 내가 아닌데’라는 생각을 연거푸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날 밤은 정말이지 모든 일련의 단순한 동작들이 비디오 테이프처럼 지겹게도 되풀이되고 있었다. 되풀이되는 발걸음, 되풀이되는 고갯짓과 손짓과 발짓, 되풀이되는 높고 낮은 숨소리, 되풀이되는 탄식.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이유는 Z가 나와 아주 많이 친했기 때문이 아니라, Z의 몇 안 되는 친구 중 내가 유일하게 ‘마침 바쁘지 않았던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Z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바쁜 친구들이었고, 개중에는 정말로 영안실에 있는 친구도 있었다. 중환자실은 영안실에 비하면 훨씬 덜 심각한 장소임에는 틀림없고 보면 그 친구의 입장에서는 내가 자신보다 훨씬 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새벽녘에 눈을 뜬 Z는, 남자에게 쓰기에는 어색한 비유이지만 흡사 아기를 낳고 난 산모처럼 보였다. 고통스럽다거나 두렵다는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Z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설령 아무리 하찮은 이야기라고 해도 고개 숙이고 귀기울여 듣지 않으면 큰일날 것 같았다. 그러나 늘 하던 대로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고 여자처럼 입을 벌려 조근조근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어내는 Z가 한 이야기가 과연 하찮은 이야기였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밖이 춥지? 많이 춥겠지. 여기는 따뜻하지만 난 알겠어. 밖이 지금 아주 많이 춥다는 걸. 그리고 언젠가 아주 오래 전에, 지금처럼 살을 에는 바람이 소리없이 자고 있던 밤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어. 뭐? 바람이 안 불고 있다고? 아니야. 바람은 불고 있어. 단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불고 있을 뿐이지. 그날 밤, 내가 말하는 그 먼 옛날의 어느 날 밤에 바람은 너무나 기운이 빠져 버린 탓에 잠깐 터벅터벅 걷던 걸음을 멈추고 서서 졸고 있었던 거야. 그러던 바람이 마침내 그녀를 발견한 거지.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삐쭉삐쭉 제멋대로 자라난 그녀의 머리는 덥수룩했어. 살을 잡아뜯는 한겨울의 잔인한 대기를 견뎌야 할 그녀의 옷차림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 그녀는 다 해진 얇은 비닐 잠바에 청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흐르는 땟국물과 온몸에서 풍겨나오는 시궁창 냄새, 젊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괴기스러운 옷차림을 감추어 준 건 어둠이었어. 밤이 그 여자를 숨긴 거야. 하지만 그 여자는 모든 사람들이 벽의 보호를 받으며 벽 속에서 잠들어 있어야 했을 그 시각에 벽으로부터 완벽하게 노출되어 있었어. 그래, 그 여자는 거리의 꺾어진 아스팔트 길, 차도 옆 인도에 퍼질러져 주저앉아 있었으니까.

그 곳은 그림을 그리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장소였어. 그런데도 그녀는 합성섬유로 만든 잠바에 감싸인 그 작은 등을 잠시 쉬고 있던 바람의 찬 손에 노출시킨 채 두 다리를 한껏 벌리고 주저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그녀의 벌어진 다리 사이로 드러난 맨바닥에. 그녀의 왼쪽 곁에는 서너 자루의 붓이 놓여 있었고 오른쪽 옆으로는 역시 서너 개 정도의 깡통이 놓여 있었어. 깡통 곁으로 족히 열 개는 되어 보이는 물감들이 불에 탄 벌레 모양으로 뒤틀리고 쭈그러진 채 뒹굴고 있었지. 그녀는 고등어 통조림 깡통임에 분명한 깡통들에 이따금 붓을 넣었다가 꺼내서는 땅바닥을 칠하곤 했어. 깡통 언저리에는 형형색색의 물감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겠지만, 밤으로 칠해진 그 고요한 거리에 형형색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달이 드러나기 전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을 터였어. 다행히도 달은 구름에 거의 가려 있었고, 한 순간이었지만 밤하늘이 붉게 물들었다가 다시 본래의 짙은 감색을 찾았어. 너도 알겠지. 밤하늘은 비를 뿌린 후가 아니면 절대 붉어지지 않는다는 걸. 그러나 그때까지 줄곧 추위에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곱은 손으로 애써 붓을 다잡던 그녀의 얼굴이 젖어 있었다는 걸 달은 알았는지도 몰라. 그래서 구름에게 명령했는지도 모르지. 좀 비키시오, 난 할 일이 있단 말이오. 난 나를 쳐다보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내려다보지. 뿐만 아니라 나를 쳐다보지 않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내려다보고 있소. 그게 내가 할 일이지. 하지만, 하고 달은 자신을 계속해서 감싸는 구름을 몸으로 밀쳐냈어. 오늘 밤, 단 한순간만이라도 내 혼신의 힘을 다해, 내가 가진 빛을 오로지 저 여자 한 사람만을 위해 비추어주고 싶소. 잠시 나무 밑에 앉아 그 여자를 쳐다보던 바람은 그녀가 가엾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숨 한 번 크게 내 쉬지 못했어.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가는, 그녀는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야.

그녀는 이미 너무 쇠약해져 있었어. 곧 죽을 운명이었지. 굶주림과 추위로. 그녀가 땅바닥에 그림을 그린 건, 그녀가 환쟁이의 혼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 신명에 못 이겨서 그린 그런 걸작이 아니었어. 그건 그녀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던 거야. 그렇게 석유찌꺼기를 섞어 만든 잿빛의 딱딱한 길바닥을 알아볼 수 없는 색깔들로 칠하는 동안 사람이 만든 차바퀴 하나도 그 밤에 그 거리를 지나가지 않았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야. 평소에는 밤에도 그토록 요란한 거리였는데 말이야. 바람마저 숨을 죽인 거리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고요했지. 색깔들이 일어섰어. 보라색, 노란색, 초록색, 갈색, 그리고 검은색, 또 빛바랜 피의 색도 조용히 누워 있던 자리에서 먼지를 털고 일어났지. 먼지들은 하늘로 날아올랐고 나뭇잎들은 몸을 흠칫흠칫 떨었어. 허공에 걸죽한 안개가 꽃처럼 피어났고 거리를 구르던 쓰레기들이 고개를 돌렸어. 개의 배설물과 먹고 난 아이스크림 포장이라든지 가로늦게 남아 있던 낙엽이라든지 사람들의 몸에서 떨어진 머리카락이라든지 뭐 그런 것들이 그녀를 멀찍이서 바라보았지.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녀에게서 더욱 멀리 떨어진 곳으로 물러가서 그들끼리 둥글게 서서 춤을 추었을 뿐이지.

갑자기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잠깐 멈추었어. 고등어 통조림 깡통 속의 물이 너무 혼탁해진  알았는지 그녀는 잠시 붓을 통조림 깡통 속에 담그기를 망설인 거야. 그러다가 젖은 얼굴 위로 다시 흘러내리는 자신의 눈물이 생각났는지,  손으로 붓을 고쳐 잡고 붓끝을 자신의 젖은 얼굴 위로 이지러진 눈물 방울에 갔다댔어. 따뜻했던 눈물 방울은 금세 진득하게 젖은 거친  속으로 스며들어 갔고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계속했어.  전에 아주 잠깐, 미소를 지을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웃지 않는 쪽을 택했는지 그냥 땅바닥에 붓질만 부지런히 했을 뿐이야. 마침내 쓰레기들의 원무는 사라지고, 바람은 참고 있던 숨을 토해 그들을 살해한  시신을 던지고, 대기는 더욱 새파랗게 얼고 먼지들은 오들오들 떨며 바닥에 쓰러졌어. 구름 사이로 달은 모습을 드러냈고 그녀는 울었어. 그러면서 속으로 말했을 거야. 드디어  그림이 끝나가고 있어. 이건 의미는 없지만  목숨을  분이라도  지탱하게  주었어. 원통한 일이야.  하나 깜짝  하고 상피붙이¹핏덩이를  배로  세상에 낳은  당당한 내가, 지금  순간 이런 곳에서 이렇게 비굴하게 죽어가고 있다니.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해 불과해.  순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상상할  밖에 없어. 달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고등어 통조림 깡통이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힘없이 쓰러진 순간, 달이  여자에게    있는 일은 없었을 거야. 왜냐하면 바람조차 소리죽여 울어버린  춥고 앙상한 밤에, 달은 너무 늦게 얼굴을 내밀었으니까. 완강하게 어둠을 붙잡고 있던 밤도 지쳤는지 이리저리 몸을 구부리며 기울어지던  거리에서, 숨겨진 그림자들의  사이로 피어오른 안개는 흩어져서 구름을 향해 달려들었고 구름은 조용히 물러섰어. 슬프다기보다는 덧없는  순간을 위해 달은 미친 사람처럼 자신이 태양으로부터 받은 빛을 태웠고 그림자까지  태웠지. 달은 눈물을 머금었고 달을 닮은 여자는 젖은 눈을 들어 달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어. 다시는  달빛을 달빛이라 부르지 않으리.


나는 그렇게 생각해. 다시는  달빛을 달빛이라 부르지 않으리.......그게  여자의 마음에  마지막으로 새겨진 문장이었을 거라고 말이야.”


나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달리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는가. Z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내가 가지고 있던 자신의 가방,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깨진 차창의 파편이 아직도 박힌 가방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Z의 가방을 열려고 지퍼를 잡아당겼을 때 유리에 스쳤는지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

Z의 가방 안에서 작은 석판이 나왔다. 석판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내 손바닥만한 석판의 매끄러운 표면을 가득히 채운 것은 얼굴, 사람의 얼굴이었다. 웃음과 어둠으로 검게 물든 눈과 과장되게 끝이 올라간 입술, 퇴색한 핏빛의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이게 그 그림?”

Z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 않았다.  인간이 죽는 순간에 그린 그림치고는 너무도 우스꽝스러웠고, 너무나도 ‘심오하지 않았다’. Z 손짓으로 뒷면을 보라고 가리켰고 나는 뒷면을 보았다. 손으로  서투른 필체의 글씨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나는  글을 읽었다.  


1 24 아침. 범일동 산복도로 어귀에서 그녀는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그녀가 죽어 있던 자리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다. 그녀는 위대한 화가였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많은 천재들의 불행을 답습했다.


“아마, 범일동에 가도 이 그림은 못 찾을 거야. 이미 지워진 지 오래니까. 이건, 그날 아침 얼어죽은 그녀를 발견했던 사람들이 찍은 사진을 토대로 미상 윤응구 화백이 복원한 거야. 진짜와 똑같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진짜는 아니지.”

내게서 석판화를 받아든 Z는 손으로 석판화를 어루만졌다.

“앰뷸런스가 도착할 때까지 내가 뒹굴고 있던 자리가, 그녀가 죽어간 바로 그 자리였다는 걸 알았어. 거짓말처럼 그녀가 서 있었지. 어쩌면.......할머니를 몰라본 손자를 책망했는지도 모르지.”

“할머니?”

Z는 석판화를 모포 위에 내려놓았다.

“우리 할머니였어. 지금 네가 들려준 얘기는, 우리 아버지가 들려주신 얘기야. 이제 알겠어? 우리 아버지는, 할머니와 할머니의 친오빠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였지.”




*상피붙이: 근친상간을 뜻하는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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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작품 속 인물들과는 무관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이자 길에서 객사한 나혜석 화백에게 이 작품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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