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론
우리는 오랫동안 공감을 획일적인 감정 기술로만 사용해왔다. 사회적 관계를 원활히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친절한 태도, 혹은 따뜻한 마음 정도로 여겨왔다. 친구가 울면 옆에서 따라 울어주고, 기쁜 소식에는 함께 웃어주는 것. 심리적 회복의 도구로, 혹은 공동체적 배려의 덕목으로 공감을 제한시켜 이해해왔다. 현대 사회는 공감을 때로는 고지능자의 특별한 능력, 혹은 치유 산업의 기술로 축소해 소비한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공감의 표피에 불과하다.
공감은 단순히 울면 같이 울어주는 동조가 아니다. 때로는 울음을 웃음으로 바꾸는 것이 더 큰 공감일 수 있다. 상대방의 의견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도 공감이 아니다. 오히려 그릇된 정책을 비판하거나 잘못된 길을 지적하는 것이야말로 더 깊은 공감일 수 있다. 또한 공감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상과 맥락에 따라 교미, 교감, 반응, 감동, 감응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지만, 모두 공감의 다른 얼굴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의 이타심조차 유전자의 자기 복제 전략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그의 시각에서 본다면 공감 역시 단순히 감정을 알아채고 유대를 형성하는 과정일 뿐, 생존 전략의 일환일 수 있다. 실제로 공감을 통해 인류는 집단 생활을 유지하고, 몸짓·언어를 넘어서 감정적 소통이라는 효율적인 방식을 발전시켰다. 공감을 통해 정신적 위로를 받고, 치유를 경험하며, 기억과 문화가 후손에게 전해졌다. 모두 생존에 유리한 진화적 전략이었다. 그러나 공감을 물질, 동물, 우주로 확장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수소와 산소는 반응하여 물을 만들고, 동물은 교감을 통해 천적을 피해 집단을 유지한다. 우주의 별과 은하는 서로의 중력을 주고받으며 질서를 형성한다. 결국 모든 존재는 각자의 방식으로 공감의 구조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감은 단순한 감정 기술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서로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존재는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드러난다. 영화 <숨겨진 얼굴>에서 주인공 벨렌이 밀실에 갇혀 외부와 단절되자, 더 이상 남자친구의 의식 속에서 그녀는 존재하지 못한다. 애완견도 주인의 관심과 보살핌이 없으면 존재가 희미해진다. 신선한 식재료도 양념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요리가 되지 못한다. 이렇듯 존재는 언제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공감은 단순한 심리적 기술이 아니라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공감이 작동하는 최소 단위는 의지와 반응이다. 의지는 존재하려는 내적 외침이며, 반응은 그 외침을 받아들이는 행위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은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즉, 의미를 향한 의지가 인간을 붙잡아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감이론은 여기에 중요한 전제를 추가한다. 의지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드시 반응이 있어야 공감이 발생한다. 아우슈비츠에서 프랭클을 지탱한 것은 단지 개인의 내적 의지가 아니라, 타인과의 교류, 기억될 수 있다는 기대, 누군가의 응답 가능성이었다.
공감이란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시선,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손길, 심지어 아무 말 없는 침묵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반응이 의지를 받아들이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의지가 반응을 만나야만 존재는 실체화되고, 그때 공감이 태어난다.
공감은 인간 사회의 전유물이 아니다. 동물, 식물, 물질, 심지어 우주까지 관통하는 근원적 구조다.
프란스 드 발은 『공감의 시대』에서 침팬지가 울고 있는 동료를 다독이거나, 코끼리가 죽은 새끼 곁을 떠나지 않는 행동을 사례로 제시한다. 이는 동물 역시 타자의 신호에 반응하며 공감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감은 동물에서 그치지 않는다. 햇빛을 받은 나뭇잎이 더 짙은 초록으로 반응하고, 물은 열을 받아 증발한다. 이는 자연의 공감이다.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설명한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는 대기, 바다, 토양, 생명체가 서로 반응하며 스스로를 조절한다고 말한다. 이는 생태적 차원에서 공감의 장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 깊이 들어가면 물리학에서도 같은 구조가 발견된다. 로젠블럼과 커트너가 『Quantum Enigma』에서 설명한 양자 얽힘 현상은, 멀리 떨어진 두 입자가 동시에 반응하는 신비한 작용이다. 마치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공감이 인간이나 동물만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우주적 단서다.
공감은 단발적 사건이 아니다. 직선적 교류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순환이다.
병상에 누운 친구는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내가 손을 잡아주는 순간 반응이 이루어진다. 친구는 고마움이라는 새로운 의지를 품고, 그 고마움은 다시 나에게 감동을 준다. 나의 감동은 또 다른 행동을 이끌어내며, 이 순환은 계속된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생명의 그물』에서 생명은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의 네트워크라고 설명한다. 나무, 바람, 동물, 토양이 서로 얽혀 생태계를 이룬다. 공감이론이 말하는 순환 구조는 바로 이 생명의 그물과 같다.
도킨스가 말한 밈 개념은 문화적 요소들이 뇌에서 뇌로 전파되는 복제 단위라는 점에서 흥미롭지만, 관계의 깊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밈이 단순히 흩뿌려진 씨앗이라면, 공감은 그것들이 서로 얽히고 뿌리내려 숲을 이루는 과정이다. 순환하는 공감은 생존을 넘어 존재의 장을 형성한다.
공감은 결국 감정의 기술도, 진화의 전략도 아닌 존재의 조건이다.
마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모든 참된 삶은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공감이론은 이 명제를 확장하여 말한다. 모든 존재는 만남 속에서만 드러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태양과 지구, 물과 공기, 원자와 원자, 별과 은하 모두가 공감 속에서 존재한다.
공감은 존재가 존재로 드러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최소 조건이다. 의지가 반응을 만나야만 존재는 실체화된다. 따라서 공감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