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와 이데아론
나는 오래된 고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가를 자주 묻는다. 플라톤의 『국가』와 이데아론 역시 그러하다. 그의 사상은 고대 그리스라는 맥락 속에서 태어난 만큼, 오늘의 민주적 현실과는 맞지 않는 요소가 많다. 계급의 구분, 철인 군주의 통치, 감각 세계를 단순히 모방으로 낮추어 보는 시각은 분명 시대적 한계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플라톤의 철학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공감이론은 그 질문에 새로운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의로운 국가를 논하며 인간 사회를 세 계급(지배자, 수호자, 생산자)으로 나누었다. 그는 철학자의 지혜를 기반으로 한 통치를 주장했지만, 그것은 단순한 정치학이 아니었다. 그가 더 깊이 탐구한 것은 “진정한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
그 대답이 바로 이데아론이다. 플라톤은 말한다.
“눈으로 보이는 것들은 변하고, 지각되는 것들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데아는 변하지 않고, 언제나 동일하며, 오직 이성으로만 파악된다.” (『국가』, 508d)
그에게 감각 세계는 불완전한 그림자였고, 참된 실재는 변하지 않는 이데아였다. 『국가』의 동굴 비유는 이 생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누군가가 속박에서 풀려나 태양을 본다면, 그는 처음에는 눈부심에 괴로워하겠지만, 마침내는 그것이 만물의 원천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국가』, 516a)
태양은 ‘선(善)의 이데아’를 상징하며,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원으로 제시된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통치해야 정의로운 국가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말한다.
“철학자들이 왕이 되거나 지금의 왕과 지배자들이 진정으로 철학을 한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국가와 인류는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국가』, 473d)
공감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부분적으로 공감되지만 동시에 새롭게 읽어야 한다.
첫째, 이데아는 초월적 실체가 아니라 공감의 원리다.
플라톤은 감각 세계를 모방으로 규정했지만, 공감이론은 감각 세계조차도 실재로 본다. 플라톤이 예시로 들었던 의자를 생각해 보자. 의자는 다양한 형태와 색상, 재료로 만들어 진다. 플라톤은 앉아 쉬게하려는 도구로써 의자의 이데아를 설명하고 외형, 색상 등은 감각적인 것으로 이데아의 모방이라고 언급했다. 공감이론에서는 앉아 쉬게하려는 도구의 의미를 의자의 의지라고 본다. 그리고 의자의 형태, 색상, 재료는 그 의지에 반응하여 공감한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의자의 외형과, 색상 등의 감각적인 요소 또한 이데아인 것이다. 공감이론에서는 모든 현상은 “의지 → 반응 → 공감 → 존재”라는 변하지 않는 구조 위에서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즉 이 구조를 뛰지 않는 물질, 생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원리가 바로 플라톤이 말한 영원불변의 이데아에 해당한다. 따라서 진정한 이데아는 감각 세계와 단절된 곳에 있지 않고, 모든 현상 속에서 작동하는 법칙으로 우리 앞에 존재한다. 모든 것은 진실되고 거짓이 없다. 차등이 없으며 동일한 기본 원리로써 진정한 이데아로 존재하게 된다.
둘째, 동굴의 비유는 다른 방식으로 읽혀야 한다.
플라톤은 동굴 속 세계를 허상으로 보았다. 그것은 감각 세계의 불완전한 그림자이며 진실된 태양의 이데아를 알지 못했던 우매함 속에 살고 있는 거짓된 삶이었다. 그러나 공감이론은 동굴 속 세계 역시 “공감이 성립한 실재”라고 본다. 동굴 속 사람들은 단지 태양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태양의 존재를 몰랐을 뿐이다. 그들은 태양과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굴 속 제한된 차원에 머물렀을 뿐이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모든 감각을 새롭게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가듯 공감이란 것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존재들을 알아가게 하는 진정한 감각인 것이다. 그렇게 태양과 동굴은 대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공감의 층위일 뿐이다. 태양만 보고 살던 사람들은 평생 동굴 속 삶을 몰랐을 것이다. 동굴을 공감하지 못해 그 존재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동굴 속 그림자도 누군가의 의지와 반응을 반영한다면 그것 역시 실재가 된다. 태양이 있었기 때문에 동굴이라는 공감의 존재가 생기는 것이고 동굴이 있기 때문에 태양이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플라톤이 말하던 태양만이 선의 이데아의 표본이 될 수 없다. 선악을 구분하듯 실재, 허상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 중심의 판단일 뿐 공감이론에서 보면 다양성에 근거한 세계를 유지하는 근본이 된다.
셋째, 국가의 이상은 철학자의 권위가 아니라 공감장의 확산이다.
플라톤이 언급한 철인군주의 통치 철학에 대해서 공감이론은 동의하지 않는다. 이상국가는 특정 계급의 지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공감 회로가 작동할 때 가능하다. 군주의 지혜가 아니라, 집단적 공감 네트워크가 정의를 가능하게 한다. 즉, 한 개인이 아니라 다수의 집단의 힘으로 이상 국가가 실현된다. 철인군주는 현실적이지 않는 이상적인 통치 방법으로 평가되는데 그 역시 시라쿠사 통치자 디오니시우스를 철인군주로 만들고자 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와 권력 다툼 속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위험에 빠져 일시적으로 노예로 팔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정치가 혼란하고 나라가 위태해 보여도 집단의 공감 시스템으로 결국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 존재하려는 의지는 끝없이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한발자국씩 나아간다.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까지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이처럼 엄청난 문영으로 번영한 것은 그 증명이다.
플라톤은 고대 세계에서 ‘진정한 존재’를 찾기 위해 이데아라는 개념을 세웠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개념을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이데아는 감각 세계와 단절된 혹은 구분되는 초월적 실체가 아니라, 모든 현상 속에서 작동하는 공감의 원리다. 모든 존재는 실존하기 때문에 공감을 하고 있다 할 수 있으며, 공감은 진정한 이데아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 또한 진정한 이데이다. 세상 어디에도 하찮거나 허상이거나 허구인 것이 없이 모두 진실되고 귀중하다. 플라폰이 언급한 동굴 속 그림자도 허상이 아니라, 공감이 성립한 하나의 실재다. 그것을 태양과 구분하여 차별을 두는 것은 인간 중심은 편협한 사고 일 뿐이다. 정의로운 국가는 철학자의 권위가 아니라, 의지와 반응이 순환하는 사회적 공감장에서 가능하다. 이데아를 감각적 세계, 불온한 사회 질서와 구분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오류에 빠기기 쉽다.
플라톤은 말했다. “이데아란 감각 세계 너머의 영원하고 변치 않는 실재이다.”
공감이론은 이렇게 답한다. “이데아란 모든 만물이 존재하는 영원하고 변치 않는 실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