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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희 Aug 26. 2020

스무 살에 은퇴한 축구선수, 잘 살고 있습니다.(6)

인생지사 새옹지마: 뱀의 머리가 되다.

뱀의 머리가 되었지만 뱀은 뱀일 뿐?                                                  

  3학년이 되었을 때 팀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특기자로 진학하기 위해서 전국대회 8강 이상의 성적이 필요한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팀의 전력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동계훈련을 시작했는데 역시 경기 결과나 내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동료들이 인성이 좋았고 승부욕이 있어 동계훈련을 거치며 조금씩 나아져 전국대회 8강 이상 진출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고3이었던 2004년에는 학생선수들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학기 중 대회가 축소되어 학기 중에는 3개 대회만 출전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상반기에 2개 대회에 출전했는데 모든 대회에서 예선은 통과했지만 토너먼트 1차전에서 탈락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상반기 대회를 마치고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일반학생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친구들과 속상한 마음에 술을 마시면서 ‘공부를 치면 수능을 3번 봤는데 다 떨어졌다. 나 어떡하냐. 너네는 수능 잘 봐라’는 이야기를 그날 밤에만 수십 번을 했다고 아직까지 놀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특기자 진학을 위한 자격을 얻지 못했다는 좌절과 불안함을 갖고 3학년 상반기를 보냈습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여름 방학을 앞두고 저는 몰랐지만 상반기 선문대학교로의 진학이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재단이라는 점과 부적절한 요구를 했다는 감독님의 조언으로 선문대 진학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여름 대회에서는 반드시 성적을 내야 특기자 진학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상반기 대회를 마치고 대회는 없었지만 대학교와 연습경기도 많이 했고, 지금으로 치면 K-3에 해당되는 직장인 팀과 정기적으로 연습경기를 했습니다. 상위 레벨의 팀과의 경기 경험이 쌓이고 저처럼 부평고에 진학했다가 전학 온 후배도 있어 전반적으로 팀의 전력이 좋아져 선수들 뿐만 아니라 학부모님들 사이에서도 여름 대회에 대한 기대가 커져 갔습니다.

     

  결국 지금으로 치면 프로팀 포항 유스인 포철공고를 예선전에서 이기고, 8강전에서는 울산 유스인 현대고를 승부차기 8번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이겨 4강에 진출하였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공식 대회에서 2번이나 승부차기를 실축해서 저는 끝까지 키커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양 팀이 실수 없이 7번 키커까지 성공했고, 남은 선수는 저와 골키퍼 그리고 2학년 후배와 정말 자신 없다는 동기한 명이었습니다. 제가 넣으면 경기를 마칠 수 있는 순간 상대는 프로에도 진출했던 골키퍼였습니다.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좌측 상단으로 강하게 슛을 했는데 의도와 달리 슈팅은 땅볼로 굴러갔고, 다이빙을 떴던 골키퍼 옆구리 밑으로 골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공식 대회 처음으로 승부차기에서 성공을 했고 4강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4강에서는 현재 성남 유스인 풍생고에 아쉽게 승부차기로 패해 공동 3위로 대회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현 프로유스팀과 3번 경기를 해서 2승 1패를 거둬 4강 진출을 한 셈입니다. 기억 속에서도 4강 진출이라는 것만 기억이 남았었는데 글을 쓰며 곱씹어보니 정말 좋은 성과였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결국 진학을 위해 애써주신 감독님의 수고와 다 같이 협력해서 성과를 낸 결과로 경기대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학생 TO가 다 찬 상황이라 비 장학 특기생 진학이었지만 수도권에 위치한 대학에 진학을 할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목표로 했던 일류 대학은 아니지만 더욱 기뻤던 것은 부평고가 감독의 문제로 팀이 와해되어 3학년 경기에 올려 뛰던 4명은 강릉으로 전학을 가고 남아있던 동기들은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했음에도 모두 지방대에 진학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그대로 제 삶에 적용되었습니다.     


  그렇게 파란만장했던 고등학교를 마무리하고 경기대학교에 특기생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부침이 있었지만 축구를 조금씩 알아갔던 시기를 '대학교에 진학해서도 지금까지 그랬듯이 최선을 다해 프로선수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며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렇게 자신감과 벅찬 기대를 갖고 대학교에 진학을 했기에 고등학교 대회가 선수로서 제 인생의 마지막 대회가 될 줄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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