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에 은퇴한 축구선수, 잘 살고 있습니다.(23)
히말라야의 장엄함 그리고 눈물, 또 눈물
히말라야의 장엄함 그리고 눈물, 또 눈물
2011년 1월 17일 국내에서의 교육을 마친 후 30여 명의 봉사단원과 함께 네팔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처음 가는 해외에서 낯선 사람들과 만들어갈 추억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스무 살 김혜자 씨가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을 보고 해외 빈곤아동에 대한 정기후원을 이어오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직접 현장에 가서 어려운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지난 2년 동안 지친 저에게 또 하나의 터닝포인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와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하며 네팔을 향해 갔습니다.
네팔에 도착할 때쯤 비행기 창밖으로 히말라야 산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받았던 감명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자연이 주는 ‘장엄함’에 압도되어 한참 동안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의 하늘은 머무는 내내 회색빛이었습니다. 공항에서 내려 숙소로 이동하는 길에서 만난 구걸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오토바이, 자전거, 차량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도로 그리고 하천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은 ‘내가 지금 낯선 곳에, 나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와 있구나.’는 현실을 깨닫게 했습니다.
봉사를 하게 된 기관은 네팔의 지적장애인들을 교육하는 특수학교였습니다. 말이 좋아 학교지 변변한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운동장도 없이 건물에 위치해 있는 정말 열악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10일 동안 지적장애인 학생들과 문화수업, 체육수업, 체험학습 등의 교육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대로 씻지도 않고 냄새나는 학생들이 꺼려지기도 했지만 이 곳에 온 목적을 생각하며 마음을 열고 다가가니 그만큼 학생들도 다가와 마음을 나누며 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수업이 있던 날에는 일부러 제 옷을 가득 챙겨가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며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눈물이 날 때는 울어야 해요.
특수학교에서 봉사를 마친 후에는 빈민가에 위치한 무료급식소에서의 배식봉사를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눈물을 흘린 기억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배식 시간이 되자 길게 줄지어 배식을 기다리는데 혼자 온 친구들도 있고, 형제자매가 같이 온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 찾아왔지만 쑥스러워 오지 못하는 친구들 손을 붙들고 들어와서 배식을 받도록 도와주는 가난하지만 선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을 보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가장 많은 눈물을 쏟게 한 아이는 5살짜리 여자 아이였습니다. 2살 정도 되는 어린 동생과 함께 와서 배식을 받아 그것을 자기 한 입, 동생 한 입 하면서 나누어 먹는 모습을 보며 하염없니 눈물만 나왔습니다. 그렇게 마음 아파하며 담을 수 있는 마음을 가득 담은 배식과 뒷정리를 마친 후 모두 모인 자리에서 대표로 소감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뒷정리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었는데 봉사를 하며 느낀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이들을 떠올리니 눈물이 그치지 않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한 참을 울고 난 후 '눈물이 날 때는 울어야 해요'라고 말하며 그 날의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봉사활동 일정을 마치고 히말라야 산맥의 트래킹을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네팔에서 마지막 날 밤 앞으로 어떻게 좋은 일을 할까 고민하다 현지에서 저렴한 히말라야 립밤을 사서 한국에서 판매해서 그 수익금으로 기부를 해야겠다는 마음먹고 립밤을 100개를 구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공항 검색요원이 제 짐을 보더니 날카롭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행객이 많은 지나치게 많은 립밤을 구입해서 나가니 이상하게 여긴 것입니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 학생회에 취지를 설명한 후 립밤 100개를 개당 1,000원씩 남기고 팔아 10만 원 정도 네팔에 있는 학생들을 위해 기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네팔에서의 2주는 위만 보며 달려오던 것을 잠시 멈추고 옆을 둘러보니 비교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이 치유되고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갖게 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