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OS, 이성OS
나는 근래에야 내가 예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전까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민하다는 건, 겉으로 티가 날 만큼 반응을 드러내거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에서 땀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거나,
쩝쩝거리며 먹는 사람에게 “좀 오물오물 먹으세요”라고 말하거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이면 당장 치워야 속이 편한 사람이 있다.
심지어 호텔이나 리조트에 들어가기 전, 소독 티슈로 구석구석 닦아야만 안심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의 예민함은 좀 달랐다.
나는 표현은커녕, 그렇게 표현하고 싶을 만큼 예민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너무 과도하게 공감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땀 냄새야 사람이라면 날 수 있는 것이고,
그 사람도 미안한 마음으로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할 거라 생각한다.
땀난다고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아야 한다면, 그만큼 차별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쩝쩝거리는 사람을 보면, 혹시 나도 그렇게 먹는 건 아닌지 상상해본다.
그리고 반성한다.
어린아이들은 습관을 고치면 조용히 먹을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치악력이 약해져 혀로 씹게 되고, 그 때문에 소리가 커진다는 걸 떠올린다.
그렇게 생각하면 동정심이 생기고, 나는 턱을 스트레칭하며 내 습관을 점검한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나는 그것이 있는 ‘위치’를 기억한다.
그 자리에 있던 머리카락이 사라지면
“언제 치웠지? 누가 치웠지? 나는 치운 적이 없는데? 엄마가 치웠나?”
순식간에 수많은 생각이 스친다.
그래서 물건이나 쓰레기도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게 편하다.
호텔이나 공공장소에서 남이 쓰던 물건이 마음에 걸리면,
그때부터 생각이 꼬리를 문다.
호텔 방에 비치된 헤어드라이기가 미끄덩거리면, 닦아서 쓰면 된다고 ‘사고를 닫아버린다’.
왜냐하면 생각을 시작하는 순간, 이런 의문이 폭주하기 때문이다.
“왜 미끄덩거리지? 남자였을까, 여자였을까?
호텔 로션을 바르고 헤어드라이기를 만져서 그렇게 된 건가?
언제 그랬을까? 내가 체크인한 시간이면…”
이 모든 걸 따져 묻는 데 몇 초도 안 걸린다.
어릴 땐 크게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와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힘들어졌다.
나는 ‘좀 다른 인간’이었다.
사람들은 나처럼 살지 않았고, 나 역시 그들과 어울리기 힘들었다.
그들도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남을 의식하면서부터 나의 예민함으로 힘들어 졌다.
그래서 생각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려면, 나도 일반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나를 억지로 ‘다른 모습’으로 살게 했다.
마치 감투를 쓰고 있는 사람처럼,
본성을 감춘 채 사회 속에 섞여 살아갔다.
하지만 힘들었다.
자유롭지 않았다.
어릴 땐 괜찮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이 떨어졌다.
본성은 그대로인데, 겉으로 드러나는 관계를 꾸준히 유지해야 하니 너무 버거웠다.
나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입력되는 정보가 많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좁아야 하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많은 생각과 감성을 풀어낼 수 있는 취미나 일이 필요하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치명적인 문제가 드러났다.
다양한 사람들을 시시각각 상대하다 보니,
나는 모든 에너지를 쓰며 모든 정보를 입력하고 모든 대응을 했다.
그 대응의 최선은 ‘밝고 착한 사원’이 되는 것이었다.
회식 자리에서도, 회의 시간에서도,
무한히 들어오는 정보를 모두 소화하기 위해 배려를 기본값으로 두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했고,
나를 높은 도덕성 기준 위에 올려놓았다.
문제는, 그 높은 기준을 상대에게도 적용한 것이다.
상대도 그럴 거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그렇게 회사 생활은 작은 균열에서 시작해 무너졌다.
회사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적게 일하고 큰 성과를 누리고 싶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 승진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구조는 심각했다.
나는 이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한 여자 동료로부터 시작된 나의 자멸 이야기는… 그건 다음에 하겠다.
이대로는 죽을 것 같아 휴직계를 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제의 원인을 몰랐다.
그저 원망스러웠고, 잊고 싶었다.
오랜 휴식이면 회복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불면증은 나아지지 않았고, 무한한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증세가 심해졌다.
결국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고, 오랜 상담 치료로 조금씩 호전됐다.
그렇다고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다.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는 폭탄 같은 상태였다.
그러다 여행지에서 만난 4명의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알았다.
나와는 달리, 사람들은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둔감했다.
내 입장에서 보면 너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그게 ‘일반 사람’이었다.
충격이었다.
일행 중 한 명이 물었다.
“사람들과 있으면, 왜 그렇게 기빨리고 힘드세요?”
나는 대답했다.
“네 명이 있으면, 한 명을 볼 때 과거부터 현재의 감정 상태까지 모든 정보가 한 번에 밀려들어요.
그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사람까지 연속적으로.
대화를 하면서도 계속 한 명의 변화를 시시각각 비교하고 받아드리는 데
네 명이 동시에 대화하면 매트릭스처럼 얽혀서 기하급수적으로 반복되요..
그래서 단시간에 너무 에너지를 많이 써버리는 것 같아 힘들어요.”
그 말을 하면서 나를 알았다.
나는 정말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회사 생활이 힘들 수밖에 없다.
온통 사람과의 네트워킹으로 이루어진 구조에서,
나의 예민함은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게 한다.
회의는 그 출력이 배가 되어, 한 번 끝나면 탈진한다.
회식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예민함을 ‘OFF’로 할 수 있지만,
시끄럽고, 냄새나고, 대화가 끊임없는 환경에서는 OFF가 불가능하다.
공감이론 관점에서 보면, 나는 공감OS와 이성OS 모두 예민한 사람이다.
타인의 감정, 분위기, 미세한 감각 정보에 공감적으로 예민하면서도 논리, 효율성, 시스템적 오류에도 이성적으로 동시에 예민하다.
일반 회사원에게는 큰 단점이지만,
예술·창조·리더십 분야에서는 이 힘이 곱절로 발휘될 수 있다.
불행히도, 나는 잘못된 테크트리를 타고 고통받아 왔다.
그래서 내 나름의 방법을 만들었다.
혼자만의 시간 갖기, 과제 분리하기, 불필요한 관계 정리하기,
너무 열심히 하지 않기, 천천히 하기, 규칙적 운동, 규칙적 글쓰기,
그리고 나만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실현하기.
쳇, 이렇게 계획을 짜는 것도 예민함의 극치다.
그냥 대충 살자. 하루하루를 살자.
예민함은 내 본성이니 바꿀 수 없다.
그냥 받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