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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Feb 06. 2022

페트루슈카

현실 세계의 어릿광대

페트루슈카



-먼 옛날에, 사람의 영혼과 마음을 가진 어릿광대 꼭두각시 인형이 있었대. 그 인형은 자신과 똑같은 꼭두각시 인형, 그 중에서도 발레리나 인형을 무척이나 사랑했대. 하지만 발레리나 인형은 무어인 장군 인형을 더 좋아했고 가엾은 어릿광대 인형은 질투로 길길이 날뛰며 괴로워했대. 결국 무어인 장군 인형에게 덤벼든 어릿광대 인형은 무어인 장군 인형의 언월도에 맞아 비참하게 죽어가지만 인형의 죽음을 비통해하거나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대. 단지 가엾게 죽은 어릿광대 인형의 유령만이 홀로 남아 지붕에 매달린 채 발을 구르고 통곡하며 절규했을 뿐이래. 왜, 아무도, 내가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가졌기에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을 하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걸 아무도 몰라주냐고 말이야. 달조차 구름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 추운 밤이었대. 그 어릿광대의 이름은, 페트루슈카였대......



“그거, 발레 이야기 아니야?”

그렇게 되묻고 난 재이는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를 챙겨들고 베란다로 나갔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내 다시 들어와 베란다 문을 닫았다. 그가 입은 먹색 스웨터는 해질 대로 해져서 올이 군데군데 풀려 있었다. 그가 그 발레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겨를도 없이 그는 부엌으로 가서 전기 포트에 물을 담아 스위치를 올렸다.

“밖이 너무 추운데.”

“넌,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었어?”

“아아, 전에 서정이랑 같이 본 적 있어. 영화로.”

“영화로? 그건 발레인데, 영화로 그걸 봤다고?”

“아마 지금도 찾아보면 유튜브에 있을 걸. 볼쇼이 발레단에서 만든 30분짜리 발레 영화였어. 내가 그 영화를 왜 기억하느냐 하면.”

피우지 못한 담배에 미련이 남았는지, 아쉬운 듯 담배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재이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서정이가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질질 짜면서 울었거든. 그 어릿광대가 너무나도 불쌍하다나 어쨌다나. 그 어릿광대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페트루슈카.”

“아, 맞아. 페트루슈카.”

이쯤 해서는, 재이가 왜 서정이와 헤어졌는지를 좀 물어볼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질문이 도통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재이가 언제부터 서정이를 알고 지냈는지, 둘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붙어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아주 오래 된 친구 사이였다가, 최근 얼마간은 연인으로 지냈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그런 커플은 아니었지만, 함께 있는 모습이 무척 평온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커플이었기에 속으로 둘이 결혼까지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좀 안일한 생각이었나 보다.

돌이켜 보면, 살아 있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적고 외골수에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재이가  옹골찬 성격의 서정이를 어디까지 감당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반대로, 싹싹하고 야무진 서정이의 입장에서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재이가 딴에는 답답했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어쨌거나 이러니저러니 하면서도 오래   같았던  커플은 결국 깨지고 말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들 커플이 깨어졌다는 사실을 안 시점에서 내 마음이 꽤나 불편해진 것은, 그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깨어질 정도로 서로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 그런 것은 아닐 거라는 직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딱한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하고 짐작해 보았지만 확인해 볼 도리는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첫눈이 내린 오늘, 얼마 전 내가 겪은 참담한 사건을 빌미로 재이의 집을 찾은 지금에 와서야 나는 재이가 왜 서정과 헤어졌는지를 알아낼 기회를 잡은 셈이다. 그러나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연말이고, 우리는 각자 연인을 잃고 솔로가 된 첫 겨울을 꽤나 적적하고도 한가로이 보내고 있다. 필요하다면 오늘 밤을 새 가며 술을 먹여서라도 재이가 서정과 헤어진 이유를 알아내려면 알아낼 수 있다.

“그래도, 꼭 피워야 한다면 복도보다는 베란다가 나을 걸.”

“커피나 한 잔 마시고 나가려고. 그나저나, 넌 어때? 이젠 좀 괜찮아진 거야? 마음 정리는 어지간히 했고?”

“마음이고 뭐고 정리할 게 뭐 있어.”

“네 성질에 또 받아줄 것 같아서 그런다. 오해니 뭐니 하며 굽히고 들어와서 징징거리면, 에라 모르겠다, 또 속아주자, 그러고 넘어갈 것 같아서.”

“내가 그러려고 해도 이번엔 걔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 그러고 나서 한 번도 연락 안 오더라. 화가 나서 끝내자고 문자를 보냈는데 그 문자도 씹었어. 그 정도면 확실히 끝난 거 맞지?”

“무슨 일이 생겨서 연락이 안 된 건 아니고?”

“어제도 재환이가 걔랑 회사 앞에서 만나서 얘기했다잖아.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내 얘기 하지 말라고 성질 부리더라는데? 그러면 끝난 거지.”

“그래. 잘 됐다. 미련 버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그 새끼 마음에 안 들었어.”

“그러니까.”

진실을 알 기회는 바로 이 때라고 생각한 나는 가차없이 재이의 빈틈을 찌르고 들어갔다.

“너는, 대체 왜 서정이랑 헤어진 건데? 연정이 말로는 네가 먼저 서정이한테 헤어지자고 했다며. 걔가 뭘 잘못했는데?”

역시 예상했던 대로, 재이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물이 다 끓었다는 신호로 전기주전자의 스위치가 탁 소리를 내며 꺼졌지만 재이는 커피를 타지 않았다. 대신 한 손에 쥔 인스턴트 커피 스틱을 으스러지도록 꽉 쥐었다. 재이의 목울대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역시, 내가 건드려서는 안 될 걸 건드렸구나 싶어 속으로 쩔쩔매는 동안, 재이는 커피를 타려고 갖다놓은 스텐 머그컵을 재떨이 삼아 결국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온 집안이 굴뚝이 될 것이 뻔했지만 아무래도 이 시점에서 그런 잔소리를 해 봐야 별 소용이 없을 성싶었다. 어차피 내 집이 아니고 재이의 집이다. 집이 더러워진다 해도 골치를 썩힐 쪽은 내가 아니다.

“자신이 없어서.”

“뭐?”

“자신이 없었다고.”

“뭐가 자신이 없었는데?”

“서정이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었다고.”

아니 이게 무슨 거지발싸개 같은 소린가 싶었다.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어서 헤어진다고? 아니, 남자가 여자를 행복하게 해 주는데 대체 무슨 거창하고 대단한 능력이 필요하냐고 되물으려다가 나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내가 깜박 잊고 있던 사실이 생각났다.

재이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말썽거리였던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다름아닌 남자들과의 스캔들이었다. 남자가 남자와 스캔들이 난다는 사실이 뭘 의미했겠는가. 바로 재이에게 바이(양성애자) 기질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은 잠잠했고, 더구나 서정이와 사귀는 동안에는 이렇다 할 스캔들이 나지 않아 모두가 재이의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그저 잊거나 혹은 과거의 흑역사 정도로 치부할 뿐 애써 들춰내려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서정이는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명실공히 재이의 구원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없다고 자부하지만, 완벽한 스트레이트인 나로서는 역시 재이가 평범한 사람들의 울타리 밖을 나가지 않는 노선을 타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성별을 떠나, 친구로서 진심으로 재이를 아끼는 마음이 컸기에 더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음악 들을래?”

“그럴까.”

“시끄러운 건 별로지?”

“응. 정신사나워.”

“누자베스?”

“아니야. 누자베스를 지금 들으면 나 기빨려서 너랑 아무 얘기도 못할 거 같아. 더 루즈한 걸로.”

“더 루즈한 거라......그냥 ‘멜로우 톤’이나 틀자.”

재이는 한쪽 구석에 밀쳐두었던 패드를 집어들어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액정을 몇 번 눌렀다. 곧 내가 아는 익숙한 버전의 ‘멜로우 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재즈힙합 서른 몇 곡을 한꺼번에 모아 놓은 버전의 앨범이다.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볼륨을 낮추는 동안, 재이는 어느 새 꽁초가 된 담재를 스텐 머그컵에 집어넣어 끄고는 주전자를 집어들어 꽁초가 든 컵에 뜨거운 물을 흘려부었다.

“어쩌면, 내가 바로 그 페트루슈카인지도 모르지.”

처음에는, 내가 재이의 말을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환청을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환청을 들었다고 믿고 싶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재이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나도 부적절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나보다. 되묻는 타임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뭐?’하고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내가 바로 그 페트루슈카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재이가 내가 꺼낸 발레 이야기 속 그 어릿광대를 자신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나도 이해했다. 그런데 내가 그 발레 이야기를 왜 꺼냈더라? 아마도 어젯밤이었나 그저께 밤이었나, 퇴근길 차 안에서 무심결에 켠 라디오가 소개한 이야기가 하필이면 그 이야기여서 그랬던가, 아마도 그랬을 거다. 그런데 재이가 그 페트루슈카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어릿광대 이야기 속의 그 불쌍한 어릿광대가 어딜 봐서 재이에게 비유할 면이 있다는 건가?

“물론 나도 알아. 그 어릿광대는 말이지. 그냥 순수하게 발레리나를 사랑하고 자신의 연적을 질투하며 자신을 보호하지 않고 자기 감정에만 몰두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거야. 하지만, 그 어릿광대가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다고 한들 뭔가 달라질 게 있었을까? 나는 그 어릿광대가 자신의 운명을 전혀 모르면서 그렇게 무모하게 굴었을 거라고는 생각 안해. 그 어릿광대는, 어차피 발레리나의 짝이 될 수는 없는 운명이었어. 뭐, 볼쇼이 발레단의 영화 속에 나오는 그 어릿광대야 자기 운명을 몰랐다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현실 세계의 페트루슈카는 말이지. 자기 운명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그래서.”

나는 재이의 말을 잘랐다. 잘라야만 했다.

“그 잘난 운명이 겁나서, 언감생심 발레리나를 미리 내치셨어요 어릿광대 씨? 그런 거야? 성재이, 너 내가 그렇게 안 봤는데, 좀 비겁하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어. 하지만 조금쯤은, 아주 조금쯤은 더 복잡하게 좀 생각해 줘. 나도 단순한 게 좋다는 건 알고 있고, 단순하게 살고 싶지만, 세상에는 단순하게 생각해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아주 많아. 그냥 간단히 요약하자면, 내가 서정이랑 잔 횟수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지만, 그 많지 않은 횟수 중에 서정이가 진심으로 나한테 만족한 횟수가 몇 번이나 될 것 같아? 그게 아니면, 내 친구들이 물었던 것처럼 사실은 네가 서정이를 그렇게 사랑한 게 아닌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 봐, 벌써 그런 질문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답은 이미 네가 얘기했어. 조금 전에 네가 들려 준 그 발레 이야기. 서정이를 울게 만들었고, 지금은 내가 되짚어보고 있는 그 이야기. 사실은, 그때 이미 생각을 했던 건데. 우는 서정이를 달랬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 아마, 내가 바로 그 어릿광대라는 걸 그 순간 우리 둘 다 느껴서 그랬던 게 아닌지 모르겠어. 그 짧고 열렬하고 비참한 사랑 이야기의 막이 내려진 그 순간에 말이야. ”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들어차 숨이 찼다. 베란다로 나가 찬바람을 쐬고 싶었지만, 지금 베란다로 나가 창 밖을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이미 커튼이 반쯤 걷힌 유리문 너머로 쏟아지는 함박눈의 축제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참이었다.

“현실의 비극이라면.”

재이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귀 뒤쪽을 어설프게 긁었다.

“현실의 발레리나는, 그래도 그 어릿광대를 사랑했다는 거지. 그게 비극이라면, 비극이지.”

“저기, 그래도.”

어째서 재이와 서정이 헤어졌다는 사실이 이렇게도 가슴 아픈 건지 알 것 같았지만, 괜한 걸 알아 버렸다는 자책감을 애써 숨기며 나는 얼른 반문했다.

“그렇게 헤어질 것까진 없었잖아? 너, 왜 서정이한테 거짓말했어? 네가 한 거짓말 때문에 서정이가 얼마나 울었는데? 걔는 지금이라도 네가 말 한 마디만 하면, 너한테 당장이라도 돌아올 앤데. 그러지 말고. 재이야.”

마음 좀 돌려 보라는 말까지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건 아무래도 오버하는 거라고,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내 이성을 제어하는 장치가 경고를 해 온 탓이다. 다시 재이의 목울대가 씰룩이는 것이 보였다.

“복수야.”

“뭐?”

“현실의 어릿광대는, 이야기 속의 어릿광대가 못한 복수를 발레리나한테 하는 거지. 빼도박도 못하게 자기 마음을 빼앗아간 발레리나한테 복수하는 거라고.”

아......

“저기, 그러니까. 너는......”

내 질문을 마저 듣지 않고, 재이는 쏟아지는 함박눈과 밀려드는 찬바람을 향해 주저없이 베란다로 나간 후 열었던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밀려든 찬 공기에 잠시 매캐한 연기가 뒤로 물러서면서, ‘멜로우 톤’의 낮고도 아기자기한 선율이 한층 선명하게 재이의 빈자리를 채웠다.

이 씁쓸한 안도감이라니.

그러니까, 재이가 서정이를 버린 건,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열렬히 사랑해서,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그녀로부터 결국 버림받게 될 거라는 걸, 그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뭐, 더 복잡한 진실이 두 사람 사이의 더 깊은 심연 속에 묻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더는, 더는 복잡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설령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해도 단순한 쪽을 택하는 편이 더 나을 때가 많다.

현실 세계의 페트루슈카에게, 운명과 맞서라고 권하기를 포기한 나는 스텐 머그컵을 집어들어 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린 후 머그컵을 씻었다. 그리고 재이가 팽개친 인스턴트 커피 스틱을 집어들어 꼭지를 잘라 머그컵에 부은 후 다시 전기주전자의 스위치를 눌렀다. 이내 주전자에서 다시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수런거리는 웅성거림마냥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냉장고에 들어 있을 캔맥주라도 따는 편이 나았을까 하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현실 세계의 어릿광대로부터, 듣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를 고백을 들은 시점에 이르러서 낮은 도수의 알콜이 주는 가벼운 행복감에 도취되는 건 불가능했다. 이 불행한 현실 세계의 어릿광대가 내게 해 온 고백에 비하면, 기껏 남자친구의 외도로 솔로가 되어버린 나의 이야기는 얼마나 추레하고 속물적인지를 생각하니 기껏 캔맥주 따위의 약한 알콜로는 도무지 이 쓰라린 속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잠시 후 재이가 베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의자 위에 걸쳐 두었던 토트백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벌써 가게?”

“네 얘기 듣고 나니, 여기서 노닥거릴 기분이 싹 가셨어. 잡을 생각 하지 마.”

“잡을 생각도 없어. 그런데 있잖아.”

“응?”

“너무 힘들어하지 마. 너는, 너는 그럴 필요가 없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알고 있어.”

현실 속 가여운 페트루슈카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나는 조용히 어제 새로 산 나의 네이비색 컨버스화를 신었다.

“신발 예쁘네.”

“응. 애인을 갈아치우려면 신발부터 바꿔야지.”

“맞아. 바람직한 발상이야.”

재이의 부드러운 미소가 비수가 되어 내게 꽂히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재이의 얼굴을 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기 전, 복도 구석에 붙은 작은 창문으로 다가가 아직도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약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흩날리는 눈발이 가볍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해가 막 저물어가는 참이었다. 때마친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나서야 재이의 집 문을 나서기 전 울려퍼졌던 “멜로우 톤”의 아름다운 멜로디 한 자락을 두고 나왔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잠깐의 아쉬움이 가슴 속을 저린 통증으로 물들였다. 손에 쥔 차 키를 어쩔 수 없이 손에 꼭 쥐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두고 나온 그 멜로디, 그 익숙한 멜로디는, 아마도 내가 좋아했던 그 곡이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머릿속에서 몸부림치는 가련한 어릿광대의 이미지를 지워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내가 두고 나온 그 멜로디의 첫 소절을 흥얼거려야 했다.  

리플러스(re:plus)의 <잇 올 턴스 아웃 그레이트(It all turns out great)>였다.



I know that I am not close to perfect

that's the way it's got to be

if ain't ever tried to make it,

how am I gonna see

everything that I have dreamed of

everything I plan to do

Im gonna take it day by day

and know it all start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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