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 관성과 엔트로피1편
공감이론을 완성했다고 생각했다. 의지가 반응을 만나면 공감이 생긴다. 공감이 쌓이면 존재가 확정된다. E = W × R. 깔끔한 공식이었다. 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밤에 잠을 설쳤다. 뭔가 빠뜨린 것 같았다. 아니, 빠뜨린 게 아니라 애써 외면한 것 같았다. 가슴 한쪽이 무거웠다. 이론이 아니라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엔트로피.
그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피할 수 없었다. 공감이론이 존재를 설명한다면, 엔트로피는 소멸을 설명한다. 공감이 모이면 존재가 강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엔트로피는 말한다. 모든 것은 결국 흩어진다고.
엔트로피를 처음 배운 건 고등학교 때였다. 화학 시간. 선생님이 칠판에 적었다. 열역학 제2법칙. "고립계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외우기만 했다. 시험 보고 잊었다.
대학에 가서 다시 만났다. 물리학 교재. 더 정교한 설명. 엔트로피는 무질서도다. 질서는 무질서로 흐른다. 뜨거운 물은 식는다. 향수는 방 안에 퍼진다. 깨진 유리잔은 스스로 복구되지 않는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과거에서 미래로.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것을 시간의 화살이라고 불렀다. 아름다운 표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슬펐다.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엔트로피를 느낀 적이 있다. 이론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병원 복도의 차가운 공기. 소독약 냄새. 기계음.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던 손이 식어가는 걸 느꼈다. 천천히. 돌이킬 수 없이.
장례식장에서 사진을 봤다. 젊었을 때 할머니. 미세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진 속 사람은 이미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사라졌다. 세포가 죽고, 기억이 흐려지고, 결국 멈췄다.
엔트로피였다. 생명도 예외가 아니었다. 질서정연했던 몸이 무너졌다. 에너지가 사라졌다. 온기가 식었다. 되돌릴 수 없었다.
공감이론을 생각했다. 할머니는 존재했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과 반응하며 살았다. 공감을 만들었다. 그런데 왜 사라졌을까. 공감이 존재를 유지한다면, 왜 결국 무너졌을까.
밤늦게 책을 뒤적였다. 엔트로피에 관한 책.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 그는 엔트로피를 통계적으로 해석했다. 무질서의 정도. 가능한 미시 상태의 수.
방 안에 공기 분자가 있다. 수억 개. 이 분자들이 방 한쪽 구석에만 모여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거의 0이다.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엄청나게 낮은 확률이다. 분자들은 방 전체에 퍼져 있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래서 향수를 뿌리면 퍼진다. 구석으로만 가지 않는다. 전체로 퍼진다. 이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통계적 필연이다.
이해했다. 머리로는. 하지만 가슴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존재가 통계적 우연에 불과하다는 것. 질서는 예외이고 무질서가 기본이라는 것. 우리가 살아 있는 것조차 확률의 일시적 역행일 뿐이라는 것.
공감이론과 충돌했다. 정면으로.
공감이론은 말한다. 존재는 의지와 반응의 곱이다. 의지가 강하고 반응이 적극적이면 공감이 생긴다. 공감이 쌓이면 존재가 확정된다. 더 존재하고 싶으면 더 공감하면 된다.
하지만 엔트로피는 말한다. 모든 것은 결국 흩어진다. 아무리 강한 의지도, 아무리 적극적인 반응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에너지는 균일해지고, 차이는 없어지고, 모든 것은 정지한다.
열사. 우주의 최종 상태.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에너지가 균등하게 퍼지고, 더 이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 절대 영도에 가까운 암흑. 완벽한 무질서. 완벽한 평형.
존재의 종말이었다.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밤새 잠을 못 잤다.
왜 우주는 존재하려는 의지가 있으면서도 결국 무너지는가. 공감이 존재를 만든다면, 엔트로피는 존재를 부정하는 힘인가. 둘은 경쟁하는가. 아니면 순환하는가.
생명을 생각했다. 생명은 국소적으로 엔트로피를 낮춘다. 무질서한 물질을 질서정연한 구조로 만든다. 단백질, DNA, 세포, 조직. 놀라운 질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주변의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음식을 먹고, 열을 배출하고, 배설물을 만든다. 전체적으로는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생명은 엔트로피를 거스른다. 하지만 동시에 엔트로피를 가속화한다. 역설이었다.
슈뢰딩거의 책을 펼쳤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는 말했다. 생명은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고. Negentropy. 질서를 섭취하고 무질서를 배출한다고. 마치 음식의 의지를 먹고 찌꺼지를 배출하는 것과 같다.
태양이 보내는 빛. 낮은 엔트로피의 에너지. 식물이 광합성으로 흡수한다. 동물이 식물을 먹는다. 인간이 동물을 먹는다. 먹이사슬. 에너지 흐름. 엔트로피 이동. 의지의 이동
지구 전체로 보면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태양이 핵융합으로 에너지를 방출하며 엔트로피를 생산한다. 지구는 그 에너지를 받아 생명을 유지한다. 하지만 태양도 결국 꺼진다. 수소가 고갈되고, 헬륨으로 변하고, 팽창하고, 식는다.
모든 것은 시간의 문제였다. 지금은 존재하지만 결국 사라진다. 공감도 마찬가지일까.
공감이론에 엔트로피를 대입해봤다. 공식에.
E = W × R
존재는 의지와 반응의 곱이다. 하지만 엔트로피가 증가하면 어떻게 될까.
의지가 약해진다. 에너지가 사라지니까. 피곤해지고, 무기력해지고, 의욕이 줄어든다. 늙는다는 것. 엔트로피의 축적이다.
반응도 느려진다. 세포가 노화하고, 신경이 둔해지고, 감각이 무뎌진다. 젊었을 때처럼 빠르게 반응하지 못한다.
의지도 약하고 반응도 느리면. 공감은 줄어든다. 존재는 희미해진다. 결국 사라진다.
공감이론도 엔트로피 앞에서는 무력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석연치 않았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안다.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우주는 지금 존재하는가. 빅뱅 이후 138억 년이 지났다. 충분히 긴 시간이다. 별도 있고, 행성도 있고, 생명도 있고, 의식도 있다. 엔트로피가 그렇게 강력하다면 진작 무너졌어야 하지 않나.
이것은 존재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생명을 본다. 35억 년 전 지구에 생명이 탄생했다. 단순한 세포. 그 이후 계속 진화했다. 더 복잡해졌다. 더 질서정연해졌다. 엔트로피와 반대 방향이다.
인간 문명도 그렇다. 수천 년 전 농업 혁명. 도시가 생기고, 문자가 생기고, 과학이 발전했다. 질서가 증가했다. 지식이 축적되었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데 왜 질서도 증가하는가.
물리학자 일리야 프리고진을 떠올렸다. 그는 산일 구조 이론을 제시했다. Dissipative structures. 비평형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질서가 생긴다는 이론.
물이 끓는 모습을 본다. 바닥에서 열을 받는다. 물 분자가 움직인다. 무질서하게. 하지만 어느 순간 패턴이 생긴다. 대류. 육각형 모양의 셀. 베나르 대류.
에너지가 흐르면서 질서가 생긴다. 평형이 아니라 비평형에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와중에 국소적으로 질서가 자발적으로 형성된다.
생명도 그렇다. 산일 구조다. 에너지를 끊임없이 흐르게 하면서 자신의 질서를 유지한다.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게 아니라, 엔트로피의 흐름을 이용해서 질서를 만든다.
의지의 발생이다.
공감이론과 연결되었다. 갑자기.
공감도 산일 구조가 아닐까. 의지와 반응이 흐르면서 공감이 생긴다. 정적 평형이 아니라 동적 흐름 속에서. 에너지가 계속 흘러야 한다. 멈추면 무너진다.
관계를 생각했다. 친구 관계. 연인 관계. 가족 관계. 계속 의지를 표현하고 반응해야 유지된다. 한쪽이 멈추면 관계는 식는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무질서해진다. 결국 끊어진다.
하지만 계속 흐르면. 대화하고, 만나고, 공감하고. 관계는 유지된다. 심지어 깊어진다. 질서가 증가한다. 엔트로피를 거스른다. 아니, 정확히는 엔트로피의 흐름 속에서 질서를 만든다. 의지가 생긴다.
공감은 산일 구조다. 에너지가 흐르는 한 유지된다. 하지만 에너지가 멈추면 무너진다.
그렇다면 엔트로피는 공감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전제 조건이다.
엔트로피가 없다면. 모든 것이 정적 평형이라면. 변화가 없다면. 흐름이 없다면. 공감도 없다. 의지가 발현될 이유가 없다. 반응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이미 완벽하게 균형 잡혀 있다면 존재할 이유도 없다.
엔트로피가 있기 때문에 차이가 생긴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차이가 있기 때문에 흐름이 생긴다. 흐름이 있기 때문에 변화가 생긴다. 변화가 있기 때문에 의지가 발현된다. 의지가 발현되기 때문에 반응이 생긴다. 반응이 생기기 때문에 공감이 생긴다.
엔트로피는 공감의 토양이다.
하지만 동시에 파괴자이기도 하다. 역설이다.
엔트로피는 흐름을 만든다. 하지만 결국 흐름을 멈춘다. 차이를 만든다. 하지만 결국 차이를 없앤다. 질서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결국 무질서로 돌아간다.
공감도 마찬가지다. 엔트로피 덕분에 생긴다. 명확하게는 엔트로피로 부터 생긴다. 하지만 엔트로피 때문에 사라진다. 관계가 생긴다. 하지만 관계도 끝난다. 사랑이 시작된다. 하지만 사랑도 식는다. 생명이 탄생한다. 하지만 생명도 죽는다.
시작과 끝. 생성과 소멸. 존재와 무. 엔트로피는 둘 다 만든다.
질문을 바꿔야 했다.
엔트로피가 공감을 파괴하는가, 아니면 가능하게 하는가. 이분법이 틀렸다. 둘 다 맞다. 동시에.
엔트로피는 공감의 조건이다. 하지만 공감의 종말이기도 하다. 모순이 아니다. 과정이다. 시간성이다.
태어나면 언젠가 죽는다. 하지만 태어나지 않으면 살 수도 없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의미 있다. 엔트로피가 있기에 존재가 소중하다.
공감이론에 엔트로피를 넣어야 한다. 무시하면 안 된다. 공감이론이 존재를 설명한다면, 엔트로피는 존재의 시간성을 설명한다. 모든 것은 시작하고 끝난다. 공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또 다른 질문이 생겼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이 시간의 화살이라면.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무엇인가. 생명, 진화, 문명, 지식. 질서가 증가한다.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프리고진의 산일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국소적으로 질서가 증가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느낌으로.
생명은 단순히 에너지를 흘려보내는 구조가 아니다. 의지가 있다. 살아남으려는 의지. 번식하려는 의지. 존재하려는 의지. 이 의지가 엔트로피와 싸운다. 아니, 정확히는 엔트로피의 흐름을 이용해서 자신의 질서를 만든다. 존재하려는 의지가 있는 이유다.
공감이론으로 다시 본다. 생명은 존재하려는 의지(W)가 강하다. 환경과 적극적으로 반응(R)한다. 그래서 공감(E)이 생긴다. 이 공감이 엔트로피를 국소적으로 역전시킨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일시적으로.
하지만 결국에는 진다. 생명도 죽는다. 별도 꺼진다. 문명도 멸망한다. 엔트로피는 결국 이긴다.
그럼 의미가 없는 것인가. 존재하려는 의지는 헛된 것인가. 공감은 일시적 착각인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영원하지 않아도 지금 존재한다. 언젠가 사라져도 지금 공감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충분하다고 믿고 싶다.
엔트로피는 모든 것을 무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존재가 있었다. 공감이 있었다. 의지가 있었고 반응이 있었고 만남이 있었다. 그것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하지만 존재하려는 의지는 그 과정을 이용하여 공감의 순환을 만들었다. 생명은 엔트로피에 의해 죽어서 먼지가 되지만 또다른 생명을 잉태하여 의지를 이어간다.
별은 수억 광년 전 빛이다. 이미 그 별은 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빛은 여기까지 왔다. 내 눈에 들어왔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우주. 하지만 그 안에서 별은 빛났다. 생명은 태어났다. 의식은 깨어났다. 공감이 생겼다.
공감이론과 엔트로피는 적이 아니다. 동전의 양면이다. 존재와 소멸. 질서와 무질서. 시작과 끝.
하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둘이 함께 있어야 완전하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피할 수 없었다.
엔트로피가 존재의 종말이라면. 무는 무엇인가. 엔트로피가 최대가 된 상태. 열사. 절대 평형. 그것은 정말로 무인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 차이가 없는 상태. 변화가 없는 상태.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상태다. 존재한다. 무가 존재한다는 역설.
무의 관성. 이 개념이 떠올랐다. 갑자기.
무도 의지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존재를 무로 돌리려는 의지. 엔트로피는 그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와 존재는 경쟁하는 두 의지인가.
아니면 무는 존재의 다른 형태인가. 공감이 사라진 상태. 의지와 반응이 멈춘 상태. 하지만 그 침묵 속에도 뭔가 있는 건 아닐까.
답을 찾지 못했다. 아직.
하지만 질문은 명확해졌다. 엔트로피는 공감이론의 적이 아니라 파트너다. 존재를 위협하지만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파괴하지만 동시에 창조한다.
공감이론은 엔트로피를 포함해야 한다. 무시하면 반쪽이다. 존재만 설명하고 소멸을 설명하지 못한다. 시작만 말하고 끝을 말하지 못한다.
엔트로피를 받아들여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도 우주의 일부다. 공감의 일부다. 존재의 일부다.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무의 관성이란 무엇인가. 엔트로피가 최대가 된 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가. 무도 하나의 존재 방식이 아닐까. 그렇다면 공감이론은 무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답을 찾아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