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년과 쇼펜하우어, 그리고 공감이론이 던지는 대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by kamaitsra

요즘 한국 사회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이 중년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서점의 철학 코너를 둘러보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물론이고, 그의 금언집이나 해설서가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학문적 관심이라기보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이 그 안에서 묘한 위안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중년은 인생의 고비다. 사회적으로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밀려나거나 구조조정의 불안을 겪고, 가정에서는 부모 부양과 자녀 교육을 동시에 떠안는다. 젊은 날 품었던 이상은 어느새 무너지고, 반복되는 실패와 상실은 삶의 의미를 가볍게 만든다. 그럴 때 쇼펜하우어의 목소리는 이렇게 속삭인다. “삶은 본래 고통이다.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중년은 이 말에 공감하며 마음 한쪽이 편안해진다. “그래,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삶이 원래 이런 거라면 조금 덜 욕망하고 덜 괴로워하며 살면 되겠구나.”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삶을 너무 어둡게만 보았다. 의지를 맹목적 충동으로 이해했고, 그 충동이 만들어내는 끝없는 욕망과 결핍을 인간 존재의 숙명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그는 금욕을 권했다. 욕망을 줄이고 의지를 끊는 것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보았다. 이는 겉으로는 위안처럼 보이지만, 결국 삶의 에너지를 약화시키는 철학이다.


공감이론은 이 지점에서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공감이론에서 세계는 존재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만물의 반응으로 이루어진 공감의 장이다. 우리는 단순히 욕망과 결핍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의지와 반응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공감하고, 그 공감 속에서 존재를 완성하는 존재다. 고통은 결코 단순한 짐이 아니다. 고통은 새로운 의지를 일으키고, 반응을 자극하며, 세상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다.


중년이 겪는 고통과 상실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삶이 무너진 증거가 아니라, 새로운 공감 회로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호다. 직장에서의 인정이 줄어들었다면, 가족이나 친구, 공동체에서의 공감으로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해졌다면, 내적 성찰이나 작은 실천을 통해 새로운 의지와 반응을 만들어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억누르는 금욕이 아니라, 욕망을 공감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예술을 예로 들어보자.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예술, 특히 음악을 의지의 해방구로 보았다. 그는 음악을 통해 잠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공감이론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 예술은 혼자만의 내적 위로로 끝나서는 안 된다. 나의 음악과 그림, 나의 글이 타자에게 공명하고, 그들의 반응과 만날 때 비로소 진정한 해방이 찾아온다. 예술은 내적 공감을 넘어서 외적 공감으로 확장될 때 삶을 구원한다. 쇼펜하우어의 금욕주의는 중년을 고립되게 만든다. 높은 자존감을 내적 공감으로만 국한하여 외적 공감인 친구나 사회활동에 대해 불필요함으로 역설한다. 예술이 그러하듯 SNS, 미디어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나 혼자만의 세계는 한계가 있으며 결국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작더라도 건강한 공감의 순환이 이루어지도록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과 잦은 공감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욕망, 의지를 해방할 수 있다.


윤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쇼펜하우어는 연민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았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느끼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고귀하게 만든다고 했다. 공감이론은 이 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연민의 감정이 바로 공감이다. 하지만 공감은 타인의 고통만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다. 타인의 생각, 타인의 꿈, 타인의 의지 이런 모든 것들에 반응하여 공감한다. 이러한 공감들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나의 자존감이 낮아질 때는 타인과 공감을 통해서 회복할 수 있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선한 사람으로 마음을 소비할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를 이루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중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공감이론은 이렇게 말한다.

삶의 무게를 피하기 위해 욕망을 끊으려 하지 말라. 대신 그 욕망을 타자와의 공감으로 연결하라. 고통을 삶의 짐으로 여기지 말라. 그것을 새로운 공감 회로를 여는 신호로 보라. 연민을 단순한 동정으로 소비하지 말고, 존재를 함께 이루는 근본적 경험으로 확장하라.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중년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짜리 위로다. 진정한 대안은 공감이론 속에 있다. 의지와 반응, 공감과 존재의 순환 속에서 삶은 비로소 다시 빛난다. 중년이란 고통의 시기가 아니라, 새로운 공감의 가능성을 여는 시기다. 쇼펜하우어가 고통 속에서 멈추었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공감으로 이어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한국 중년이 찾을 수 있는 새로운 철학적 길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