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란 결과의 완성을 넘어 관계의 과정으로 나아가다.

아리스토텔레스와의 만남: 시대를 넘어선 철학적 대화

by kamaitsra

공감이론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의지에 반응하여 공감하며 존재한다.”

A의 의지에 B가 반응하여 서로 공명이 일어나면, 비로소 존재가 실현됩니다. 이 간단한 원리는 사실 세상 모든 만물에 내재된 기본 구조이자, 변하지 않는 법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원리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글을 쓰고, 정리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단순한 진리를 복잡한 세상에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공감해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제 오랜 숙제이자, 글쓰기를 멈출 수 없게 하는 동력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20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그의 『형이상학』을 꼼꼼히 들여다보았을 때, 저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대도, 언어도 다르지만 그의 사유 속에서 공감이론의 향기가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닮은 부분도 있고, 분명한 차이점도 있었지만, 중요한 건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 방식과 사유의 뼈대가 너무도 비슷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치 무인도에서 홀로 지내다 멀리서 흘러온 편지를 발견한 듯한 존재였습니다. 반가웠고, 신났고, 벅찼습니다. 글자 하나하나가 저에게 시대를 초월한 대화를 걸어오는 듯했습니다. 저는 그와 함께 논쟁했고, 동의했고,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감이론은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존재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단순한 물질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존재를 구조적 결합으로 파악하며, 네 가지 차원에서 설명했습니다.


형상(Form)과 질료(Matter): 모든 사물은 형상과 질료가 결합해야만 실재합니다. 대리석(질료)이 조각상의 모습(형상)과 결합해야 조각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 원인: 사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1) 질료(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2) 형상(그것을 그것답게 하는 본질), (3) 작용(누가 만들었는가), (4) 목적(왜 만들었는가)로 설명됩니다.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 모든 운동과 변화에는 원인이 필요하지만,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 즉 신적 원리를 상정했습니다.


이러한 체계는 2000년 동안 서양 철학을 지탱한 거대한 골격이 되었고, 신학과 과학의 언어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공감이론과의 대화: 닮음과 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와 공감이론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형상과 질료 ― 결과 중심 vs. 관계 중심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성된 결과물에서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조각상이란 형상과 질료가 합쳐진 결과물로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감이론은 결과보다 과정을 봅니다. 조각상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조각가의 의지와 대리석의 반응이 만나 이루어진 공감의 산출물입니다. 조각상이 사라지고 기둥이 되거나 땅 속에 묻히면, 그 순간 공감이 단절되어 ‘존재’도 달라집니다.


네 가지 원인 ― 다원적 설명 vs. 단일 원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네 가지 원인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반면, 공감이론은 이를 단순화하여 “A의 의지에 B가 반응하여 공감이 성립하면 존재한다”라는 하나의 원리로 귀결합니다. 네 가지 원인은 사실상 이 단일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설명됩니다.


부동의 원동자 ― 초월적 신 vs. 최초의 의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운동의 궁극적 원리를 “부동의 원동자”라는 신적 존재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공감이론은 이를 신이 아닌, “존재하려는 최초의 의지”로 해석합니다. 신적 손길이 아니라, 단순하고도 보편적인 원리—존재하려는 의지가 모든 것을 출발시켰다는 것입니다.


시대를 넘어선 친구


저는 공감이론을 정리하면서 늘 고민했습니다. “혹시 이와 비슷한 사유가 이미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불안을 달래준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그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공감이론의 윤곽을 이미 그려둔 친구였습니다.


물론 그는 존재를 “결과의 완성”에서 보았고, 저는 존재를 “관계의 과정”에서 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차이조차도 저에게는 소중했습니다. 마치 선배가 던져준 질문을 후배가 오늘의 언어로 다시 풀어내는 듯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게 철학적 스승이자, 시대를 초월한 벗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감이론은 그가 놓친 맥락을 이어 쓰는 작업이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언젠가, 먼 훗날 하늘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미소 지으며 제 글을 읽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승님, 존재는 결국 공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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