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상맞은 '생활의 지혜'로 언제까지 버틸까
개인 블로그에 불과한 공간이지만 쓰기 망설였던 주제다. ① 심각한 더위에 에어컨이 필수 가전이 돼버린 상황 ② 누진세 폐지 등 에어컨이 생존 이슈가 돼버린 상황에서 에어컨 없이 산다는 건 미련하고, 미련하고, 미련한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번주는 39도까지 올라간다는데!
에어컨 없이 살자는 거 아닙니다! (에어컨 없이 사는 필살기는 쭉 내리면 있어요~)
*이 글 쓰고 며칠 후 응급의학과 남궁인 선생님이 쓴 페북 글을 보게 됐어요. 노약자에게 더위가 어떤 영향을 주는 지 충격적이지만 이해하기 쉽게 써주셔서 공유했습니다.
"요즘 에어컨 얼마 안하잖아요. 사서 몇년만 써도 남는 장사예요. 삶의 질이 다르다니까요."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타박한다. 맞다. 물론 나는 기사에 등장하는 폭염 난민은 아니다. 월급을 털면 에어컨을 사고, 한여름 두 달 정도의 전기세를 감당할 수준은 된다.
근데 왜 에어컨이 없냐고? 별다른 의식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10년 전 에어컨이 없는 집에 이사왔고, 어쩌다 보니 쭉 없이 지내게 됐다. 그 사이 집을 한 번 옮겼는데 공교롭게도 이 집도 에어컨 없음. 내 집도 아닌데 10년 가까이 살게 된 복잡다단한 사연도 있다. 하여간 이 집에 이사오기 직전 살던 몇몇 풀옵션 원룸(이라고 해봤자 책상, 세탁기, 에어컨이 있던 학교 앞 건물)을 빼곤 에어컨을 가져 본 적이 없다.
① (당시만 해도) 어차피 2년 뒤면 이사갈건데, 요즘 에어컨 안 달린 집이 어딨나. 짐 만들지 말자.
② (당시만 해도) 8월 중에서 한 열흘만 더운데 적당히 참자.
③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큰 이유인) 지금 주문해봐야 더위 다 끝나고 설치될거고, 설치할 때 시멘트 가루 날리는 건 어떡하며, 평일에 설치되면 연차쓰고 올 수도 없고, 나중에 에어컨 있는 집으로 이사하면 처치는 어떻게 해야하나 같은 고민들.
④ (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는) 프레온 가스가 지구 온난화 주범이라는데 나라도 참자. 정 더우면 에어컨 나오는데 잠시 갔다가 오자.
사실 모든 건 불확실에서 비롯됐다. 변명같지만.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사실 아직도 없다) 에어컨이라는 '특수한' 물건을 사기가 어려웠다. 한 번 산다고 끝이 아니라 이사할 때마다 전문가가 다시 설치해야 하고, 주기적으로 청소도 해야 하는.
내가 이 집에 계약 기간을 넘겨 살지, 다음에 이사갈 집에 에어컨이 있을지, 그 사이에 내가 결혼해서 아예 스탠드 에어컨을 사는 일이 생길지, 회사를 계속 다닐지, 회사를 관두고 아예 모든 짐을 빼는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지 같은 고민을 했다.
물론 그럼에도 에어컨을 사도 아무 상관없었다. 까짓거 설치비 들어도 1년으로 나누면 한달 1만원. 못 낼 돈은 아니었다. 평일에 시간을 못 내면 설치 기사님과 연락해 주말에 할 수도 있었다. 에어컨이 필요 없으면 중고나라에 팔면 그만이었다.
그냥 늘 필요한 순간에 머뭇거렸고, 에어컨을 사려고 보면 주문이 밀려 설치가 늦어졌고, 일하는 곳은 보통 에어컨이 잘 나왔고, 너무 더우면 커피숍이나 쇼핑몰, 도서관 같이 에어컨이 잘 나오는 곳으로 피신갔고, 그러다보면 더위가 한풀 꺾였고, 에어컨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다. 다시 더워지면 주문이 밀려 있고…이 패턴의 반복이었다.
어찌보면 내 인생 궤적과도 비슷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발 내딛기를 주저하는 모습. 심지어 10년이 지난 지금 보면 그때의 고민은 부질없다. 나는 어찌어찌하여 10년째 같은 집에 살고 있고(그때 샀으면 10년 시원했다), 회사를 관두긴 했지만 여전히 밥벌이는 한다.
어찌됐거나 올해도 에어컨 사기는 글렀다. 더위가 좀 떨어지고 설치대란이 가시고 나면 11월 안에는 꼭 사리라 다짐했지만 어찌 될지…. 대신 누군가 보기엔 궁상맞은 방법으로 남은 여름을 보내겠지.
이왕 에어컨 없이 지낸 사연 고백한 김에 에어컨 없이 어떻게 사는지도 잠깐 소개해볼까? 일단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30분 정도까지로 10~11시간 정도다. 나머지는 에어컨이 정말 빵빵하게 나오는 대중교통과 회사에 주로 있다.
① 쿨매트
-10년간 두세 번 바뀌었던 히라가와 쿨매트. 방안 온도가 30도 초반 정도일 때는 그나마 시원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높아지면 무용지물.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세탁이 의외로 고되다. 2~3년이 지나면 내부에 들어있는 젤이 쪼그라들어서 새로 사야 한다.
-올해 구입한 냉수매트. 젤은 몸에 안 좋으니 냉수를 쓰라고 했는데, 알고보니 냉매라는 알 수 없는 화학약품이 들어가 있었다. 쿨젤매트보다 냉감이 좋다고 했으나 36도에서는 무용지물. 그냥 매트일 뿐.
② 아이스팩
-궁상맞아 보이겠지만 진짜 시원하다. 없으면 페트병에 물 넣어서 얼리면 된다. 대신 녹으면서 물이 나온다. 그래서 수건에 싸야 하는데 처음에는 덥다, 수건이. 나중에는 수건이 축축해서 뭔가 찝찝해진다.
-쿨매트에 올려놓으면 쿨매트도 약간 시원해진다. 물이 나와도 천으로 된 이불보다는 물에 젖을까 걱정을 덜 해도 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냉동실에 안 넣고 가면 그날 밤에 헬게이트 오픈!
③ 24시간 카페
-에어컨 난민이 나다. 커피점 주인과 알바생이 싫어한다는 그 에어컨 난민이 나다. 그래도 이것 저것 다양하게 메뉴를 시키고 너무 오래 앉아 있지 않으려고 애쓴다. 요즘 금요일밤에 자주 찾는 강남역 인근 24시간 카페.
-커피값 모으면 전기세와 비슷하다는 게 함정.
④ 저녁 샤워
-이건 더위 때문이라기 보다 운동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씻는 건데, 의외로 열이 식는다. 곧바로 더워지긴 하지만 아예 씻지 않을 때보다 체온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중학교 가정선생님은 차가운 물로 샤워하면 무슨 몸의 작용에 따라 다시 더워진다고 했지만, 그래도 뜨거운 물보다는 시원한 물로 샤워하는 게 좋다.
⑤ 찬물
-요즘 우리집 냉장고 현황. 밤에 찍어서 다소 괴기스럽게 나왔지만 500ml짜리 물을 넣어놨다. 원래 실온에 두고 먹었는데 요즘은 냉장고 필수. 저렇게 빡빡하게 넣으면 냉장고 효율이 떨어진다지만 집어넣다보면 욕심이 난다.
-더워서 잠이 깰 때 한모금 들이키면 여기가 천국. 행복은 멀리 있지 않는 건가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