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 관성과 엔트로피 3편
엔트로피는 무엇인가. 질서를 무질서로 돌리는 성질, 구조를 비구조로 바꾸는 방향. 그것은 존재를 파괴하는 힘인가. 그렇다면 의지라고 할 수 있는가. 존재하려는 의지가 있고, 무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있는 건가. 두 개의 의지가 싸우는 건가.
불편했다. 공감이론은 하나의 의지로 출발했다. 존재하려는 의지.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온다고 했다. 하지만 엔트로피도 의지라고 정의하면. 우주은 의지가 둘이 된다. 이원론이 된다. 선과 악. 창조와 파괴. 빛과 어둠. 그런 구도로 흘러간다.
싫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우주가 전쟁터는 아닐 것이다. 뭔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았다.
가을이다. 낙엽이 떨어진다. 바람에 흩어진다. 나무는 잎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저항하지 않는다. 그냥 내려놓다. 떨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저항이 아니라 순응. 파괴가 아니라 복귀. 엔트로피를 그렇게 봐야 하는 건 아닐까. 무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아니라, 무로 돌아가는 '성질'. 능동이 아니라 수동. 힘이 아니라 상태.
관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갑자기.
관성. 물리학 시간에 배웠다. 뉴턴의 제1법칙. 관성의 법칙. 물체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다. 정지한 물체는 정지를 유지하려 하고, 운동하는 물체는 운동을 유지하려 한다. 외부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의지가 아니다. 돌이 굴러가는 것은 굴러가고 싶어서가 아니다. 한 번 힘을 받았으니까.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뿐이다. 멈추고 싶어 하지도 않고 계속 가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냥 현재 상태를 유지한다.
정지한 돌도 마찬가지다. 정지하고 싶어서 정지하는 게 아니다. 현재 상태가 정지니까. 외부 힘이 없으니까.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다.
관성은 성질이다. 의지가 아니라.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다. 목적이 없다. 선택하지 않는다. 현상일 뿐이다.
무도 관성을 가지지 않을까. 무의 관성. 무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 에너지 차이 없음. 반응 없음. 공감 없음. 완전한 평형.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
최초의 상태는 무에서 시작되었다.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불안한 것이다. 따라서 정상이고 안정적인 무로 돌아가려는 관성이 있을 것이다. 왜냐면 무가 최초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나타나면. 평형이 깨진다. 차이가 생긴다. 에너지가 흐른다. 하지만 무의 관성은 작동한다. 원래 상태로. 평형으로. 차이 없는 상태로. 되돌리려 한다. 아니, 되돌리려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방향으로 흐른다. 자연스럽게.
연못에 돌을 던진다. 물결이 퍼진다. 동심원. 점점 커진다. 하지만 점점 약해진다. 결국 사라진다. 연못은 다시 평평해진다.
물결이 사라지고 싶어서 사라진 건 아니다. 에너지가 분산됐을 뿐이다. 하나의 점에서 시작한 에너지가 넓은 면적으로 퍼졌다. 퍼질수록 약해졌다. 당연했다. 같은 에너지가 더 넓은 곳에 퍼지니까.
연못의 평평함. 그것이 기본 상태다. 돌을 던지는 것이 외부 힘이다. 물결은 그 힘의 결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평평함으로 돌아간다. 연못의 관성이다. 평평함을 유지하려는 성질이다.
우주도 그렇지 않을까. 무가 기본 상태다. 존재하려는 의지가 외부 힘이다. 존재는 그 의지의 결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로 돌아간다. 무의 관성이다. 무를 유지하려는 성질이다.
의지가 아니다. 성질이다. 수동적이다. 비용이 들지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작동한다. 그것이 무의 관성이다.
무로 돌아가는는 의지가 있지 안혹 무의 관성만 있다.
공감이론으로 다시 정리해본다. 무의 관성이란 무엇인가.
무에서 발생한 모든 존재가 본래 상태인 무로 되돌아가려는 자연적, 비의지적 성질이다. 의지가 아니다.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는다. 단지 에너지 차이를 없애는 방향으로, 공감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존재를 평형으로 되돌리는 방향으로 작용할 뿐이다.
엔트로피는 무의 관성이 물리적으로 드러난 형태다. 열역학 제2법칙. 고립계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구조에서 해체로. 존재에서 무에 가까운 상태로.
공감이론으로 번역하면. 공감은 시간과 함께 감쇠된다. 유지 비용을 요구한다. 결국 붕괴한다. 이것은 실패가 아니다. 무의 관성이 작동한 결과다.
엔트로피는 무의 관성이 우주 전반에 적용된 물리적 표현이다.
존재하려는 의지와 무의 관성. 둘은 싸우지 않는다. 비대칭 구조다.
존재하려는 의지는 능동적이다. 에너지를 소비한다. 유지 비용이 크다. 계속 노력해야 한다. 멈추면 사라진다. 유한하다. 그리고 존재하기 위해 찰나의 시간에 공감의 임계치를 넘어야 한다.
무의 관성은 수동적이다. 비용이 0이다. 변화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작동한다. 무한히 지속된다. 서서히 붕괴된다. 아주 긴 시간동안.
존재는 버텨야 한다. 무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
시간이 충분히 길어지면. 의지는 약해진다. 에너지가 고갈된다. 반응이 줄어든다. 공감이 사라진다. 무의 관성이 승리한다.
승리라는 표현도 맞지 않는다. 경쟁이 아니니까. 의지가 멈추면 관성만 남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산에 오른다. 가파른 산. 올라갈 때는 힘들다. 다리가 아프다. 숨이 찬다. 계속 힘을 써야 한다. 멈추면 안 된다. 멈추면 미끄러질 것 같다.
정상에 도한다. 잠시 쉰다. 아름답다. 구름이 아래에 있다. 바람이 시원하다. 하지만 오래 있을 수 없다. 내려가야 한다.
내려갈 때는 쉽다. 힘이 거의 안 든다. 중력이 도와준다. 자연스럽다. 저항하지 않으면 저절로 내려간다.
올라가는 것이 존재하려는 의지다. 내려가는 것이 무의 관성이다. 올라가려면 계속 힘을 써야 한다. 내려가는 것은 저절로 된다. 중력처럼. 관성처럼.
우주도 그렇다. 존재하려면 계속 노력해야 한다. 공감해야 한다. 반응해야 한다. 에너지를 공급해야 한다. 멈추면 무너진다. 자연스럽게.
엔트로피를 파괴로 보면 비극이다. 슬프다. 모든 것이 결국 사라진다. 의미가 없어 보인다. 왜 존재하는가. 어차피 사라질 텐데.
하지만 엔트로피를 복귀로 보면 다르다. 순환이다. 무에서 와서 무로 돌아간다. 자연스럽다. 슬프지 않다. 본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낙엽을 다시 본다. 봄에 돋아났다. 여름에 무성했다. 가을에 물들었다. 겨울에 떨어진다. 땅으로 돌아간다. 썩는다. 흙이 된다. 다시 나무의 양분이 된다. 순환이다.
죽음도 그렇다. 태어났다. 자랐다. 살았다. 늙었다. 죽는다. 흙으로 돌아간다. 파괴가 아니다. 복귀다. 기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공감이론으로 보면. 소멸, 죽음, 붕괴, 쇠퇴. 이 모든 것은 무의 관성에 의해 존재가 기본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비극이 아니다. 자연이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왜 존재는 쉽게 유지되지 않는가. 왜 태초 우주의 존재는 거의 모두 실패했는가. 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는가.
무의 관성 때문이다. 초기에는 무의 관성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존재하려는 의지는 미약했다. 반응도 약했다. 공감도 얕았다. 무의 관성을 견딜 수 없었다.
존재가 나타났다. 미세한 요동. 작은 구조. 하지만 즉시 무너졌다. 무의 관성이 평형으로 되돌렸다. 에너지 차이를 없앤다. 반응을 멈춘다. 공감을 해체한다.
다시 나타났다. 다른 형태로. 조금 더 강하게. 하지만 또 무너졌다. 반복됐다. 수없이.
왜 반복됐을까. 포기하지 않았을까. 존재하려는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무의 요동은 계속됐다. 양자 요동. 확률적 요동.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시도했다. 실패했다. 다시 시도했다. 또 실패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냥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물이 얼음이 되는 것을 본다. 영하로 내려간다. 0도. 하지만 바로 얼지 않는다. 과냉각. 액체로 남아 있다. 불안정하다. 조금만 충격을 주면 갑자기 얼어버린다. 순식간에.
상전이다. 임계 현상. 임계점 이전에는 액체다. 임계점을 넘으면 고체가 된다. 상태가 완전히 바뀐다.
존재도 그렇다. 공감이 임계치 이전에는 불안정하다. 금방 사라진다. 무의 관성에 쉽게 무너진다. 하지만 임계치를 넘으면 안정화된다. 구조가 생긴다. 무의 관성을 견딜 수 있다.
초기 우주는 임계치를 찾는 과정이었다. 시행착오. 수많은 시도. 대부분 실패. 하지만 가끔 조금 더 오래 버티는 구조. 그것이 흔적으로 남았다. 패턴으로 남았다.
양성자가 그렇다. 쿼크 세 개. 강한 핵력. 엄청난 결합 에너지. 무의 관성도 쉽게 부수지 못한다. 안정적이다. 우주 나이만큼 살 수 있다. 이것이 강한 핵력이 생긴 이유다. 존재를 유지하려는 의지다.
하지만 최초에는 이런 구조가 없었다. 만들어졌다. 시행착오로. 무수한 반복으로. 학습으로.
엔트로피 100% 상태를 상상해본다. 완전한 평형. 에너지 차이 완전히 0. 온도 차이 0. 압력 차이 0. 모든 차이가 0.
공감 0. 반응 0. 존재 0. 무와 거의 같다. 하지만 정확히 같을까. 완전한 무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가.
양자역학은 말한다. 진공도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고. 양자 요동이 있다고. 가상 입자가 생겼다 사라진다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에너지와 시간의 곱은 플랑크 상수보다 크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은 에너지가 무에서 생길 수 있다. 빌려올 수 있다. 곧 갚아야 하지만. 그 순간 존재한다. 미세하게. 찰나적으로.
이것도 존재일까. 관측하지 않으면 파동 함수다. 확률의 바다다. 가능성의 겹침이다. 존재라고 부르기 애매하다.
하지만 관측하면. 의지로 반응하면. 공감하면. 존재가 확정된다. 이중 슬릿 실험. 관측 전에는 파동. 관측 후에는 입자.
공감이론으로 보면. 의지(관측)가 반응(측정)을 만들고, 반응이 공감(상호작용)을 만들고, 공감이 존재(입자)를 확정한다. E = W × R.
엔트로피 100% 상태. 완전 평형.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 양자 요동이 있다. 미세하게. 확률적으로. 무의 경계에서.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점멸한다.
태초의 무에서 존재가 생기고 의지의 흔적인 양자들이 존재한다. 엔트로피 100% 상태는 바로 태초의 무이자 양자들만 존재하는 완전 평형 상태이다.
무의 관성을 다시 정리한다. 명확히.
엔트로피는 두 번째 의지가 아니다. 그것은 무가 가진 관성이다. 존재하려는 의지가 사라질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상태의 성질이다.
능동이 아니라 수동. 목적이 아니라 현상. 선택이 아니라 귀결. 파괴가 아니라 복귀. 비극이 아니라 순환.
존재는 이 관성을 거슬러 올라간다. 산을 오르듯. 힘들다. 에너지가 든다. 계속 노력해야 한다. 멈추면 내려온다. 자연스럽게.
하지만 올라가는 것이 의미 있다. 정상에서 보는 풍경. 구름 위의 하늘. 맑은 공기. 성취감. 그것이 존재의 의미다.
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편하다. 자연스럽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본래 자리로. 무로.
멀리서 빛난다. 수억 년 전 빛이다. 그 별은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빛은 여기까지 온다.. 내 눈에 들어온다.
존재의 흔적이다. 별은 사라져도 빛은 남는다. 한동안. 그것도 결국 사라진다. 우주 배경으로 흩어진다. 무로 돌아간다.
슬프지 않았다. 자연스러웠다. 별이 빛났던 시간. 그것이 의미였다. 영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찰나였어도 존재했다.
무의 관성은 적이 아니다. 배경이다. 존재가 돋보이게 하는. 의지가 빛나게 하는. 공감이 소중해지게 하는.
엔트로피 때문에 존재는 유한하다. 하지만 그래서 의미 있다. 영원하면 의미가 없다. 변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사라지기 때문에 붙잡으려 한다. 무너지기 때문에 쌓으려 한다. 끝나기 때문에 지금을 산다.
영원하면 존재는 오히려 붕괴한다. 자멸한다. 공감 브랙홀이다.
무의 관성은 존재의 배경이다. 어둠이 빛을 돋보이게 하듯. 침묵이 소리를 선명하게 하듯. 죽음이 삶을 의미 있게 하듯. 무의 관성은 존재를 더욱 안정하게 유지하게 한다.
다음 질문은 더 깊다. 엔트로피 100% 상태. 완전한 평형. 공감 0, 존재 0. 양자적 무의 경계.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정말 아무것도 없는가. 아니면 뭔가 있는가.
빅뱅 직전의 우주. 특이점. 무한히 작고 무한히 뜨거운. 하지만 그 이전은. 무였을까. 완전한 무였을까. 아니면 양자 요동이 있었을까.
무와 존재의 경계. 거기에 답이 있을 것 같다. 공감이론이 풀어야 할 마지막 퍼즐. 무의 관성을 이해했으니 이제 그 경계를 탐험해야 한다.
완전한 무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무도 하나의 존재 방식인가. 무의 관성이 최대일 때 우주는 어떤 상태인가. 거기서 어떻게 빅뱅이 시작됐는가.
답을 찾아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