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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Nov 30. 2021

군인의 인형

단편소설

군인의 인형



페스트균의 살상력을 압도하는 생화학무기가 도시를 휩쓸고 간 자리에는 시체들만이 즐비했다. 그 도시를 점령한 것은 군인들이었다. 

그리고 내 아버지는 그 군인들 중에서도 꽤 계급이 높은 장교였다. 아직 젊은 나이였던 그에게 그토록 과분한 계급이 주어진 이유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도 그 자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을 테지만.

군인들이 도시를 점령한 지 이틀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젊은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그 무렵 계속해서 앓고 있었던 만성 두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무작정 숙소를 벗어나 혼자 거리로 나왔다. 품에 권총 한 자루를 달랑 품고서. 사실은,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길바닥 여기저기를 굴러다니는 시신들이 짐짝처럼 트럭에 실리는 걸 보면서 나는 자꾸만 분산되어 흩어지려는 신경을 빈틈없이 다잡아야만 했다. 정말로 한 가닥의 거미줄만한 균열이라도 생겼다가는 그 균열의 틈새로 온갖 번민과 혼란과 양심의 가책과 회의가 스며들어와 나를 무너뜨릴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거든. 

그렇게 겉으로는 두통을 다스리려고 그리고 안으로는 물샐틈없이 자신의 영혼을 단속하느라 허망한 걸음을 재촉하던 아버지는 어떤 낡은 아파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늙은 노파의 시신 한 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미처 치워지지 않은 짐짝과도 같은 시신의 얼굴은 길디긴 잿빛 머리카락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시신을 지나쳐 열려진 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그녀의 영혼이 손짓을 하며 아버지를 이끌기라도 한 것일까. 

집 안에는 젊은 여자의 시신과 어린아이의 시신이 있었다. 자다가 숨을 거두었는지 둘 다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 집 안은 어수선하고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어쩐지 일반적인 가정집과는 조금 다른 듯한 어떤 느낌이 아버지의 마음을 기묘한 호기심에 사로잡히게 했다. 

마침내 아버지는 문이 반쯤 열린 작은 골방 하나를 발견했다. 아마도 숨을 거둔 노파의 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 안에는 여자의 옷가지가 산더미처럼 널린 침대 하나와 책으로 가득한 책장 하나가 있었다. 책장 앞에는 긴 테이블보에 덮인 자그마한 원형 탁자가 바싹 붙어 있었다.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든, 혹은 귀신의 안내 때문이든 간에 아버지는 책장으로 다가가 몇 권의 책을 꺼내들어 펼쳐 보았다. 곧이어 아버지는 그 책들이 시시한 싸구려 책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지간히 높은 안목과 지성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책장에 꽂아놓을 수 없는, 실로 훌륭한 양서들이었다. 

칸마다 한두 권씩 책을 끄집어내던 아버지는 결국 긴 탁자보가 덮인 탁자에서 탁자보를 걷어내고 탁자보에 가리워졌던 책장의 하단을 보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 

그 곳에서 아버지가 발견한 것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려온다. 아마.....목욕하는 선녀를 발견한 나무꾼의 가슴이 그때의 나처럼 그렇게 철렁 내려앉았을까. 그건.....마치 기적과도 같은 거였다고나 할까. 

생각해보면 그것이 기적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책장의 하단에 얌전히 숨겨져 있었던 것은 인형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뽀얀 몰드를 가진 우레탄 인형이었다. 그 당시 그 도시가 속해 있던 나라의 기술력으로는 절대로 그런 고급 우레탄 인형을 만들 수가 없었다는 걸 지금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 그 집에서 살고 있었을 누군가가 그 인형을 어디에서 구해 왔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게 당연하다. 

그 인형을 데리고 아버지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혼을 했고, 이듬해 첫딸이자 외동딸인 내가 태어났다. 



-네 아버지는 평생 내게 성실했지만.

언젠가 어머니가 부엌 탁자에 앉아 창 밖을 보며 내게 말했다. 

-그건 아마 나를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바로 이 집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그 존재란 어머니도 나도 아니라는 걸, 어머니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인형의 집은 다름아닌 아버지의 서재에 달린 붙박이장이었다. 밤이 되어 형광등을 켤 때가 되면 반드시 인형을 붙박이장 안에 넣고 문을 닫아 버렸지만, 햇빛이 부드럽게 서재를 잠식한 낮 동안에는 반드시 인형을 꺼내 햇빛이 들지 않는 책장 위에 올려두었다. 

전쟁터 출신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그 인형은 깨끗했고 아름다웠다. 때문에 그 인형은 우리 집에서는 마치 성모 마리아와 같은 존재였다. 대대로 불교도였던 집안에서 성모 마리아를 모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 인형은 그런 존재였다. 눈부신 금발에 초록 눈을 한 인형은 이상하게도 세월의 때를 탈 줄 몰랐다. 

내가 열 세 살이 되던 해 생일, 아버지는 나를 서재로 불렀다. 그리고는 내게 인형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니까 인형의 머리를 빗질하고, 옷을 갈아입히고, 먼지를 제거하는 따위의 사소한 일들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내게 넘기신 거였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인형을 관리했다. 하지만 열의를 가지고 임무를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인형이 싫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두려웠다고 해야겠다. 그 인형이 몇 살인지, 그 초록색 눈으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는지, 얼마나 수많은 탄생과 죽음을 보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의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온 어머니가 낮은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며 그 인형을 바라보던 그 눈빛 또한 나로서는 잊어버리기 힘들었다. 말 한 마디 없이 눈부시게 가냘프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차디차고 하얀 인형은 분명히 내 어머니를 맥빠지게 하는 존재였다. 

구태여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손재주가 뛰어난 편이 아니었지만, 인형의 드레스를 만들 정도의 바느질은 할 수 있었다. 내가 만든 드레스들은 대개는 조악하고 볼품없었기 때문에, 그런 드레스를 입혀놓은 그 인형을 본 아버지는 그저 침묵으로 혹평을 대신하곤 했다.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나는 잡지에서 본 사진을 바탕으로 제법 훌륭한 초기 디올 스타일의 원피스를 만들었다. 물론 인형의 옷이었다. 의상 공부를 하던 친구가 이사를 하면서 임시로 맡긴 전자 재봉틀을 이용해 만든 옷이었는데, 먼저 내 옷을 만들기에 앞서 시험삼아 만들어 본 것이다. 

그 옷을 만들어 입힌 다음날, 아버지는 아침 일찍 나를 서재로 불렀다. 그리고는 인형을 가리켰다. 

-네가 저걸 만들어 입힌 거냐?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대답했다. 

-네.

아버지는 오랫동안 인형을 응시하셨다. 마침내 아버지가 긴 한숨을 내쉬었을 때, 그것이 감탄의 한숨이었음을 안 나는 덩달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지갑을 꺼내더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액수가 적힌 수표를 내게 주었다. 그 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꺼번에 그토록 큰 용돈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 돈으로 나는 내가 원하던 디자인의 원피스를 샀다. 따라서 자연히 인형과 똑같은 옷을 만들려던 내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인형을 위해 몇 벌의 드레스를 만들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내게 다른 더욱 중요한 일들이 생기면서, 나날이 쌓여가는 바쁜 일상에 매몰되어 가면서 인형도 인형의 드레스도, 그리고 아버지도 내게는 잊혀져가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나의 첫 결혼은 매우 짧고, 매우 어이없는 실패로 끝났다.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위자료도 받지 않았다.

돈도 아이도 없는 빈몸으로 나는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는 그 인형에 대해 전혀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전쟁터에서 아버지가 주워 온 인형. 가끔 머리를 빗기고 먼지를 털고 옷을 만들어 입히던 인형.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인형을 병원에 가져갔다. 그때 아버지가 지었던 표정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이 기묘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표정이라고 실없이 웃어넘기고 싶었지만, 그렇게만 치부할 수만도 없는 더욱 복잡미묘한 감정이 한때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얼굴을 치밀하게 점령하고 있었다.

-도로 가져가서 벽장 속에 넣어 두거라. 그리고 앞으로는 가져오지 말거라.

-싫으세요?

-여기저기 들고 돌아다니다가 망가질까봐 그래.

-아버지도 참. 저를 못 믿으시나 봐. 그렇쟎아도 걱정하실까 봐 신경써서 들고 온 건데.

나는 시키는 대로 인형을 벽장에 집어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얼마 후 아버지는 퇴원하셨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후로는 인형을 벽장에서 꺼내지 않으셨다. 그 다음에는 엄마가 편찮으시기 시작했다. 입원을 극구 거부하며 통원치료를 고집하시는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갔다가 모셔오는 것이 자연스레 외동딸인 나의 몫이 되었다. 

깊어가는 가을날, 그 남자가 찾아왔다. 



.오래 전,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진이 잡지에 실린 적이 있었다. 배경은 아버지의 서재였고, 따라서 그 인형이 사진에 찍힌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도무지 잡지에 사진이 실릴 일이라고는 없었던 부모님의 사진이 왜 실렸는지 그 당시에는 경위를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의 군대 시절 부하 중 잡지사 사장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훌륭한 퇴역 군인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몇 줄의 글을 실으면서 사진도 덩달아 실었던 모양이다. 

그 사진이 그 남자로 하여금 우리를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 인형을 사고 싶습니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달로 그보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우레탄 인형들이 넘쳐나고 있는데, 왜 구태여 오래된 잡지 한구석에 실린 인형을 거액의 돈을 주고 사겠다고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짜증과 분노와 혐오가 한데 섞인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는 칠흑같은 검은 머리카락의 소유자였다. 바로 아버지가 그 인형을 데려왔던 나라에서 온 사람임을 이미 나는 직감으로 깨닫고 있었다. 

-팔 수 없네. 

-그럼, 보여주실 수도 없으십니까?

아마 아버지는 그를 그 자리에서 내쫓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이미 조금씩 가까워지는 죽음을 느끼고 있었을 어머니가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평생 동안, 단 한번도 남편에게 불복종한 적이 없는, 한 군인의 충실한 부하였던 아내가 처음으로 남편에게 항명하는 장면이었다. 

그 순간 선택은 내 몫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서재로 가서 벽장을 열고 인형을 꺼냈다. 그리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남자의 맞은편 의자에 인형을 올려놓았다.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이나 인형을 쏘아보았다. 30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제 갓 만들어진 것처럼 새하얀 인형을. 

인형은 초록색 눈으로 담담히 남자의 시선을 응시하며, 자신의 얼굴에 구멍을 낼 기세로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감내하고 있었다. 

마침내 남자가 입을 열었다. 

-30년 전에 B 시에서 가져오신 인형이 바로 이 인형이 아닙니까?

아버지의 동공이 무섭게 팽창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틀림없습니다. 돌아가신 고모할머니의 인형입니다. 그때 겨우 네 살 정도 된 아기였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인형이 있는 방에서 생활했으니까요. 항상 탁자로 가려놓은 책장 아래 깊숙이 넣어두고 내가 잠들기를 기다리셨지요. 몇 번이나 고모할머니가 밤이면 그 인형을 꺼내 어루만지던 것을 어제 일처럼 기억합니다. 기저귀도 채 떼지 못한 아기였지만, 그리고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남자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만 침묵을 지켰다. 어머니는 거실을 나가셨다. 나는 남자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제 기억이 그대로인 만큼, 저 인형도 그대로입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말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 당시 그 도시를 대상으로 한 세균전 실험 덕에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몰살당했지요. 내 부모님이 나를 안고 고모할머니 댁을 떠나 고향으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일이 일어난 겁니다. 하지만, 고모할머니 댁에 남아 있던 형은 죽었습니다. 당시 여섯 살이었지요. 

남자는 창백해진 얼굴로 일어섰다. 

-아마 팔 생각이 없으시겠지요. 

그때 그에게 인형을 돌려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인형이 아니었다. 내 아버지의 인형이었다. 군인의 인형이었다. 해결할 수 없는 죄책감을 가슴에 떠안고 살아온 퇴역 군인의 불멸의 연인이었다. 

그날 밤, 우리 가족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내가 죽거든.

임종을 맞으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네 아버지 곁을 떠나거라. 먼 곳으로 가. 네 아버지는 그 인형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없는 사람이야. 나한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지만, 나는 알고 있었어. 네 아버지는 그 많은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를 했다는 걸. 아마 그 인형을 보고 있었을 때만 그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겠지. 잊고 싶은 기억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을 거야. 아마 다른 감정이나 생각들도 많았을 테지만, 그런 것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어쨌든 그의 곁을 충실하게 지켜왔다. 평생 보답을 받은 적도 바란 적도 없는 그 사랑이 나를 아프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다시 인형을 꺼내 놓았다. 내가 철이 든 이래,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던 바로 그 자리, 햇빛이 들지 않는 책장 귀퉁이 자리였다. 

그 무렵에는, 거의 매일 꿈을 꾸었다. 아버지의 서재 안을 오락가락 거니는 한 여자의 꿈을. 여자는 때로는 소녀였지만, 거의 대부분은 젊은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틀어올리고 몇십년 전 유행하던 실내복을 걸친 모습이었다. 때로는 할머니가 되기도 했다. 인형의 주인이었던 여자라는 걸 꿈에서도 알 수 있었다. 꿈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시시각각 다른 나이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인형을 떠나지 못하는 인형의 주인이 안쓰러웠다. 도대체 그녀에게 이 인형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는 얼마나 이 인형을 사랑했을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인형을 향한 내 아버지의 사랑의 무게는 그 인형의 원래 주인이었을 그녀의 인형을 향한 사랑의 무게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마침내 아버지에게도 죽음이 살며시 찾아들었을 때, 아버지는 시종일관 낮은 한숨을 쉬며 몇 시간이나 말없이 인형을 응시하곤 했다. 그 남자에게 인형을 돌려주지 못한 자신의 미련을 자책했을지, 아니면 어머니의 말대로 평생을 끌어안고 산 죄책감에서 헤어나려 발버둥치고 있었을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인형의 주인이었던 여자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그녀의, 아니 인형의 미묘한 눈빛은 한결같이 애잔했다. 그 눈빛에 공포나 증오나 원한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달 전, 그 당시 세균전을 규탄하는 내용의 기사가 지역신문에 실렸다. 기사의 내용은 인터넷과 소위 SNS라 불리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에 일파만파로 퍼졌다. 그 기사에 담긴 전범 리스트에 아버지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유능하지만 악랄한 군의관이었던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아버지를 떠나야 할 상황이 온 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미 나를 그리고 그 인형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나는 굳이 떠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나면 인형을 돌려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남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인형을 없애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애욕을 먹으며 나이를 먹어온 인형의 자태는 지금도 매혹적이어서, 떠나보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인형의 몸이 푸르스름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세월에 의해 망가져가는 인형의 애달픈 얼굴을 지켜본다. 더 이상 사람에게서 영혼을 빼앗아갈 수 없는, 양분을 잃은 우레탄 덩어리의 슬픔이 때로는 빛과 어둠의 조화 앞에서 황홀하기까지 하다. 

빠져나올 수 없는 고독의 감옥 안에서 그녀는 내 유일한 친구이다. 

그녀는 한때 군인의 인형이었다. 

그녀 말고는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한다. 

속죄할 수 없는 죄를 지은 그 군인이 자신의 죄를 잊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는 진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날, 그 군인이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단 한 자루의 권총만을 품고 외출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이제는 나와 이 인형 둘 뿐이다.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들춰진 식탁보 아래에서 마법처럼 나타난 인형이 군인의 권총자살을 막았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 군인이 사십여 년을 하루같이 매일 아침마다 권총자살을 시도했지만, 매번 그 자살을 필사적으로 막은 존재는 그의 아내도 외동딸도 아닌 인형이었음을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나. 

아버지는 서재에서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품 속에는 여전히 새것처럼 번쩍거리는, 실탄이 장전된 콜트 권총이 들어 있었다. 바로 인형을 발견했던 그 순간에도 아버지의 품 속에 있었던 그 권총이었다. 

그 인형은 아버지에게 편안한 죽음 대신, 매일 신경을 갉는 고통으로 점철된, 숨쉬는 삶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의 딸인 내게는,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 급속도로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게 하는 또다른 고통을 안겨주었다. 어떤 양심의 가책이나 참회나 후회가 아무리 크고 강하다 한들, 그걸로 죄의 댓가를 치를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로는 뼈저린 후회는 후회로만 남을 뿐, 죽어간 여섯 살짜리 소년을 살려낼 수는 없다. 

전쟁터에서 온 한 군인의 인형이 내게 남긴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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