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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희 Nov 30. 2020

스무 살에 은퇴한 축구선수,
잘 살고 있습니다.(31)

Ok, 계획대로 되고 있어?

Ok, 계획대로 되고 있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축구 지도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현재의 아내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2013년 소개팅으로 만난 아내는 독어독문과를 졸업하고 스위스 거주 및 독일 어학연수 경험으로 독일어는 물론이고 독일 문화와 생활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27살에 입사한 후 소개팅을 많이 했지만 인연을 만나지 못했는데 신앙도 같고, 착하고 예쁜 와이프를 처음 보던 날부터 하늘이 준 인연이라는 생각에 사귀기 시작하며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도 회사생활에 지쳐있었고 본인이 장점이 있는 독일어 통, 번역을 더 공부해서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결혼 후 함께 유학을 가자는 저의 설득에 넘어가 1년 정도 교제하며 사랑을 확인한 후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28살에 만나 29살에 결혼을 결심했으니 어린 나이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조금 빠르게 내린 셈입니다.


  결혼 결정을 서두른 것은 조급함 때문입니다. 신앙, 외모, 전공 등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있었고, 새로운 도전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하기 위해 결혼을 빨리 해야 했습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부모님의 면을 세워드리기 위해서라도 대기업에 다닐 때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 여자를 놓친 후 서른이 다 되어 혼자 유학을 가면 너무 외로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유학생이 좋은 여자를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기에 독일어를 할 줄 알고,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현재의 와이프와 꼭 결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줄 알았습니다.


비빌 언덕이 있다는 것.

모든 것이 축구 지도자가 되기 위한 저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우리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부모님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시지만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교회는 가끔 나가셨지만 믿음이 없었고, 집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지만 괜한 갈등이 될까 결혼하고 30년 동안 제사를 거르지 않았는데 처가는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이라 제사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추도예배를 드리는 데 장로님이신 장인어른이 '제사를 지내는 집에는 시집을 보낼 수 없다.'라고 결혼을 반대하셨습니다. 아내도 제사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었고, 저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어 아버님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의 등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60년 평생을 제사를 지내며 살아오신 아버지와 60년 평생을 기독교 가치관을 바탕으로 살아오신 아버님 두 분 모두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바꿀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에게 헤어지자고 말을 했지만 아내를 놓치고 싶지 않아 아버지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들 장가 못 가게 할 거냐'며 협박도 하고 30년 동안 신앙생활하며 제사 지낸 어머니도 생각해서 이제 교회식으로 바꾸자며 매일 같이 설득을 했습니다. 


  "내 년 설부터는 추도예배로 드리자. 제사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2014년 추석, 아버지께서는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60년 동안 제사를 지내온 아버지가 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친척들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기에 제사를 없애고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은 쉽지 않은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어떤 이유에선지 과감하게 제사를 없애셨고 처가에서는 이제 반대할 명분이 사라졌으므로 결혼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정말 큰 결심을 한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테스트를 본 학교에서 거절당했을 때 고개를 숙이고 부탁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손에 기름때 묻혀가며 살아오신 분이라 고집도 세고, 성품도 과격한 부분이 있는 아버지가 자식일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런 아버지, 어머니가 계셨기에 새로운 도전과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하지는 않은 형편에 하고 싶은 운동, 공부 원 없이 할 수 있었고 축구 지도자가 되겠다는 결심도 적어도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니 '비빌 언덕이 있으니깐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다.' 핀잔을 주시기도 하셨지만 지금까지도 든든한 비빌 언덕이 되어주시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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