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진화론 5장
설날 저녁이었다.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앉았다. 할아버지가 TV 뉴스를 보시다가 혀를 차셨다. "요즘 젊은 애들은 근성이 없어. 조금만 힘들면 그만둔다니까.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조카가 스마트폰에서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 시대가 다르잖아요. 지금은 참고 버티는 게 미덕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예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으셨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시대가 바뀐다고 사람 본성이 바뀌나."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앉아서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재미있는 역설이 펼쳐지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조카는 같은 종이다. 호모 사피엔스. 심지어 혈연관계다. 할아버지의 유전자 일부가 조카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치 다른 종처럼 대한다. 마치 별종이라 생각하며 한심한 듯 바라본다.
할아버지 눈에 조카는 나약하고 게으르고 배부른 소리를 하는 낙오자처럼 보였다. 조카 눈에 할아버지는 고집 세고 시대착오적이고 답답한 꼰대처럼 보였다. 같은 종인데 왜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까.
문득 때 묻은 거울이 떠올랐다. 얼룩지고 흐릿한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 문제는 거울이지 얼굴이 아닌데 말이다.
이 세대 갈등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환경이 다르다. 할아버지는 1950년대 전쟁 직후의 폐허 속에서 태어났다. 조카는 2000년대 초고속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시대에 태어났다. 50년이라는 시간 간격. 같은 한반도 땅이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만약 오늘날의 70대 노인과 동일한 DNA를 가진 개체가 2025년에 태어났다면 어떨까. 분명 지금의 20대와 유사한 성향으로 자랐을 것이다. SNS를 하고, 의미를 찾고, 번아웃을 호소하고, 워라밸을 중시했을 것이다. 반대로 지금의 20대와 동일한 DNA를 가진 개체가 1950년에 태어났다면 어떨까. 분명 지금의 70대와 유사하게 굶주림을 견디고, 하루 16시간 노동을 참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을 것이다. 즉, 지금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주어진 환경이 달랐다면 또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이것이 공감이론의 핵심이다. 유전자는 운명이 아니라 가능성의 스펙트럼이다. 환경이 그 스펙트럼 중 어느 부분을 발현시킬지 선택한다. 생명의 존재하려는 의지가 환경의 신호에 반응하고, 그 반응이 반복되면서 공감이 형성되고, 그 공감이 굳어져 어떤 존재가 된다. 같은 DNA라도 환경이 다르면, 의지-반응-공감의 조합이 달라지면, 발현 스펙트럼이 완전히 달라진다.
유전자를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사람들은 유전자가 우리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키, 체형, 성격, 지능. 모든 게 태어날 때 정해진다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란성 쌍둥이 연구를 보자. 완전히 동일한 DNA를 가진 두 사람. 하지만 한 명은 도시에서 자라고 한 명은 시골에서 자랐다. 30년 후 재회했을 때 둘은 달랐다. 키가 달랐고, 체중이 달랐고, 성격이 달랐고, 심지어 질병 발생률도 달랐다. 같은 DNA인데 왜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 답을 준다. DNA 염기서열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유전자가 켜지고 어떤 유전자가 꺼지는지, 그 발현 패턴은 환경에 따라 극적으로 달라진다. DNA 메틸화, 히스톤 변형. 환경이 유전자 스위치를 조작한다. 같은 악보라도 어떤 음표를 연주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곡이 되듯이.
초파리 실험이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초파리 유충을 서로 다른 온도에서 키운다. 25도에서 자란 초파리는 날개가 크다. 18도에서 자란 초파리는 날개가 작다. DNA는 동일하다. 하지만 온도라는 환경 변수가 날개 크기라는 표현형을 결정한다.
나비는 더 극적이다. 계절형 다형성(seasonal polyphenism)이라는 현상. 봄에 나온 나비와 여름에 나온 나비가 색깔과 무늬와 크기에서 완전히 다르다. 봄 나비는 연한 녹색에 가깝고 작다. 여름 나비는 짙은 갈색에 가깝고 크다. 왜일까. 포식자 회피 전략이다. 봄에는 새순이 연하니 밝은 색이 위장에 유리하다. 여름에는 잎이 짙으니 어두운 색이 유리하다. 같은 종이지만 환경 신호에 따라 완전히 다른 외형으로 발현된다.
분류학자들은 과거에 이들을 서로 다른 종으로 분류하곤 했다. 외형이 달랐으니까. 하지만 DNA를 분석하자 동일했다. 교배도 가능했다. 같은 종이었다. 단지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 것뿐이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같은 종, 호모 사피엔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환경에 따라 발현이 극적으로 달라진다. 1950년대 한국인과 2020년대 한국인. DNA는 거의 같다. 하지만 두 집단 사이의 차이는 종종 다른 종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크게 느껴진다.
공감이론으로 보면 이것이 더 명확해진다. 유전자는 악보다. 환경은 지휘자다. 의지는 연주자다. 같은 악보라도 어떤 지휘자가 어떤 템포로, 어떤 강약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음악이 나온다. 연주자의 감정과 숙련도에 따라 같은 곡도 다르게 들린다. 유전자라는 악보는 가능성만 제공한다. 실제로 어떤 음악이 연주될지는 환경이라는 지휘자와 의지라는 연주자가 결정한다.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본다. 1955년. 전쟁이 끝난 지 2년. 서울은 폐허였다. 건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판잣집에서 살았다. 겨울에는 틈새로 바람이 들어왔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도 따뜻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열 살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까.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시장에 나갔다. 리어카를 끌었다. 짐을 날랐다. 밤 열 시까지 일했다. 일요일도 없었다. 명절도 없었다. 쉬면 돈을 못 벌었고, 돈을 못 벌면 굶었다.
배고픔은 일상이었다. 아침은 거를 때가 많았다. 점심은 주먹밥 하나. 저녁도 보리밥 한 그릇이 전부였다. 고기는 명절에나 먹었다. 그것도 작은 조각 하나.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랬으니까. 이게 정상이었으니까.
이런 환경이 할아버지의 뇌를 만들었다. 신경과학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만성적 생존 스트레스는 편도체를 비대하게 만든다. 위험 감지 시스템이 과활성화된다. 동시에 전전두엽 피질, 특히 장기 계획과 추상적 사고를 담당하는 영역은 상대적으로 발달이 억제된다. 당장 오늘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지, 10년 후를 계획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할아버지에게 각인된 공감 코드는 '인내', '희생', '가족 중심'이었다. 힘들어도 참는다. 개인보다 집단이 중요하다. 나보다 우리가 먼저다. 지금은 고통스러워도 나중을 위해 견딘다. 이것이 생존 전략이었다. 실제로 작동했다. 이렇게 살아야 살아남았다.
조카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본다. 2005년. 아파트. 방 세 개에 화장실 두 개. 거실에는 50인치 TV. 냉장고는 항상 음식으로 가득했다. 겨울에는 보일러를 틀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틀었다. 배고픈 적이 없었다. 추운 적도, 더운 적도 없었다.
조카는 다섯 살부터 학원을 다녔다. 영어 유치원에서 시작해서 초등학교 때는 수학, 영어, 피아노, 미술, 태권도를 배웠다. 중학교 때는 학원 스케줄이 학교 스케줄보다 빡빡했다. 밤 10시에 집에 오는 날이 많았다. 왜?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뒤처지면 안 되니까.
하지만 배고프지는 않았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없었다. 대신 다른 스트레스가 있었다. 경쟁. 비교. 평가. SNS를 열면 친구들의 화려한 일상이 보였다. 해외여행 사진, 좋은 성적표, 멋진 외모. 끊임없는 비교. 나는 뭐하고 있나.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이런 환경이 조카의 뇌를 만들었다. 신경과학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만성적 사회적 비교 스트레스는 전방 대상피질을 과활성화시킨다. 사회적 배제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진다. 보상 회로도 재조정된다. 물질적 생존은 당연한 것이 되고, 대신 사회적 인정, 자아실현, 의미 추구가 핵심 동기가 된다.
조카에게 각인된 공감 코드는 '선택', '의미', '자기표현'이었다. 무조건 참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의미 없으면 하지 않는다. 나를 표현하고 싶다. 나만의 길을 찾고 싶다. 이것이 생존 전략이었다. 실제로 이 시대에는 이렇게 살아야 살아남는다.
같은 종이다. 같은 DNA를 공유한다. 하지만 환경이 달랐다. 할아버지는 결핍의 환경에서 생존 공감을 학습했다. 조카는 풍요의 환경에서 의미 공감을 학습했다. 같은 종이지만 다른 공감장에서 자랐다. 그래서 서로가 낯설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할아버지의 DNA를 가진 사람이 2005년에 태어났다면? 분명 조카와 비슷했을 것이다. SNS를 하고, 워라밸을 중시하고, 의미를 찾고, 번아웃을 호소했을 것이다. 반대로 조카의 DNA를 가진 사람이 1955년에 태어났다면? 분명 할아버지와 비슷했을 것이다. 하루 16시간 일하고, 배고픔을 참고, 가족을 위해 희생했을 것이다.
이것이 공감 스펙트럼이다. 유전자는 고정된 운명이 아니라 가능성의 묶음이다. 어떤 유전자를 켜고 끌지는 환경이 결정한다. 그 스위치를 밀어 올리는 힘은 존재하려는 의지다. 기후, 자원, 정보 밀도, 사회적 압력이 달라지면 의지의 벡터가 달라진다. 반응의 패턴이 달라진다. 결과적으로 발현형이 완전히 달라진다.
공감이론의 언어로 표현하면 이렇다. 유전자는 환경과 논쟁하지 않는다. 유전자는 환경과 공감한다. 환경이 신호를 보내면 유전자는 그에 맞춰 반응한다. 그 반응이 반복되면 공감이 형성된다. 그 공감이 굳어지면 특정한 존재 양식이 된다.
세대 충돌을 다시 보자. 이것은 단순한 가치관 차이가 아니다. 공감의 위상차다.
70대는 '해야 산다'는 벡터가 내부에 깊이 박혀 있다. 의지가 먼저 발동하고 반응이 즉각적이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망설이면 죽었다. 그래서 빠르게 결정하고 빠르게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일단 하고 본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해결한다.
20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먼저 결정한다. 선택지가 너무 많다.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의미를 먼저 따진다. 이게 나한테 의미 있나. 이게 내가 정말 원하는 건가. 신중하게 고민한다. 때로는 너무 오래 고민해서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두 집단은 의지에서 반응까지의 간격이 다르다. 반응의 민감도가 다르다. 공감의 확장 방식이 다르다. 같은 종인데 공감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마치 같은 주파수의 파동이지만 위상이 180도 어긋나면 서로를 상쇄시키듯이.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도덕적 판단으로 흐른다. 70대는 "요즘 젊은이들은 나약하다, 게으르다, 배부른 소리한다"고 말한다. 20대는 "꼰대들은 고집 세다, 시대착오적이다, 이해 못 한다"고 말한다. 둘 다 상대를 잘못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공감이론으로 보면 이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환경-의지-반응 조합의 차이다. 70대의 반응 패턴은 1950년대 환경에서 최적이었다. 20대의 반응 패턴은 2020년대 환경에서 최적이다. 둘 다 옳다. 각자의 환경에서는.
문제는 환경이 바뀌었는데 서로가 상대의 환경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70대는 2020년대의 초연결 정보 과잉 경쟁 사회를 몸으로 겪어보지 못했다. 20대는 1950년대의 절대 빈곤 생존 위협 사회를 몸으로 겪어보지 못했다. 경험하지 않은 환경은 상상만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갈등이 지속된다. 하지만 이것도 진화의 일부다. 환경이 변하면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공감 코드로 태어난다. 이전 세대와 충돌한다. 하지만 결국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는다. 이것이 진화의 방식이다.
이제 종족 간 차이를 보자. 서양인과 동양인은 분명히 다르다. 외모부터 다르다. 피부색, 눈 색깔, 체형. 이것은 유전적 차이다. 수만 년 동안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자연선택 압력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외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행동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다. 서양인은 직선적이다. 명확하다. 예스 아니면 노다. 개인주의적이다. 나의 권리와 자유를 중시한다. 동양인은 맥락적이다. 상황을 본다. 때에 따라 다르다. 집단주의적이다. 우리의 조화와 관계를 중시한다.
이것은 DNA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랜 환경 순환이 만들어낸 공감의 방향성이 다르다. 공감의 산출물은 오랜 시간 공감이 누적되어온 결과물이다. 다른 환경에서 다른 의지로 환경에 반응에 의해 공감되어 왔다. 그렇게 공감되 결과가 현재 서양인과 동양인이다. 오랜 시간 공감된 결과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서양은 어땠을까. 넓은 대륙. 이동의 역사. 수렵과 목축. 개인이 중요했다. 사냥감을 쫓아 이동할 때 개인의 판단과 능력이 생존을 결정했다. 새로운 땅을 개척할 때 개인의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강한 의지, 직선적 반응, 개인 중심 공감 구조가 발달했다.
동양은 어땠을까.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 정착 농경. 벼농사. 집단이 중요했다. 논에 물을 대려면 마을 전체가 협력해야 했다. 수확을 하려면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유연한 반응, 맥락적 판단, 집단 중심 공감 구조가 발달했다.
이것이 수천 년 반복되면서 문화로 굳어졌다. 문화는 다시 뇌를 만들었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서양인과 동양인의 뇌 활성화 패턴이 실제로 다르다. 같은 그림을 보여줘도 서양인은 중심 대상에 집중하고, 동양인은 배경과 관계에 더 주목한다.
외모도 단순한 미학이 아니다. 효율적 공감 도구로 진화했다. 생각해보자. 작은 집단 시대에는 빠르게 '우리'와 '타자'를 구별해야 했다. 같은 집단인지 다른 집단인지를 0.1초 만에 판단해야 생존에 유리했다. 시각 신호, 즉 외모가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구별 도구였다.
피부색, 체형, 얼굴 구조. 이런 특징들이 '우리/타자' 구분의 에너지 비용을 낮추는 방향으로 발현되었다. 같은 환경에서 오래 산 집단은 비슷한 외모를 공유했다. 이것이 신뢰의 신호가 되었다. 다른 외모는 다른 집단의 신호였다. 경계의 신호였다.
과거 수만 년 동안 이 신호 체계는 강력하게 작동했다. 하지만 최근 수백 년, 특히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세계화가 진행되었다. 다른 외모의 사람들이 한 도시에서 함께 산다. 거대한 단일 공감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외형의 신호 기능이 약화되었다. 소집단 변이, 즉 이상치(outlier)의 존재 비율이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작은 마을에서 조금 다른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이 혁신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집단이 되었다. 변이가 묻힌다. 평균으로 회귀한다.
전 세계의 발현이 표준화되는 추세다. 서울이나 뉴욕이나 런던이나 도쿄나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음악을 듣고, 비슷한 가치를 추구한다. 고전적 생물학적 진화, 즉 작은 집단에서의 유전적 분화는 점점 어려워진다.
대신 새로운 진화가 시작되었다. 기술 기반의 문화적 진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인간. 소셜미디어에 최적화된 인간. AI와 협업하는 인간. 기술 친화형 인간이 새로운 이상치가 되었다. 하지만 이 이상치는 네트워크 효과로 빠르게 확산된다. 곧 뉴 노멀이 된다.
인간의 적응 능력을 생각해보자. 놀랍다. 에스키모는 영하 40도의 북극에서 산다. 베두인족은 영상 50도의 사막에서 산다. 티베트인은 해발 4,000m의 고산지대에서 산다. 같은 호모 사피엔스인데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환경에서 생존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새처럼 날개가 없다. 고래처럼 먼 바다를 헤엄칠 수도 없다. 물리적 능력은 제한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다양한 환경에서 살 수 있을까.
도구다. 초기 지구처럼 지금의 지구도 급변한다. 기후 위기, 자원 변동, 도시 생태계의 급격한 변화. 인간은 환경이 급변할 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진화시켰다. 장거리 이동. 두 발로 걷기. 지구력. 그리고 무엇보다 환경을 재구성하는 지능.
공감이론으로 보면 도구는 확장된 공감 기관이다. 옷은 기후와의 공감이다. 추운 곳에서는 두꺼운 옷을 입어 체온을 유지한다. 더운 곳에서는 얇은 옷을 입어 열을 발산한다. 주거는 지형과의 공감이다. 눈이 많은 곳에서는 경사진 지붕을 만든다. 더운 곳에서는 통풍이 잘 되는 구조를 만든다.
네트워크는 정보와의 공감이다. 전화, 인터넷, SNS.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정보를 공유한다. 경험을 전달한다. 집단 지성을 형성한다. 인간은 도구를 통해 공감 가능한 환경 범위를 넓힌다. 생태적 지위(niche)를 확장한다. 그래서 지구 거의 모든 곳에서 살 수 있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모든 종은 허용 가능한 환경 스펙트럼을 가진다. 어떤 종은 넓고, 어떤 종은 좁다.
북방 유목민을 보자. 몽골,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이들은 끊임없이 이동했다. 계절에 따라, 목초지를 따라, 수천 킬로미터를 옮겨 다녔다. 이런 생활 방식은 넓은 적응 스펙트럼을 요구했다. 더위와 추위. 건조와 습함. 풍요와 결핍. 모든 것에 대처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의 유전자는 유연하게 발현되도록 진화했다. 넓은 스펙트럼. 이들은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갔다. 원주민이 되었다. 일부는 북극권으로 가서 이누이트가 되었다. 일부는 남쪽으로 내려와 한반도에 정착했다. 일부는 서쪽으로 가서 동유럽에 정착했다. 같은 조상인데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발현되었다.
반대로 좁은 기후권에 최적화된 집단도 있다. 열대 지역에서만 살아온 집단. 온화한 해양성 기후에서만 살아온 집단. 이들은 갑작스러운 한랭, 고도, 수심 변화에 취약하다.
뉴스를 본 적이 있다. 홍콩에서 온 관광객이 한국에서 영하 5도의 날씨에 동사했다는. 한국인에게 영하 5도는 춥지만 치명적이지 않다. 적절한 옷만 입으면 된다. 하지만 홍콩인에게는 달랐다. 홍콩은 아열대 기후다. 겨울에도 10도 이상이다. 몸이 추위에 적응되어 있지 않았다. 영하 5도는 스펙트럼을 벗어났다.
인간 전체로 보면 어떨까. 수심 40m 이하에서는 특별한 장비 없이 오래 있을 수 없다. 압력 때문이다. 해발 8,000m 이상에서는 오래 살 수 없다. 산소 부족 때문이다. 영하 60도나 영상 60도에서는 장비 없이 생존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생존의 문제가 아니다. 공감 불가의 문제다. 공감이론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공감이 불가능한 환경에서는 존재가 불가능하다. 환경이 신호를 보낸다. 온도, 압력, 산소 농도. 몸이 반응을 시도한다. 대사, 혈류, 호흡. 하지만 반응 범위를 벗어나면 반응 자체가 불가능하다. 반응이 없으면 공감이 형성되지 않는다. 공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존재 가능 범위는 곧 공감 가능 범위다. 이것이 핵심이다.
작은 집단 이야기를 해보자. 진화는 왜 국지적으로 점화되는가. 잠시 진화의 발현을 되집자.
큰 집단을 생각해보자. 100만 명이 사는 도시. 그중 1%가 특이한 변이를 가지고 있다. 1만 명이다. 많아 보인다. 하지만 99만 명의 평균 속에 묻힌다. 변이가 확산되기 어렵다. 주류에 흡수된다.
작은 집단을 생각해보자. 100명이 사는 마을. 그중 1%가 특이한 변이를 가지고 있다. 1명이다. 적어 보인다. 하지만 100명 중 1명은 눈에 띈다. 무시할 수 없다. 그 사람이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한다. 배운다. 20명이 따라하기 시작하면 20%다.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집단이 된다.
이것이 8대2 법칙이다. 소수(20%)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의지의 편차. 다수(80%)가 공명하며 따라온다. 반응의 집단화. 공감 에너지가 임계치를 넘는 순간 창발이 일어난다. 완전히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새로운 종의 탄생도 같은 구조로 설명된다. 작은 집단이 다른 환경에 고립된다. 섬, 골짜기, 호수. 환경이 신호를 보낸다. 온도, 먹이, 포식자. 생명이 반응한다. 처음에는 미미하다. 하지만 반복된다. 세대를 거듭한다. 공감이 축적된다.
소집단에서는 변이의 비중이 크다. 조금 다른 개체가 주목받는다. 번식에 유리하다. 그 형질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점점 많아진다. 어느 순간 임계치를 넘는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개체가 같은 방향으로 변한다. 공감장이 한 번에 뒤집힌다. 새로운 존재로 굳어진다.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조절 유전자의 변동일 수도 있다. 발달 프로그램의 재배열일 수도 있다. 염색체 수준의 사건일 수도 있다. 공감 창발의 경로는 다양하다. 공감이론의 관점에서 방법은 결과에 종속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이 창발되었는가'다.
핵심은 이것이다. 작은 집단에서는 이상치가 묻히지 않는다. 변이가 증폭된다. 새로운 공감장이 형성될 기회가 생긴다. 이것이 진화의 실험실이다.
화성을 상상해보자. 평균 온도 영하 60도. 대기압 지구의 1%. 산소 0.13%. 방사선 지구의 수백 배. 중력 지구의 38%. 인간이 살 수 있을까.
지금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감 불가다. 대기, 온도, 방사선, 중력. 모든 것이 공감 스펙트럼 밖에 있다. 환경이 신호를 보내지만 인간의 몸은 반응할 수 없다. 반응 범위를 완전히 벗어났다. 공감이 형성되지 않는다.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충분히 긴 시간과 작은 개척 집단이 주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시나리오를 그려보자.
초기 단계. 2050년. 100명의 개척자가 화성에 도착한다. 돔 안에서 산다.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한다. 인공적으로 온도를 유지하고, 산소를 공급하고, 방사선을 차단한다. 도구로 공감 범위를 억지로 확장한 것이다. 힘들다. 스트레스가 크다. 하지만 버틴다.
중기 단계. 2150년. 4세대가 화성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지구를 본 적이 없다. 화성이 고향이다. 낮은 중력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키가 더 크다. 골밀도가 낮다. 근육량이 적다. 유전자 발현이 바뀌기 시작했다. 후성유전학적 변화. 적혈구가 많아졌다. 적은 산소를 효율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피부가 두꺼워졌다. 방사선 저항성이 높아졌다.
환경-의지-반응의 순환이 반복되었다. 화성 환경이 계속 신호를 보낸다. 생명이 반응을 시도한다. 대부분은 실패한다. 하지만 일부는 성공한다. 그 형질이 선택된다.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장기 단계. 2500년. 20세대. 소집단이다. 수천 명. 작은 집단에서는 변이가 증폭된다. 특이한 개체가 눈에 띈다. 방사선에 특히 강한 사람. 낮은 산소에 특히 잘 적응하는 사람. 이들이 번식에 유리하다. 8대2 법칙이 작동한다.
20%의 변이체가 방향을 제시한다. 80%가 따라온다. 공감 에너지가 축적된다. 어느 순간 임계치를 넘는다. 화성 공감형 인간의 출현. 새로운 종. 화성 환경과 공감할 수 있는 몸. 지구에서는 살 수 없지만 화성에서는 살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이 남는다. 화성과 지구를 지하철처럼 자주 오가면 어떨까. 양쪽 환경 모두에 적응한 집단이 나올까.
공감이론으로는 가능성이 낮다. 공감은 항상 효율을 찾는다. 두 환경 모두에 최적화된 존재는 양쪽 모두에서 비효율적일 확률이 크다. 화성에 최적화되면 지구에서 불리하다. 중력이 너무 강하다. 산소가 너무 많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생명은 하나의 환경에 깊이 공감하려 한다. 여러 환경에 얕게 공감하는 것보다 하나의 환경에 깊이 공감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그래서 결국 한 환경과 더 강하게 공감하는 쪽으로 발현이 쏠린다. 화성 인간은 화성에 머물고, 지구 인간은 지구에 머문다.
기술적 진화를 생각해보자. 고전적 진화의 대체 경로가 되고 있다.
세계화와 테크놀로지는 소집단 변이를 희석시킨다. 과거에는 마을마다 달랐다. 지역마다 달랐다. 언어, 음식, 옷, 가치관. 모든 게 달랐다. 변이가 풍부했다. 고전적 의미의 종분화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서울이나 뉴욕이나 도쿄나 비슷하다. 같은 브랜드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앱을 쓰고, 같은 가치를 추구한다. 변이가 줄어든다. 평균으로 회귀한다. 고전적 종분화 가능성이 줄어든다.
대신 빠른 적응이 가능해졌다. 기술-문화 기반 진화가 가속된다. 스마트폰이 나온 지 15년 만에 전 세계 사람들이 스마트폰 중심으로 생활한다. 소셜미디어가 나온 지 20년 만에 전 세계 사람들의 사회관계가 재편되었다. AI가 본격화된 지 3년 만에 일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다.
'기술 인간'은 처음에는 이상치다. 소수의 얼리어답터. 하지만 곧 네트워크를 통해 확산된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새로운 행동 양식이 빠르게 전파된다. 1년 만에 수억 명이 같은 행동을 한다. 다수의 표준이 된다.
감정과 인지, 사회 구조가 알고리즘 친화형으로 재편된다. 짧은 동영상에 최적화된 주의력. 즉각적 피드백에 민감한 보상 회로. 온라인 페르소나 관리 능력. 이것이 현대인의 새로운 적응 형질이다.
장점은 명확하다. 빠른 적응. 효율적 정보 공유. 집단 지성. 단점도 명확하다. 공감 다양성의 붕괴. 획일화. 소집단 변이의 소멸.
이 흐름은 위험을 내포한다. 공감 블랙홀. 모든 공감이 하나의 패턴으로 수렴한다. 기술 플랫폼이 정의한 패턴으로.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방식으로. 다양성이 사라진다. 환경이 급변할 때 대응할 수 없다.
그래서 다음 진화는 내적 공감의 확장이어야 한다. 외부 환경과의 공감이 아니라 자신과의 공감. 자가 반응 감지 능력. 자기 공감 조절 능력. 명상, 마음챙김, 메타인지. 이것이 획일화된 환경에서 살아남는 새로운 전략이다.
정리해보자.
같은 종 내부의 이질감은 공감 스펙트럼의 차이에서 온다. 할아버지와 조카는 같은 DNA를 공유하지만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다른 공감장이 다른 존재를 만들었다.
세대 갈등은 도덕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지-반응 조합의 불일치다. 70대의 공감 코드는 1950년대에 최적이었다. 20대의 공감 코드는 2020년대에 최적이다. 둘 다 옳다. 각자의 환경에서는.
종족 차이는 유전자 더하기 장기 환경 순환이 만든 공감 방향성의 누적이다. 서양과 동양은 수천 년 동안 다른 환경에서 다른 공감 패턴을 형성했다. 외모는 효율적 공감 도구로 진화했다.
세계화는 변이를 희석시켜 고전적 진화를 약화하고 기술적 진화를 강화한다. 작은 집단이 사라진다. 변이가 묻힌다. 대신 기술 친화형 인간이 빠르게 확산된다.
존재 가능 범위는 공감 가능 범위다. 도구는 그 범위를 확장하는 공감 기관이다. 옷, 집, 네트워크. 모든 도구는 환경과의 공감을 매개한다.
소집단, 이상치, 8대2는 창발의 점화 장치다. 작은 집단에서는 변이가 증폭된다. 20%가 방향을 제시하고 80%가 따른다. 임계치를 넘으면 창발이 일어난다. 새로운 종의 경로는 단수형이 아니다. 다양한 경로가 있다.
화성 진화는 원칙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효율적 공감은 한 환경으로 수렴하려 한다. 두 환경 모두에 최적화된 존재는 양쪽 모두에서 비효율적이다. 생명은 하나의 환경과 깊이 공감하려 한다.
진화의 본질은 생존이 아니라 공감의 효율화다. 환경이 의지를 던지고, 생명이 반응하며, 두 파동이 오래 공명할 때 다른 존재가 탄생한다. 같은 DNA라도, 같은 종이라도, 공감의 주파수가 바뀌면 전혀 다른 삶이 된다.
이것이 공감이론으로 풀어낸 환경에 따른 종의 발현이다. 그리고 인간이 서로를 오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와 조카를 다시 본다. 둘은 여전히 대화가 잘 안 통한다. 하지만 이제 안다. 둘 다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둘 다 자신의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존재했다는 것을. 같은 종이지만 다른 시대, 다른 공감장에서 살았다는 것을.
당신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가. 어떤 공감장이 당신을 만들었는가. 환경이 바뀌면 당신도 바뀔 것이다. 같은 DNA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 진화다. 공감의 언어로 쓰인 존재의 변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