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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Aug 24. 2020

나더러 이 여름을 어쩌라고

나더러 이 여름을 어쩌라고



*이 이야기는, 작년에 세상을 떠난 한효정의 자택에서 발견된 노트와는 별개로, 추가로 발견된 수첩에 기록되어 있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몇몇 등장인물의 실명이 거론되기는 해도 내용 자체는 허구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한효정이 쓴 단편 소설일 가능성이 높지만 진위 여부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본문



1

귀청을 찢는 울음소리. 거의 절규라고 말하는 편이 맞을 정도로 처절한 울음소리가 스텝실 안을 가득 메운다. 불과 이십여분 전에 진찰실에서부터 시작된 울음소리다. 모두가 귀를 막고 싶어하는 표정으로, 그러나 차마 귀를 막지 못하고 그렇게 울어대는 그녀를 말리지도 못한다. 진찰실로부터 강제로 끌려 들어오다시피 한 그녀는 굳게 닫힌 스텝실 안에서 마음놓고 오열하고, 나는 귀를 파고드는 그녀의 서러운 울음소리를고막이 아닌 피부를 통해 나의 뇌로 전달한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울음을 막지 못한다. 

그녀의 애인이 교통사고로 죽은 지 딱 사흘이 지났다. 

원장은 그녀가 원한다면 발인을 지켜보러 가도 좋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 배려를 마다하고 평소처럼 정상적으로 출근했다. 마침내 그녀의 입에 일회용 마스크가 씌워지고 그녀의 처절한 울음소리에도 일회용 마스크가 덧입혀진다. 우렁우렁 낮게 으르렁대는 듯한 울음소리에 내 귀를 맡겨놓은 채, 나는 어느 새 그녀의 절규에 가까운 오열을 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2

매년 잔인하지 않았던 여름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내가 호흡하는 공기가 찜솥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나 다름없는 열기를 내뿜는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매년 찾아오는 여름을 무사히 넘긴다는 것은 내게는 전쟁이고 고역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에어컨이 내뿜는 그 인위적인 냉기가 두통과 현기증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로는 더더욱 여름이 싫어졌다. 

그래도, 올해 여름만큼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다가오는 여름이 내뿜는 열기에서 느껴지는 조짐이 나쁘지 않다고 느껴져서였을까. 아니다. 올해 여름에 이어져 있던 봄, 지난 몇 년간의 악몽을 잠시나마 잊게 했던 지난 봄과 맞닿아 있던 여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살다보면, 그런 순간도 한번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기치 못하게 놀라고, 그 놀라움에 이어지는 설레임으로 몸을 떠는 순간 말이다. 

시작은 지난 3월이었다. 조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치과 진료기록부를 요구했고, 지극히 어린애다운 어린애였던 조카는 병원을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제 아빠를 따라간 치과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겁에 질린 녀석은 치과 치료를 극구 거부했다. 결국 내가 우는 녀석을 달래가며 치과를 데려가야 했다. 처음에는 어린이 치과를 데려가려 했지만, 거리가 멀고 비용이 만만찮다는 이유로 어린 아이들을 잘 봐준다고 입소문이 난 중심가의 제법 알려진 치과를 찾았다. 

그곳에서 정하를 만났다. 

조카를 진료한 부원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저만치 떨어진 환자용 의자 앞에 앉아 있던 정하의 뒷모습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맵시있게 곱슬거리면서도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던 다갈색의 커트머리.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일단 포착하면, 결코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다행히도 정하가 일하던 그 치과의 치위생사 중 하나가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정하에 대한 정보를 이것저것 캐낼 수 있었다. 도대체 그 선생님에 대해 왜 그렇게 많은 걸 알려고 하느냐는 친구의 여동생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친구는 너무나도 쉽게 내 의중을 간파했고, 내가 일단 원하는 정보를 얻어낸 시점에서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 그리고는 세상 다 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잘해보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서 미안하다. 조심해. ”

뭘 조심하라는 거냐는 나의 질문이 이어지자 친구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네가 우는 꼴을 보게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내 앞에서 우는 상황 따위 만들지 않게 조심하라구. ”



3

단언컨대 많은 걸 원했던 게 아니었다. 

정하에 대한 정보를 이것저것 캐내기는 했지만, 정말로 정하에게 접근하려는 의도로 정하의 신상을 캐내려 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친구의 여동생을 통해 얻어낸 정보는 상당히 빈약한 편이었다. 정하가 꼬박꼬박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기 위해 다니는 헬스클럽이 어딘지를 알아낸 것이 고작이었다. 그 헬스클럽은 그 무렵 내가 가끔 들르던 프랜차이즈 커피숍과 같은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정도로만 알아 둬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 

“결혼하자. ”

서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만난 내 공식적인 남자친구는, 내가 슬슬 이별을 어떻게 통보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던 시점에서 천진난만하게도 프로포즈를 해 오고 만 것이다. 빨간 장미꽃 백 송이를 받아들고, 나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과 일부 여자들은, 장미꽃 따위를 내세우며 들이대는 프로포즈에 감격하지 않는 부류의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거의 열에 아홉은 모텔을 주무대로 벌어졌던 정사에서 숨가쁘게 내뱉던 신음소리의 약 60퍼센트 정도가 서툴기 짝이 없는 연기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오르가즘에 대해서는, 말도 하지 말자. 단언컨대 남자들을 싫어하거나 그들에 대해 격렬한 적대감을 품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니까, 하필이면 이 자리를 빌어 그들의 환상을 산산조각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려고 쓰는 글이 절대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이 여름을 어떻게 떠나보내야 할지를 몰라 오그라드는 손을 꽉 맞잡고 있는, 심약한, 바이 섹슈얼 성향을 가진, 삽십 대 중후반의 여성일 뿐이다. 



4

사실 나이가 있으니까, 그 시점에서 결혼한다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결단코 문제될 것은 없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상견례 날짜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나를 사로잡는 것은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이었다. 정하를 알게 된 순간의 그 설레던 꿈 같은 기분을 하마터면 완벽하게 망쳐버릴 뻔한 두려움이었다. 

봄이 거의 물러가고 여름이 시작되던 무렵의 어느 날, 그날따라 나는 정하를 보게 되리라는 일말의 기대도 없이 정하가 다니던 그 헬스클럽 1층의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기 위해 무심결에 카운터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앞에서 커피를 주문하기 위해 서 있는 사람이 다름아닌 정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하의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재빨리 주문을 하고 진동벨을 받아가자, 정하가 주문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다가선 것과 거의 동시에 나 또한 카운터로 다가섰다. 다행히도 나를 정하의 일행으로 오인했는지 계산대 앞에 서 있던 아르바이트생은 나를 막지 않았다. 정하가 커피를 주문하고 카드를 꺼내든 순간 나는 날렵하게 손을 뻗어 카드를 점원에게 내미는 정하의 손을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의아함을 넘어서서 뜨악해하는 표정이 역력한 정하를 무시한 채 나는 점원에게 내 카드를 내밀었다.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

“아니, 잠깐만요. 저기 그럴 필요가……. ”

나를 만류하며 다시 자신의 카드를 내미는 정하의 손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힘껏 내 손으로 쳐내 버렸다. 카드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떨어졌고 당황한 정하가 카드를 줍는 동안 나는 재빨리 정하 대신 내 카드로 정하의 커피를 결제한 후 쏜살같이 커피숍을 나와 버렸다. 

종종걸음으로 줄달음쳐 걸으며 집으로 향하는 동안, 언젠가 기억 속에 남아있던 그 여름이 스쳐 지나갔다. 이른 아침부터 선명하게 내리쬐던 태양아래 길을 잃고 헤매다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처럼 발견했던 그 커피숍,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청량감을 선사했던 아이스커피. 그날 들었던 스틸 캐러밴의 <Mends Your Broken Heart>를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내 카드로 정하의 커피를 결제하면서, 나는 그토록이나 선명하고 청량했던 여름까지 함께 결제하고 싶었다. 지난날의 그 여름이 다시 내게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하지만, 이미 코 앞에 닥쳐온 여름은 그 여름이 아니다. 

우중충한,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 끈적한 습기가 온 몸을 휘감고 도는, 질척한 잿빛의 여름이다. 기억 속 그 여름처럼 찬연하고 선명한 여름이 아니다. 




5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다시 조카를 데리고 정하가 일하는 치과를 찾아갔다.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일단 접수한 후 대기하고 있어달라는 제부의 부탁에 따른 것이었다.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저만치서 다가오는 정하와 마주쳤지만 그녀는 나를 못 알아보았는지 무심결에 지나쳤다.  나는 그녀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서운함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나의 착각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조카의 아버지, 즉 제부에게 조카를 인계하고 혼자 병원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나지막한 정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

나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정하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실망했었다. 내가 기대했던 느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처음 정하를 보았을 때 느꼈던 설레임 자체가 사라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 커피 대신 계산하신 분 맞으시죠?”

“아……. ”

내가 힘껏 쳐낸 정하의 손과, 그 손에서 튕겨나가 허공을 한 바퀴 구르던 정하의 카드가 떠올랐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때, 그렇게 손을 때려서……”

“아닙니다. 그보다도, 그때 왜 그러셨냐고 여쭤보고 싶은데……. ”

그때 안에서 정하를 찾는 치위생사가 정하를 향해 다가왔다. 뭔가를 묻는 치위생사의 질문에 정하는 간단히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는, 약간은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은 일단 곤란하니까, 나중에 뵙도록 하죠. 실례가 안 된다면, 휴대폰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내가 뭐라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그녀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실례가 되더라도 연락처는 알려주셔야겠는데요. ”




6

“그러니까, 꼭 저한테 커피를 사 주고 싶었던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주말에 마침내 정식으로 맞대면한 자리에서 여전히 화가 난 표정으로 정하는 내게 그렇게 따져 물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나를 스토커로 오인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딴은 그 오해가 전적으로 오해라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그쪽이, 그러니까, 뭐라 불러야 하나. ”

“내가 더 나이가 많으니까 언니라고 불러요. ”

그랬다. 정하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그것도 무려 두 살이나. 

“아뇨. 그냥 선생님이라 부를게요. 선생님께서 저를 따라다니셨던 사람인가요?”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정하가 말을 이었다. 

“사실은, 얼마 전부터 저한테 스토커가 따라붙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가 계속 들어왔어요. 실제로 누가 절 미행한다는 느낌도 들었고, 저에 관해 이것저것 캐묻는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들었고요. 그래서 계속 신경쓰느라 일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는데, 그게 선생님이셨죠?”

“따라다닌 적은 없어요. ”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냥 호감이 가서, 좀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요. 무례했다는 건 아니까, 화 풀어요. ”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때 정하와 나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가방을 놓아둔 채 각자의 폰을 들고 저만치 물러났다. 각자 통화를 하는 중에도 우리는 서로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정하는 금세 통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다름아닌 나의 남자친구, 이제는 약혼자가 되고 만 남자친구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기 때문이었다. 상견례 날짜를 당기자는 제안을 기어이 강행하려는 그의 의지를 꺾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아무래도 이 인간과는 결혼해봐야 그 다음이 뻔하다고 생각하며 용변 후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자리로 돌아와 정하를 마주하고 앉으며, 나는 무심결에 거의 탄식에 가까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하는 그런 나를 마뜩찮은 눈으로 한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대체 정체가 뭐예요?”

그 어줍쟎은 질문을 하게 만든 원인제공자는 물론 나다. 하지만 그 질문보다도, 그 당돌한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낸 정하의 경멸 섞인 차가운 표정이 갑작스러운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나는 사람들에게 좀처럼 드러내는 법이 없는 나의 시니컬한 면을 그만 정하에게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는 넌 네 정체를 아니?”

“네?”

“넌 네 정체를 아냐고. 난 내 정체를 모르는데?”

“아. ”

단순히 시니컬한 말장난을 하자는 게 아니었다. 누구나 자신의 정체를 다 모르고 사는 법이다. 정하는 약간 벙찐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코웃음을 치며 피식 웃었다. 그 표정이 묘하게도 루비 로즈를 떠올리게 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루비 로즈의 팬이 아니다. 나는 에리카 린더의 골수 팬이었고, 정하는 에리카 린더와는 손톱만큼도 닮은 구석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는. 뭐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머무적거리는 가운데 정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침묵을 지키며 거의 삼십여 분 가량을 마주앉아 있었다. 




7

그로부터 이틀 정도 지나, 뜻밖에도 정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가 근무하는 치과에서 일하는 치기구 세척사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다른 세척사를 구할 때까지만 임시로 일해줄 수 없느냐는 제안이었다. 내가 작년에 직장을 그만 둔 후 지금까지 무위도식하고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그녀가 그걸 어떻게 안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군말없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병원 내부를 오가며 정하를 마주칠 때마다 느껴야 할 어색함과 당혹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조금은 난감해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우선,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 적응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고, 거의 모든 작업이 소독실, 즉 세척실 안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실제로 정하를 포함한 의사들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 병원에는 정하 말고도 두 명의 치과 의사가 더 있었다. 한 사람은 원장이었고, 나머지 두 부원장 중 하나가 다름아닌 정하였다. 

내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잔인한 여름이 그런 식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난데없이 아르바이트를 구한 나의 결정에 남자친구는 황당해했지만, 미래의 부인이 미리부터 맞벌이를 위한 예행연습에 돌입했다고 생각했는지 별다른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파트타임인데다 평일에만 나가면 되는 일이었던지라 시간을많이 잡아먹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게 다 잘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다 잘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야말로 사실은 최악의 상황인 경우가 심심치 않게 벌어지곤 한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6월 하순이 되어가던 어느 날 정하가 나를 불러냈다. 그것도 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변두리 외곽의 어느 와인 바로, 저녁 시간에 맞춰 나를 불러냈다. 당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하가 나를 불러낸 의도가 내가 원하는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서글펐다. 

평소에 입지 않는 레이스 치마를 걸치고 짙은 립스틱을 발랐다. 이런 모습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나도 되는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사실 그 만남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가슴 한켠을 꽉 메우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화장을 진하게 하고, 깡말라서 가냘프다는 느낌보다는 성미가 사납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모습으로 정하는 나를 맞이했다. 정하와 마찬가지로 화장을 진하게 한 나를 본 정하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예쁘네요. ”

뭐가 예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정하는 메뉴판을 보고 와인과 간단한 카나페 류의 안주를 주문했다. 

“원래 저녁 먹을 시간이긴 하지만, 이런 걸로 때우는 것도 나쁘진 않죠?”

용건이 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눈을 내리깐 채 집요하게 정하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침내 정하는 가벼운 한숨, 내가 내쉬는 것보다는 훨씬 가볍고 날렵하게 느껴지는(그녀 자신과 비슷한) 한숨을 쉬며 신경질적으로 메뉴판을 덮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레즈비언이라니, 참 안타깝네요. ”

“레즈비언 아니야. ”

나도 모르게 정하게 반말을 해 버렸다. 

“아니라고요?”

“아니야. 나 곧 결혼할 거고, 결혼할 남자도 있어. ”

정하는 약간 놀란 눈치였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미혼이었다는 건가요?”

“그러는 넌? 결혼했어?”

“했죠. 아이도 있어요.  “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놀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쓴웃음을 짓는 동안 와인과 카나페가 도착했다. 정하가 내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혹시 언니가 돌싱인가 했었죠. 뭔가, 여지껏 미혼여성으로 있었다는 느낌은 안 들어서. ”

“알 거 다 알고 할 거 다 해봤으니 그렇겠지 뭐. ”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다 알아봤어요. 언니, 레즈비언 맞죠?”

“아니라고. 구태여 따지자면. ”

“따지자면?”

“성별을 가리지 않는 것뿐이야. 단지 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를 따질 뿐이지. ”

그 후로 한참의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정하는 말없이 와인을 마셨고 나는 담배를 피웠다. 다행히도 금연구역이 아니어서, 평화롭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이윽고 정하가 입을 열었다. 

“결혼, 축하해요. ”

“축하할 일 아니야. ”

“왜요?정략결혼이기라도 한 건가요?”

“파혼하고 싶어. 결혼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

“그러면 안 하면 되잖아요. ”

“그 인간이 집요해. ”

“그 인간이라면, 애인?”

“응. ”

“애인을 그런 식으로 부르다니, 만정 떨어지겠어요. ”

무슨 말을 하든, 무슨 말을 듣든,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은, 코 앞에 닥친 이 결혼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울고 싶었다. 

평생을 스틸 카라반이나 듣고 페르난도 페소아의 책이나 뒤적이며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식으로 여생을 보낼 수는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날들을 떠올리고 남은 날들을 떠올리다 보면 결국은 질식할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히는 건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양이 카페, 가 본 적 있어?”

“고양이 카페요?”



8

나는 고양이를 싫어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은 고양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소위 ‘고양이 집사’들이었고, 결국은 싫다는 나를 잡아끌고 기어이 고양이 카페로 향했다.  ‘그 귀여운 고양이들’을 직접 보고 나면 그 매력에 빠지게 될 거라면서.  

그 결과 실제로 친구들의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해서, 그날 이후로는 그리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고양이를 키우겠다는 의지는 생기지 않았지만, 귀여운 고양이를 보면 안고 털을 쓰다듬어 주며 츄르(고양이 간식)를 손등에 얹어 핥아먹게 해 줄 정도로는 녀석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결국 내가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애정, 정확히 말해 남자들에게 줄 수 있는 애정이라는 건, 고양이를 위해 손등에 츄르를 얹어 내밀어 주는 정도의 애정에 불과하다. 단지 남자에게 주는 건 손등에 얹은 츄르가 아닌, 가랑이 사이에 자리잡은 구멍이라는 게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그냥 미안했다,는 거다. 

이런 얘기를 정하에게 들려주자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와인을 더 주문했다. 

“웃기는 얘기 같긴 한데 별로 웃음은 안 나네요. ”

“술 그만 마셔. ”

“불쌍해라. 고양이한테 간식 주는 정도의 애정만 가지고 결혼을 해야 하다니. ”

“어쩌겠어. 그래도 하기 싫지만, 달리 도리가 없으니. ”

“진짜로 하기 싫은 거예요? 그 결혼?”

그럼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냐고 되물으려던 찰나, 정하와 정면으로 시선이 맞물렸다. 묘하게도 루비 로즈를 떠올리게 하는 정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가늘게 뜬 정하의 눈을 본 순간, 가슴이 떨려왔다. 

단순히 반했다는 느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때까지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정하도 나와 마찬가지로 바이 섹슈얼이었다. 다만, 나와 달리 자신의 본모습을 철저하게 은폐할 줄 알았고, 또 철저하게 은폐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 유능한 치과의사이자 성공한 커리어 우먼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연기를 빈틈없이 완벽하게 잘해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힘이 쭉 빠졌다. 

세상에는,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아주 많다. 반대로, 남자들에게 가랑이를 벌려주며 이어가는 삶은 아주 쉽다. 자신을 철저하게 은폐할 줄 아는 정하의 노력, 그리고 어설프게 이쪽과 저쪽으로 오가며 어물쩡대는 나의 방황에 비하면 훨씬 쉽다. 한때는 정말로 남자들을 좋아했고, 남자들을 좋아하기 위한 노력이 결실을 거두던 시절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좋으니 제발 다가오는 결혼만은 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하가 갑자기 나를 향해 술잔을 들어 보였다. 

“레즈비언은 아니지만, 원한다면 파혼하는 걸 도와줄 수는 있을 것 같은데요?”




9

살다 보면, 더러는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사실 인생의 대부분은 정말 하기 싫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일들을 꾹 참고 해내는 과정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자신을 철저히 지워가며 일해야 하는 건, 과히 즐겁지는 않지만 참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철저히 지운 채로 사랑을 나눈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트레이에 담겨 온 피묻은 이빨을 집어들어 의료폐기물 수거함에 던져넣는 건 쉽다. 최소한 라텍스 장갑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다. 나를 역겹게 하는 건 타인의 체액이 남기는 얼룩이 아니라, 이따금 진찰실 밖을 오가는 정하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매번 자괴감에 빠지곤 하는 나 자신이다. 매번 그런 식으로 나는 자신을 완전히 지워내는 작업을 매번 실패하곤 했다. 

착하지만 완고한 나의 약혼자는 내가 다른 남자와 침대에 누워 있는 꼴을 목격하기 전에는 절대로 순순히 나를 놓아줄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내 곁에 여자가 누워 있는 걸 목격한다면 그때는 어떨까. 

그 제안을 먼저 해온 쪽은 정하였다. 그 사실이 별로 놀랍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우리가 마주앉아 듣고 있었던 음악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불길하고 음험하며 사악한 기운이 감도는 곡 말이다. 씨엠스무스(CMSmooth), <포이즌>. 늘 그렇듯 팔짱을 낀 정하는 약간은 비웃는 듯한 특유의 차가운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마도 지독히 따분해하는 표정, 답답해하는 표정.  틀림없다. 그건 나만이 아는 내 여름의 표정이기도 하니까. 

가을이 되면, 이 사람과 차를 타고 낙엽이 수북히 쌓인 산 속으로 드라이브를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절벽 아래로 나를 떠밀었으면 좋겠다고. 낮아서 다칠 염려가 없는 절벽, 낙엽이 수북한 바닥에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정하를 상상하고 있자니 갑자기 가을이 찾아든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 에어컨 바람이 너무 강했다. 

“에어컨 바람이 너무 세죠? 자리 좀 옮길까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잠자코 있자 정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피차 손해 볼 거 없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다. 

사실은, 그런 꿈을 꿨었다. 깊은 가을, 절벽, 알지 못하는 곳으로 끌려와 절벽 아래로 내던져진 나. 어쩌면 내 머릿속을 뚫어버린 또다른 현실일까. 불길하고, 음험하고, 사악한 공기는 계속해서 불협화음과 함께 두텁고도 불편하게 우리의 주위를 에워싸며 그 부피를 확장해갔다. 그리고 결국……

정하와 나 사이에 이루어진 밀약은 어디까지나 상호간의 협정이었을 뿐이다. ‘서로에게 손해볼 것 없는’ 협정 말이다.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는 정하를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며 나는 전화를 걸어 약혼자를 모텔로 불러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짓을 했다. 내 카드로 모텔비를 결제한 것이다. 이제는 약혼자가 된 나의 전 남자친구는 먼저 모텔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나의 제안에 놀라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먼저 가서 기다리는 거 질색했잖아?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약혼한 이후로는, 정확히는 내가 프로포즈를 승낙한 이후로는 한 번도 모텔에 가지 않았다. 결혼을 약속한 후로, 그는 무척 느긋해졌다. 어쩌면 낚은 고기에 물을 주지 않는다는 그 오래된 격언이 진리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차라리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어서, 그 여자와 함께 있는 현장을 잡으면 훨씬 쉽게 파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어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소문나면 너한테 치명적일 수도 있어. ”

자신없어하는 나의 한 마디에 정하가 대꾸했다. 

“소문나게 하진 않을 테니 걱정 마요. 언니만 입 다물면 돼요. ”

“아마 그 사람, 이런 거 알고도 별로 놀라지 않을 거야. 파혼하려 들지도 않을 거고. ”

“그렇겠죠. 대부분의 남자들, 여자끼리 좋아하는 건 신경 안 쓰니까.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글쎄요? 어떻게 알겠어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그렇게 되묻는 정하에게,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널 보면 그냥 셋이서 같이 자자고 할 수도 있어. ”

“그럴까요. ”

묘한 뉘앙스의 대답이다. 정말로 셋이 자자는 건지, 아니면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되묻는 건지 정확히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

정하의 목소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지만, 묘하게도 문장의 말미에 약간의 장난기가 묻어나왔다. 분명 뒤이어 이어질 게 틀림없는 웃음소리를 중간에 뚝 끊어버린 듯한 그런 느낌이다. 어쩐지 몸이 떨려왔다. 정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양이한테 간식 줄 정도의 애정만 가지고 결혼하는 건 싫다고 하니까,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파혼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겠죠. ”

그러니까, 정하 또한 자신이 제의해서 실행에 옮긴 이 계획에 대해 전적으로 강한 확신을 갖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저 장난기가 발동했던 걸까. 순간, 그때까지는 별로 깊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던 정하의 직업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그녀는 치과의사다. 

넘쳐흐르는 침으로 범벅이 된, 더러워지고 부패한 인간의 욕망이 들락거리는 출구를 매일같이 들여다보며 메워지는 시간들,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시간들이 이루는 그녀의 일상을 생각한다. 그런 일상에 질린 참에 나라는 존재가 나타나서 이런 장난을 칠 기회를 만들어 준 거라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정하를 따라 여기까지 온, 아니 어쩌면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나 자신을 심하게 나무라지 않아도 된다. 그래, 조금쯤은 비겁해져도 괜찮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우리의 계획이 어그러졌음을 알리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불쌍한 내 약혼자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미안해. 갑자기 회사에서 긴급 회의 소집한다네?

“뭐야. 기껏 내가 먼저 모텔 잡아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 미안해. 어차피 결혼하면 하루에 열두 번도 더할 거잖아. 대신에 이번 주말에 끝내주게 해 줄게. 네가 제발 그만하자고 싹싹 빌 때까지 해 줄 테니까 오늘은 좀 봐줘. 

이것저것 더 따져물을 겨를도 없이 전화를 끊고 나니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못 온대요?”

어느 새 옷을 다 벗어던지고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은 정하가 그렇게 물어왔다. 언뜻 돌아보니 그녀는 얇은 홑이불을 덮은 채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뼈만 남은 듯 앙상한 상체가 그대로 드러나보였다. 나는 황급히 그녀로부터 몸을 돌려 창가로 다가가며 대답했다. 

“회사에서 긴급 회의 소집했대. ”

창가에 몸을 바싹 붙인 나는 커튼을 살포시 걷고 바깥을 살폈다. 문득 감옥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뒤이어 지독히도 푸르게 우거진 나무숲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 한복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싱그러운 녹색의 향연이었다. 

아무래도 번화가의 모텔을 골랐다가는 행여 아는 사람들의 눈에 띄어 시끄러워질 우려가 있었기에, 한적한 변두리의 모텔을 골랐다. 멋모르고 나와의 즐거운 정사를 꿈꾸며 유유자적 이 곳까지 도착한 내 약혼자는 나와 발가벗고 누운 난데없는 여자를 보고 기겁한다-그제서야 그는 내가 빼도박도 못할 바이섹슈얼임을 깨닫고 결혼을 포기한다. 이것이 정하가 기획하고 내가 동의한 후 함께 실행에 옮긴 계획이었다. 

그러나 변두리 모텔의 뒷마당에 우거진 싱그러운 초록색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는 동안,  이 허접쓰레기 같은 계획이 이런 식으로 어긋나 버린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꼼짝없이 이런 식으로 어떻게도 빠져나갈 길 없는 사회의 견고한 시스템에 종속되어야 하는 건가. 이따금 피워대는 담배 말고는 이렇다 할 출구조차 찾을 길 없는 그렇고 그런 날들을 떠올리자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문을 열고 싶었지만 이 곳은 모텔이었고 침대에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은, 그러나 섣불리 다가가서 만질 수없는 정하가 이불을 덮고 웅크리고 있었다. 아니 웅크린 건 아니다. 그녀는 여유롭게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 게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육년만이네요. ”

“여름이네. ”

나와 정하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목소리가 나온 탓에 두 개의 목소리는 기묘하게도 ‘육년만의 여름’으로 합쳐진 문장이 되었다. 정하는 피식 웃었고 나는 정하의 곁으로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육년만의 여름이라. 태어나 단 한 번이라도 여름을 제대로 만끽한 적이 있었던가. 정하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고 나는 리모컨을 집어들어 에어컨의 설정 온도를 2도 가량 낮추었다. 

“모텔비만 날린 꼴이네. 아깝게. ”

“이 참에 이런 데서 한가롭게 쉬는 것도 나쁘진 않죠. ”

어느 새 정하는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팔을 이마에 얹고 있다. 아무리 봐도 너무 말랐다. 인상도 가까이에서 보니 꽤나 성깔 있어 보이는 느낌이다. 이런 사람에게 끌렸었나 하는 후회가 물밀듯이 일면서 조금은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에어컨 바람이 만들어내는 인위적이고도 쾌적한 공기에 기어이 두통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그렇다. 내게 있어 여름은 에어컨이 없으면 숨쉬기조차 힘든 그런 계절이다. 나의 예민한 몸은 뜨겁고 끈적한 습기를 이겨내지 못한다. 

“담배를 육 년만에 피운 거야?”

나직한 목소리로 던진 나의 질문에 정하는 눈을 뜨지 않고 대답했다. 

“거의 그 정도 된 것 같아요. 논문 쓰면서 피운 게 마지막이었으니까요. ”

“힘들었겠다. ”

“뭐가요?”

“논문 쓰는 거. ”

“담배 끊는 것보단 쉬웠어요. ”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보통, 정신분석학에서, 입은 욕망을 의미하는데. ”

“뭐야, 그런 시시한 공부를 했었어요?”

“잠깐, 아주 잠깐. ”

그런 시시한 공부를 하다가 때려치우고 전혀 다른 전공을 택했지만 논문을 쓰지 못했다. 그런 쪽으로는 포기가 빠른 편이었다.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건, 나를 견디게 하는 것들이다. 나를 지탱하는 것들이다. 타인의 기준에 부합하는 삶, 그 삶을 이루는 일상의 순간순간에 나를 짓누르는 호흡곤란으로부터 잠시나마 나를 해방시키는 것들이다. 

이가 빠진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잇몸처럼 헤벌어진 마음을 어떻게 메워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그만 나가자. ”

“……. ”

“피곤하면,  좀 쉬다가 천천히 나와. 나 먼저 나갈게. ”

뭘 그렇게 서두르냐고 되묻지도 않고, 정하는 일어서려는 나를 붙잡아 끌어앉혔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익숙하게 나를 뒤로 젖혀 눕혔다. 졸지에 정하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버렸다. 

지금 이 순간, 불쌍한 내 약혼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해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어째서인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10

동성과의 섹스를 한 번이라도 시도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한다. 남녀간의 섹스, 정확히는 남녀간의 사랑이 얼마나 쉽게 이루어지는지를. 두 개의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그토록 쉽게 합쳐질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과 전율을 느낄 만큼 놀라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쉽게 이루어지는 것들은 나를 허무하게 한다. 

열대야의 시작을 앞둔 중복 무렵에 이르러 에어컨이 고장났다. 열기보다 더 견디기 힘든 습기가 나를 인정사정없이 공격해왔다. 에어컨 수리업체 연락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전화를 받은 수리업체 담당자는 일정이 밀려 있어 당장은 힘들 것 같다고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더 이상은 정하와 같은 공간에서 일할 자신이 없어진 나는, 안내데스크의 실장에게 사정이 생겨 더는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으니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 결과 현재 방학기간이라 환자가 많아 바쁘니 한달만 더 일해 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내 약혼자는, 결혼을 앞둔 내가 달라진 것을 눈치챘는지, 여느 때보다 훨씬 나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잠자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전적인 나의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그의 고약한 몇 가지 버릇은 둘째치고라도,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된 어떤 혐오감 -정확히는 그 대상이 분명치 않은-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결혼도 섹스도하고 싶지 않았다. 

짜증스러운 열기와 습기가 집중력을 온통 앗아가는 이 계절은, 다름아닌 여름이다. 그 어느 해보다 감당하기 힘든 녹색으로 어우러진, 나를 완전히 망가뜨린 여름이었다. 스틸 캐러밴(Still Caravan)의 들려주는 멋진 선율이나 페소아의 책으로 치유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이, 손쓸 수 없이 나는 망가져버렸다. 

그러던 차에, 나와 함께 일하던 치위생사의 애인은 교통사고로 그 짧은 생을 마감했다.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아가씨였던 내 직장 동료는 그 속수무책으로 떠나보낸 애인을 그리며 진찰실이 떠나가도록 통곡하다가 스텝실로 끌려들어와 그 곳에서 듣는 사람의 복장을 잡아뜯는 울음소리를 내며 절규했다. 나는 귀를 파고드는 그녀의 절규가, 마치 그녀의 절규가 아닌 나 자신의 절규라는 착각이 들어 그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그 몸서리쳐지는 하이톤의 사운드를 귓속으로 흘려부어야 했다. 그녀의 이별은 그렇게 종결을 앞두고 있었지만, 나의 이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으므로.  




11

복숭아의 달콤한 향기가 아찔하게 코끝을 스쳐간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강렬한 향기를 비강 깊숙히 빨아당기며 숨을 들이마셨다. 여름의 냄새다. 유일하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여름의 냄새다. 

칼날처럼 달려드는 직사광선을 피해 도망치는 기분으로 가방에서 새로 산 초경량 양산을 꺼내 펼쳐들었다. 직사광선 말고도 나를 도망다니게 만드는 것들이 여러가지로 많았다. 고약하고 아프고 덧없고 우울하고, 그러면서도 황홀했다고 말해야 할 시간들. 터무니없이 짧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다가 나는 나를 그냥 죽여버리고 싶어진다. 

부러진 칼날로 변한 직사광선이 초경량 양산을 뚫고 들어와 내 등 이곳저곳에 박히는 상상을 하며 가까스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면허를 따고 차도 있었지만, 나는 운전을 하지 않는다. 그 먼 옛날, 아파트 주차장에서 후진을 하다가 어린 꼬맹이를 치일 뻔한 후로는 일체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내가 한순간에 어린애를 죽인 살인자로 전락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깨달아버린 시점에서 나는 더 이상 운전대를 잡을 수 없었다.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

모처럼 만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렇게 물어오는 친구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녁은 월남쌈이었고, 나는 말없이 먹는 데만 집중했다. 

“물론 태원 씨가 네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긴 하지만. ”

그렇게 말한 친구는 내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 너한테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생각을 버려. 설령 그 사람하고 하는 게 너한테 썩 만족스럽지가 않다 해도. 남자는 다 그만그만해. 특별한 사람 없다니까?”

“우리 동네 편의점에서, 츄르 할인하더라? 너네 집 고양이가 환장한다는 그 사료 말이야. ”

“어머, 정말? 나 집에 가는 길에 너네 동네 좀 들러야겠다. 내가 집까지 태워 줄게. 어쨌든, 그래서 말인데.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따분한 여름이고, 네가 지금의 이 시기를 재미없어하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

“지금의 이 시기?”

“약혼 기간 말이야. ”

맙소사, 이 잔인한 여름이 나의 약혼기간이었구나. 아, 미쳐버릴 것 같다. 

그냥 성욕을 채우자는 건지 여자를 짓밟자는 건지 알 수 없는 섹스를 하고서는,  ‘나 꽤 괜찮지? 잘하지?’라고 말하며 희희낙낙하는 족속들. 아니 순수하게 혼자 만족하고 마는 건 그래도 관대하게 넘어가 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널 만족시켜 줬으니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으스대는 족속들은 욕지기가 치밀어오른다. 내 약혼자는, 물론 타고난 심성은 착한 편이다. 성미가 약간 거칠다는 것 정도는 그냥 참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잠자리에서는 저 역겨운 족속들과 같은 카테고리로 엮일 수 밖에 없는 남자다. 아마 정하 또한 내 약혼자와 한 번이라도 같이 자고 나면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정하와는 눈조차 마주친 적이 없다. 

정하는 실장으로부터 내가 조만간 그만두려 한다는 말을 전해들었는지, 그 후로는 나를 철저하게 투명인간 취급했고 나 또한 정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내 일은 어디까지나 치기구를 다루는 일이었지 사람을 다루는 일이 아니었기에, 치위생사들과의 지극히 사무적인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일하면서 입을 열 일이 거의 없었다. 

“참,  유민이가 너한테 아무 말 안 하던?”

“유민이가? 나한테 무슨 말을?”

유진이는 친구의 여동생인 치위생사의 이름이었다. 정하와 내가 일하는 병원에서 같이 일하고 있었으며, 교통사고로 애인을 잃은 치위생사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네가 관심뒀던 그 박선생 말이야. 박정하 부원장. 다음 달에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던데? 나한테 얘기하길래 너도 혹시 알고 있나 해서 물어봤지. ”




12

생김새가 날렵하고 쓰임새가 분명한 도구를 다루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내 안에 소리없이 깃드는 자괴감을 막아 준다. 내가 아직은 그럭저럭 유용한 인간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쨌든 그런 도구를 다룰 때 비로소 일다운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건 사실이다. 때로는 위험하지만, 위험하기 때문에 어쩌면 더 매력적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매력적인 사람은 위험하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말고는 그 위험에 당면한 당사자가 판단할 문제일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날카로운 도구를 다루면서 직면하게 되는 위험은 감수할 수 있어도, 날카로운 사람을 다루면서 직면하게 될 위험은 차마 감수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불장난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불장난으로 끝내는 게 마땅했다. 

끓어오르는 삼복더위의 열대야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나는 여동생의 집으로 피신해야 했다. 여동생과 제부는 난데없이 찾아든, 언니이자 처형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불청객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린 조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며 나는 뼛속 깊이 파고드는 통증을 잠재우고 또 잠재웠다.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긴 것을 확인하고 나면 어김없이 스틸 캐러밴을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 선율의 발랄하고 섬세하고 감각적인 디테일에 심취하다 보면, 뼈마디를 아리게 하는 통증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잊혀질 기억들이 불러오는 통증이었다. 

상견례는 애진작에 마쳤고, 결혼식은 가을에 올리기로 결정되었다. 

지금이라도 과거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진료기록을 시부모가 되실 어른들께 슬쩍 엿보이면 파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부질없는 발상을 해 보기도 하면서, 주말이면 어김없이 나를 끌고 모텔로 향하는 약혼자의 뒤를 군말없이 따랐다. 

약혼자 몰래 루프시술을 받은 지는 꽤 되었다. 

본의 아니게 정하와 함께 모텔에서 보낸 두어 시간 동안, 정하는 루프로 인해 갑작스럽게 찾아든 통증 때문에 괴로워하며 뒹구는 나를 한참이나 등 뒤에서 감싸안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줄곧 이어지던 침묵. 나는 정하의 그 침묵을 완벽히 이해했다. 그녀는 치기구를 다루는 치과의사 특유의 능숙한 기술로 침묵을 다루는 법을 아는 여자였다. 

의사인 그녀의 환자가 되어 입을 벌려보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로서 그녀가 얼마나 유능한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피폐해진 몸을 위로하는 기술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리고 여자들은, 어떤 극소수의 사람들의 내면에 성욕 이상의 욕구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안다 해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인정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녀의 손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시린 통증이 찾아들 때면, 나는 캔맥주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캔맥주는 때로는 칭다오였고 때로는 스텔라였다. 자꾸만 메어오는 목을 풀기에는 캔맥주만한 것도 없었다. 

저잣거리를 따라 걷노라면 자꾸만 풍겨오는 달디단 복숭아 향기를 애써 외면한다. 할 수만 있다면, 나를 둘러싼 이 시간, 이 여름을 통째로 부정해버리고 싶다. 




13

마침내 정하가 더 이상 병원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유민이로부터 전해 듣는 동안, 나는 그녀가 내 안색을 유심히 살피고 있음을 알았다. 순간, 처음부터 사람들이 모든 걸 눈치채고 있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모든 게 내 어리석은 실수였다. 

처음부터 정하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녀의 주위를 이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 친구가 아무리 주의를 주고 입단속을 시켰다 한들 이 약삭빠른 계집애가 입을 놀리지 않았을리는 만무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로 참담한 꼴이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가시는 거라고 했으니까, 아마 괜찮으실 거예요. ”

“지은 선생님은 어때? 좀 진정되셨어?”

나와는 달리, 다정한 연인을 날벼락 같은 참사로 하루아침에 잃은 그녀의 이름을 구태여 그 상황에서 거론해야 했던 건, 결코 악의가 아니었다. 유민이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괜찮지 않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질문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민이는 한참 만에 뜸을 들여 대답했다. 

“그렇게 쉽게 진정될 리가 없잖아요. ”

“하긴. ”

“그래도 진정될 거예요. 결국은. ”

그렇겠지. 따라 죽을 수는 없는 거니까. 

따라 죽을 것처럼 비통하게 울어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나를 대신해 내가 흘려야 할 눈물을 흘리고, 나를 대신해 내가 내질렀어야 할 절규를 내질렀던 그녀는 결국, 나를 대신해 진정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새로 부임한 부원장은 자그마한 체격에 소탈한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제법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어차피 나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일을 그만둘 예정이었으니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다. 정하와 내가 스쳐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했던 것처럼. 

정작으로 쉽사리 일상으로 돌아와야 할 나는 그렇게 쉽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4

그리고 그날 저녁, 마침내 에어컨 수리업체에서 보낸 사람들이 왔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 이미 약속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고서야 그들은 만족한 듯 유유히 사라져갔다. 에어컨은 다시금 쾌적하고도 인위적인 냉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 인위적인 냉기를 뒤로 한 채,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밖으로 나갔다. 

모기, 망가진 방충망, 일찍 상해버린 과일껍질과 음식 쓰레기에서 나는 지독한 악취가 아니고서는 이 여름을 여름이라 말할 수 없다. 찜솥을 방불케 하는 습한 대기를 뚫고 어딘가에서 어린아이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날카로운 익스플로러(치과기구의 일종)가 온몸을 찔러오는 듯한 착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사실은, 틀어막을 수만 있다면 내 허파를 틀어막고 싶었다. 정하는 떠났다. 사라졌다. 나는 정하를 가졌던 적도 없건만, 이렇게 허무하게 그녀를 잃었다. 오래 전 내 속에서 흔적없이 떨어져간 나의 아이처럼. 

어둠에 물든 녹색의 가로수 사이를 음울하게 점령한 것들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욕지기가 나도록 싱그러운 녹색을 따라 사라져갈 것들. 나의 여름, 또 하나의 여름, 그러나 이 잔인한 여름의 소멸은, 달력을 확인한 바로는 아직도 한달여 가량이 남아 있었다. 이토록 아득한 한 달이라니. 

대체 나더러 이 여름을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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