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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Feb 13. 2022

임인년 특집단편) 우호당적(愚虎當敵)

어리석은 호랑이가 적을 마주하여


우호당적愚虎當敵

-어리석은 호랑이가 적을 마주하여



1593년 겨울, 지금의 문경새재 초입에 자리잡은 깊고 어두운 산자락 아래로 폐허가 된 절터가 자리잡고 있다. 본당과 석탑 등 건물의 외관은 그런대로 온전히 보전되어 있으나 오래 전 큰 화마를 겪어 하마터면 잿더미가 될 뻔한 와중에 그나마 온전히 보전된 것이 다행이라 할 터였으나, 오늘에 이르러 다시 한 차례의 화마를 맞이하니 이번에는 본당 또한 화마를 피하지 못한 터라. 하여 잿더미로 화한 본당이 절반이나 무너진 가운데 남은 불이 침통하게 밤새 타올랐고 남은 것은 석탑을 제외하고는 자그마한 처소 두어 개가 고작이다.

밤새 핏빛으로 물든 하늘이 삼경(자정부터 새벽 세시)을 한창 지나는 중이라 여겨질 때,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가토 기요마사의 부관 중 하나가 칼을 차고 여기저기 남은 불길이 타오르는 절터로 들어선다. 이 젊은 장수는 일찍부터 조선과의 전쟁을 앞두고 어려서부터 조선의 동향을 염탐하는 첩자로 키워진 덕에 일찍부터 조선말에 능통했는데, 이 야심한 시각에 인적 드문 깊은 산중 초입의 외진 절터를 찾은 연유는 알 길이 없음이라. 

장수의 품에 안긴 어린것은 누더기도 더할 나위없이 곧 찢어지기 일보 직전으로 해진 옷이라 하지도 못할 넝마에 둘둘 말린 채로 찢어지는 소리로 울어대었으나 점차 그 울음소리가 힘을 잃고 가늘어져 간다. 이 때 반이나 허물어지다시피 한 채로 남아 있던 처소 뒤에서 한 노승(老僧)이 조심스럽게 걸어 나온다. 아마도 어린것의 울음소리를 듣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 분명하다. 

노승을 발견하고도 장수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허리에 찬 칼에 손을 가져가지도 않은 채 다만 어린것을 안은 채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볼 뿐이다. 한때는 제법 큰 사찰이었음이 분명하나 이제는 모든 것이 타버리고 무너져 절이라는 본연의 구실조차 하지 못하게 된 광경을 젊은 장수는 자신의 눈으로 낱낱이 확인한다. 그러고 나서야 장수는 마침내 걸음을 움직여, 이제는 가늘어져 힘이 없는 목소리로 응앵응앵 울어대는 어린 것을 안은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노승을 향해 다가온다. 

노승은 이미 상대의 풍모를 보고 적군의 장수임을 알아본 바 그 어떤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터이다. 허나 장수는 품에 안겨 있던 어린 것을 내밀며, 다 늙어 가는귀가 먹은 중이라 할지라도 틀림없이 알아들을 조선말로 입을 연다. 

“이 아이를 살릴 방법이 없겠는가?”

노승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장수의 품에서 이제는 울음을 그친 아이를 들여다보고, 다시 장수를 쳐다보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한다. 흐리멍덩하던 중의 눈빛에 어느 순간 젊은 장수의 그 눈빛에 못지 않은 안광(眼光)이 빛을 발하니, 그제서야 중은 굽었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장수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는다. 

“그 아이를 어찌하여 이 곳까지 데리고 오셨소?”

장수는 대답하지 않는다. 노승 또한 구태여 대답을 채근하지 않는다. 장수는 품에 안았던 어린것을 스님에게로 내밀며 어서 맡아달라는 부탁을 말 대신 표정으로 전한다.  

“그 아이는, 살릴 수 없소.”

아이를 받아들며 노승이 고개를 내젓는다. 다 해진 누더기 사이로 드러난 어린 것의 새파래진 얼굴을 본 노승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다. 

“아침을 맞이하지 못할 거요.”

“어떻게든 살릴 방도가 없는가?”

“주위를 둘러보시오. 이 곳 어디에서 이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인지.”

“호산 대사는 이 곳에 계시지 않으신가? ?”

“오호라, 호산 큰스님을 찾아왔구먼. 그 분이 열반에 드신 지도 어언……”

노승은 말끝을 흐리고 젊은 장수는 노승의 흐려진 말끝을 나꿔채는 대신 노승의 앙상한 팔에서 금세라도 떨어질 듯한 어린 것이 꺼져가는 숨을 힘겹게 들이쉬고 내쉬는 꼴을 말없이 지켜볼 뿐이다. 멀지 않은 산 아래쪽에서 희미한 고함 소리와 시커먼 연기가 끊임없이 이쪽으로 전해져 오니, 끔찍한 학살과 약탈의 뒤끝을 알리는 것이 틀림없다. 

“아이를 살려 주시오.”

“그 아이는 이미 명이 다했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을 두고 불자가 되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불자가 아니라 불자 할애비라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지.”

“이 칼로 대사를 친다 해도 그런 말씀을 하실까?”

“이 몸이야 이미 오래 전에 혼은 이승을 뜨고 천하 쓸모없는 껍데기만 질기게 남은 터, 귀장(貴將)께서 이 껍데기를 친히 부처님 곁으로 보내 주시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알겠소이다.”

“다른 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아이를 살릴 수 없다면, 다시 아이를 달라. 아이를 데리고 아이를 살릴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     

“이 아이가 귀장의 아이는 아닌 것 같소만? 어찌하여 이 아이를 그리도 간곡히 살리려 하시오?”

“소리를 들었다.”

“소리?”

“어린 것이 살려달라고 하는 소리를.”

“보아하니 어미 뱃속에서 나온 지 달포나 되었을까 말까 한 아이가 무슨 말을 한단 말이오? 귀장께서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닌지?”

“분명히 들었다. 살려달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고,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가신……돌아가신 내 할아버지의 목소리와 똑같은 목소리로.”

약간 얼빠진 듯한 목소리로, 말을 더듬으며 젊은 장수가 허리에 찬 장검에 손을 가져간다. 그러나 잠시 후 장검에 가져갔던 손을 거두고 호소하는 눈길로 노승을 바라보다 노승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그 모습을 아연한 눈길로 내려다보던 노승은 이윽고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허허허!!!”

세상 그 어떤 웃음이 그보다 허탈할 수 있을까. 

“제아무리 용맹한 장수라 할지라도 객지에서 오랫동안 살육을 저지르며 몸을 혹사하면 마침내 정신이 흐려지는 법.”

장수는 어떤 말대꾸도 하지 못한다. 

“귀장께서 들었다는 그 목소리는 필시 귀장께서 몸과 마음이 지친 탓에 들은 환청에 불과하니 귀장께서는 이런 미천한 어린 것의 명에 연연하지 마시고 돌아가시어 건강을 돌보심이…..”

이 때, 두 사람으로부터 불과 스무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수풀 속에서 버스럭거리는 기척이 나고 이어 형형한 안광이 빛을 발한다. 몸집이 크지 않고 다소간 야윈 암호랑이 하나가 수풀을 헤치고 조용히 걸어나와 노승과 장수를 향해 소리없이 다가온다. 

노승의 목소리가 불러들인 맹수인가. 

젊은 장수는 그제서야 장검을 빼들며 뒤로 물러서려다 말고 흠칫 몸을 떨며 노승을 쳐다본 후 노승의 앞을 막아서며 다가오는 호랑이를 향해 칼을 내뻗는다. 

장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 호랑이는 번득이는 칼날을 보고도 딱히 겁을 집어먹지는 않은 듯하나,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음을 직감했는지 서너 발짝을 앞두고는 멈춰서서 젊은 장수를 지그시 노려본다. 이 때, 장수의 뒤에 있던 노승이 슬쩍 걸음을 옮겨 장수로부터 멀찍이 물러서서는 쩌렁하게 큰 소리로 소리친다. 

“옛다 이놈아!”

노승의 쩌렁한 고함소리를 들은 호랑이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노승이 치켜든 어린 것을 알아보고 곧 그것이 제 먹잇감에 틀림없음을 알았음이라. 호랑이는 그 길로 곧장 노승을 덮치고 놀란 장수가 칼을 들어 호랑이를 향해 달려드는 동안 이미 나자빠진 노승의 팔에서 잽싸게 어린 것을 물어들기 바쁘게 왔던 길을 돌아 소리없이 사라지니. 이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한 왜국의 젊은 장수는 빼든 칼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만 그 자리에 떨어뜨리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빠진 노승을 내려다볼 뿐이다. 노승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일어나 몸을 툭툭 터는 동안 장수는 그저 허탈한 표정으로 노승을 지켜보기만 하다가, 나중에서야 일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노승에게 덤벼들어 일어섰던 노승을 호되게 후려치니 그 길로 노승이 다시 그 자리에 자빠지고 이번에는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한다. 

멀리서 한층 요란한 고함소리가 들린다. 왜군이 몰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개는 곧 경상북도를 벗어나 한양으로 가는 첫번째 관문이니 결코 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도성으로 갈 수는 없음이라. 

“그게 무슨 짓인가? 어린것을 호랑이에게 넘겨주다니? 그러고도 그대가 불자란 말이더냐?”

“귀장을 살리기 위해서 그리한 것이지요.”

“이런 망할 놈의 땡중 같으니라고! 내가 그 따위 호랑이 하나를 처치하지 못할까봐 그런 약아빠진 핑계를 대는가?”

“허, 허, 허…….”

허탈하게 땡중이 웃는다. 깊이 끊어지고, 얕게 이어지는 목쉰 웃음소리를 듣는 젊은 장수는 온몸의 핏줄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낀다. 

“귀장은 틀림없이 그 호랑이를 죽였겠지요.”

“잘 알면서 왜 그리한 것이냐?”

“그 호랑이는, 다만 배가 고팠을 뿐 다른 죄가 없소이다. 다만 나라의 명을 어기지 못해 조선말을 배우고 이 땅에 건너와 적군으로 싸우는 귀장과 매한가지로 별다른 죄가 없단 말이외다.”

젊은 장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만다. 

“그 어린 것은 이 땡중의 품에서 숨이 넘어갔소이다. 바로 그 호랑이가 나타나기 직전에 말이오. 이미 죽은 것을 산 목숨의 먹이로 던져줬다 한들 누구를 나무랄 것이오? ”

“그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젊은 장수가 되묻는다. 

“나를 구하기 위해 어린 것을 내던졌다 했다.”

“그야, 물론 귀장은 호랑이를 죽였을 테지만.”

노승은 이미 힘을 잃어 맥이 다 빠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 호랑이는 귀장이 자기를 죽이기 전에 귀장에게 치명상을 입혔을 테니 말이외다. 그 호랑이로서는, 아무려면 이 늙은 땡중의 질긴 살보다야 어린 것의 연한 고기가 그래도 배채우기에는 한결 나은 끼니거리였을 터이니, 어느 누구도 싸우지 않고 원하는 바를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승리인 것이지요.”

“널 죽여 버릴 테다. 짐승만도 못한 땡중 같으니.”

“좋으실 대로 하소서. “

허나 젊은 장수는 어째서인지 자신이 땡중임을 애써 부인하지 않는 노승이 힘겹게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다만 바라볼 뿐이다. 

“내 귀장이 이 땅에서 죽거나 다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연유인즉슨.”

“…….”

“귀장이 이 곳에서 뜻하지 않게 크게 다쳐 부상을 입거나 혹은 숨을 거두게 되면, 귀장과 관련되어 여러 죄없는 목숨이 죽어나갈 것임을 알아본 바, 비록 이역만리 타향의 목숨들이라 하여 이를 모른 체하고 내버리는 것 또한 불자로서 도리는 아니니.”

“허나 만약.”

젊은 장수가 망설이며 되묻는다.

“내가 이 곳에서 숨을 거둔다면, 꺼져가는 이 땅의 생목숨 중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이보시게, 가토 기요마사의 부관.”

이제 드러내놓고 장수의 신분을 밝히며 그를 부르는노승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려 있다. 

“이 전쟁을 일으킨 자는 그대가 아니니, 사람의 목숨을 죽일지 살릴지를 정하는 것도 그대의 소관이 아닐 터, 부디 목숨을 소중히 여겨 오래 보존하시게나. 나는 내 앞에 나타난 두 목숨 중 살릴 수 있는 쪽을 마땅히 살렸을 뿐 그 나머지는 일체 내 뜻대로 하고자 한 바가 없네.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니. 이제 돌아가서 귀장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살육을 계속함이 마땅치 아니한가?”

전에 없이 또렷한 노승의 목소리가 젊은 장수의 귀를 파고드는 동안, 어느 새 젊은 장수의 뒤에서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무장한 서넛의 왜군이 이미 잔불조차 다 타고 온기라고는 남지 않은 불탄 절터의 앞마당으로 들이닥친다. 그 중 하나가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니 늙은 땡중의 앙상한 몸은 낭자한 선혈(鮮血)을 내뿜으며 마른 갈대마냥 힘없이 넘어간다. 이제는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몸이 된 노승이 입에 피를 머금고 빙그레 웃으며 한 마디 하기를…


가토 기요마사의 젊은 부관, 어느 새 무릎을 꿇고 소리없이 눈물을 쏟는 왜국의 장수 이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노승의 마지막 외마디를 듣지 못했음이라.

-어리석은 호랑이가 적을 마주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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