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rryme Aug 01. 2018

'고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보다

취향은 의외로 확고하지 않다

'고수를 사랑하는 한국인의 모임'.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굳이 '한국인'이 왜 들어간거지? 여기서는 고수에 대한 고정관념이 반영됐다.

한국인은 고수를 싫어한다


고수는 미나리과의 식물로 독특한 향이 난다. 원산지는 지중해지만 현재 동남아, 중동, 유럽, 남미 등 전 세계에서 두루 먹는 작물이다. 경기도 파주, 강화도, 전북 등 일부 지역에서는 김치를 담가 먹을 정도로 자주 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고수(나물)가 뭔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한국 음식에서는 잘 안 쓰는 식재료다. 나만 해도 10여년전 베트남 쌀국수에서 처음 맛보고 기피했다.

냄비 뒤에 수북히 쌓여있는 식물이 고수. 이날 고수를 사랑하는 14명은 사진 속 고수의 3~4배 이상을 먹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고수를 쌓아두고 먹는 사람들을 만났다. 고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니.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 고수는 없어서 못 먹지만 차마 남에게 밝히기 어려운 입맛. 남은커녕 가족과 연인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입맛. 이런 비주류. 생 고수를 상추 먹듯이 씹어먹는 사람들. 대체 어디서?

남의집프로젝트에서 !


남의집프로젝트는 또 뭘까? 쉽게 말하면 자신의 집으로 낯선 사람을 초대하는 것. 한달에 1~2번 다양한 호스트들이 특정한 테마를 정해 일회성으로 자신의 집을 개방한다. 이를 보고 관심 있는 사람들은 방문 신청을 한다. 집주인(호스트)와 손님(게스트)를 중개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는 게 남의집프로젝트다.  


지난해 파일럿프로그램처럼 시작된 남의집프로젝트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한옥에 살면서 공간에 관심을 가질 때였다. 매번 "아, 재밌는 모임 하시네"하고 지나가다가 '고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나는 고수다' 공지를 보고 신청했다. 평소 남의집프로젝트에는 관심 있었고, 고수는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두 가지 모두에 도전해보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가 싶을 정도로 아득하다. 날 좋은 어느 날 낮잠자다 꾼 꿈이 아닐까. 고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니.

@남의집프로젝트

누군가의 집에 사람을 초대하는 일이기에 절차는 꽤 복잡했다. 먼저 네이버예약으로 일정기간까지 신청을 받고, 자기소개와 지원동기를 심사해(!), 합격자에게 통보해주면 일정 금액을 입금하면 된다.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고, 그들을 집에 들여야 하는 부담을 최소화해주는 장치였다.

버스에서 찍은 사진인데 그날 진짜 하늘이 예뻤다.

7월초, 꽤 더운 날이었다. 토요일 오후 4시라는 다소 어중간한 시간에 모이기로 했다. 여러모로 두근댔다. 모르는 사람을 만난다는 게 첫번째 이유였다. 사람을 자주 만나는 직업을 가졌지만 의외로 낯가림이 많은 성격이기에 낯선 사람을 만나려면 마음에 작은 돌덩이가 내려앉는 편이다.


고수를 못 먹으면 폐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두 번째 이유였다. 쌀국수에 떠다니는 작은 고수잎이나 과카몰리에 들어간 고수 정도는 먹을 수 있지만 전혀 고수를 사랑하진 않는데, 혹시라도 못 먹으면 호스트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마음이 무거웠다. 이후에 밝혀졌지만 완전 노파심. 나 알고보니 고수 너무 잘 먹음.

라오스에서 먹은 볶음밥. 작은 고수잎도 빼놓고 먹던 나다.

도착한 집에는 이미 10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있었다. 마이너함이 오히려 단단한 연대가 되는 걸까. 게스트가 7명, 호스트가 7명이었다. 고수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총출동했다고. 이미 집에는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이날 준비하신 음식은 열가지였다. 에피타이저로 준비한 양파구이까지 합치면 열한가지!! 가지말이까지 포함하면 열두가지!!!


1. 장언줄알았가지 (고수를 잔뜩 올린 가지구이)

2. 깜짝놀랐샐러드 (고수와 망고를 섞은 샐러드)

3. 고수부르스케타 (고수와 돼지고기를 올린 바게뜨)

4. 맛있어서 분해죽겠짜 (면보다 고수잎을 더 많이 넣은 분짜)

5. 고고붹숙 (고수 한달을 넣어 함께 찐 백숙)

6. 고수커리 (고수를 넣은 인도식 커리)

7. 미쳤꿍 (고수를 잔뜩 올린 똠얌꿍)

8. 셰프가우럭울어 (고수를 잔뜩 올린 우럭튀김)

9. 고수칵테일 (진 베이스에 레몬, 라임 등 시트러스 계열 과일즙을 섞고 고수를 넣은 칵테일)

10. 고수셔벗 (고수와 자몽즙을 섞어 얼린 디저트)


일단 음식이 나오기 전 다같이 고수를 다듬어 봤다. 다듬으면서 다들 앉은 자리에서 고수를 씹어 먹었다. 나도 살짝 먹어봤다. 의외로 괜찮았다. 음식 속에 들어있는 조각 말고 아예 뿌리채로 다듬어 먹으니 거부감이 없었다. 손에 묻은 진한 고수 향도 나쁘지 않았다.


호스트가 준비한 고수 관련 퀴즈도 풀고 각자 알고 있는 고수 상식도 풀어놨다. "한국에서도 고수 재배하는데 토양이나 기후가 달라서인지 고수 향이 강하지 않다더라" "고수는 외국인이 많은  00동에 가면 싸게 살 수 있다"….


고수를 좋아하게 된 동기, 고수를 좋아하는 모임을 만들게 된 계기, 고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어려움 등을 나눴다.


"회사 사람들하고 같이 태국 음식을 먹게 됐어요. 요리에 고수를 더 넣고 싶은데 취향을 모르니 큰 기대 없이 물어봤죠. '고수 더 넣어도 될까요?' 그때 '앗, 저도 고수 좋아해요' 라는 사람이 나타났고 '고수 오늘 처음 먹어봤는데 완전 끌리는 맛이네요' 라는 사람도 있었죠. 그렇게 모임을 만들고 한달에 한 번 만나 고수 요리를 해 먹어요."


"저희 남편은 고수를 못 먹어요. 그래서 고수 모임을 우리집에서 하는 날은 집에 늦게 들어와요."

우럭튀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수를 쌓아뒀다 (왼쪽). 오른쪽은 부르스케타와 가지말이.
고수와 함께 찐 백숙. 한 잔 제조에 10분 정도 걸리는 고급 칵테일.

매 메뉴마다 14인분 분량을 요리해 주셨기에 정말 배가 찢어질 때까지 신나게 먹었다. 식사량을 줄이려던 노력은 이날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칵테일 뿐 아니라 호스트께서 집에 있던 각종 주류를 제공해주신 덕분에 밤 11시 넘어서야 모임이 끝났다.


하루종일 음식 준비하느라 정신 없었을 호스트들, 모임 훨씬 전부터 메뉴 선정하느라 고생했을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길이 없었고,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설거지를 뒤로 한 채 떠나야 했고, 그 탓에 조금은 무거운 마음을, 또 기분 좋은 만남에 대한 기쁨 등 다양한 감정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때론 좋아하는 이유마저 없을 수 있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좋아하는 것에 빠져드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일을 내 삶에 어떻게 연결지을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을까.


이번 모임에서 크게 깨달은 게 있다. 나는 고수를 싫어하지 않고 잘 먹는다는 것. 취향은 확고한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바뀔 수 있다는 것. 의외로 나는 내 취향을 잘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또 한편으로 나는 과연 낯선 사람들과 모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됐다. 스스로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좋아하는줄 알았지만내 상상 속 취향은 아니었을까.

왼쪽은 고수를 올리기 전 분짜. 고수가 아닌 채소는 입에도 안대는 단호한 분들. 이제 고수 잎 몇 장 정도 올라간 건 기별도 안가더라.
참고로 남의집프로젝트는 일반적인 네트워킹 모임과는 다른 점이 있다. 남의집프로젝트 문지기인 성용님은 남의집프로젝트의 특징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① 익명성: 각자 평소 성격이나 직업, 성향 같은 것은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 취향과 관심사를 나눈다.  

② 일회성: 여느 네트워킹 모임과 달리 다음 만남을 기약하지 않은 채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낸다.


그래서 자기소개를 할 때 굳이 직업이나 배경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매 모임마다 주제가 있기 때문에 지원 동기가 더 중요하달까. 어찌보면 남의집프로젝트는 멤버끼리 밀접한 관계를 맺기 보다, 그날 하루 심도 있지만 가벼운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 같다. 덕분에 고수 모임 호스트와 인스타그램 친구지만, 애써 안부를 묻기보다는 서로의 게시물을 응원하는 관계가 됐다.


그럼에도 서로 대화를 나누다보면 직업이나 회사 같은 것들을 말하게 된다. 그런 배경을 말하는 게 불편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대신 그날 모임 주제에 따라, 주제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을수록 서로의 배경을 덜 궁금해하게 되는 것 같다. 결국 직업이나 회사가 아닌 '나라는 사람'에 대해 할 말이 많아야 하는 것이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10년간 에어컨 없이 여름 지낸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