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감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성찰'을 넘어

by kamaitsra

나는 존재란 고립된 ‘나’의 사고에서 비롯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했다. 그는 끝없는 의심을 통해 확실성을 찾아내려 했고, 결국 자기 의식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 사유는 ‘내적 공감’에 머무른다. 나 자신이 나의 의지에 반응하는 최소한의 회로만이 작동한 상태다. 그것은 외부와의 관계가 차단된 고립된 존재의 확인일 뿐이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말하고 싶다. 존재는 내적 공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존재는 반드시 외부와의 상호 공감 속에서 실현된다. 즉, “나는 공감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성찰 제1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감각이 종종 우리를 속여 왔음을 기억한다. (…) 그러므로 나는 지금까지 감각을 통해 얻은 모든 것을 의심하기로 했다.”


그가 감각을 불신한 것은 당대의 엄밀한 철학적 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가상현실(VR) 체험은 역설적으로 그의 회의론을 새로운 방식으로 증명한다. 비록 전자기 신호일 뿐인 빛과 소리라도, 그것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여 ‘공감’을 만들어낸다면, 그 경험은 실체적이다. 즉, 가상현실도 공감이 성립하는 한 ‘존재한다’.


또한 데카르트는 『성찰 제3편』에서 이렇게 썼다.


“유한한 내가 어떻게 무한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무한한 존재, 곧 신이 내 안에 그 흔적을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감이론은 이를 달리 본다. 나의 존재는 유한하지만, 내가 공감하는 세계는 무한하다. 타자, 자연, 우주와의 공감이 무한히 확장되기 때문에, 인간은 ‘무한의 관념’을 경험한다. 굳이 초월적 신의 개입을 가정하지 않더라도, 공감장은 그 자체로 무한히 확장되는 질서다.


데카르트는 또 『성찰 제4편』에서 인간의 오류를 설명하며 이렇게 쓴다.


“의지가 지성보다 더 넓게 뻗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잘못 판단한다.”


나는 이 대목에도 이견을 제기한다. 오판의 근원은 의지가 지성을 넘어섰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지성이 공감의 무한성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성은 제한된 구조 안에서 작동하지만, 의지와 반응이 만들어내는 공감의 장은 훨씬 크고 방대하다. 오류는 의지의 과잉이 아니라, 지성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데카르트는 신을 완전한 존재로 증명하고, 외부 세계를 결국 승인했다. 그러나 공감이론에서 신은 존재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 이전의 최초의 의지다. 그것은 형태 없는 에너지이며, 모든 존재가 출발하는 근원적 울림이다. 또한 자아 역시 존재의 출발점이 아니다. 자아란 몸(공감 OS)과 세계의 반응이 교차하는 과정 속에서 파생된 결과일 뿐이다. 자아는 중심이 아니라 부산물이다.


결론적으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내적 공감의 최소한을 확인한 명제다. 그러나 공감이론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존재는 “나는 공감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더 큰 차원으로 확장된다. 존재는 혼자의 내적 의식이 아니라, 타자의 반응 속에서만 온전히 실현된다. 데카르트가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었다면, 공감이론은 그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상호작용적 존재론’의 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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