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님만해민을 떠나, 지도 밖 골목으로 스며들다.

치앙마이 외곽, 낯선 이층집에서 시작된 뜻밖의 인연.

by 나들레



사람의 온기로 가득했던

치앙다오를 뒤로하고,

한 달 살기의 마지막 챕터를

시작하기 위해 짐을 꾸렸다.


목적지는 치앙마이 외곽, 핑강 근처의 '농호이'지구. 화려한 님만해민이나 북적이는 올드시티와는 거리가 먼, 여행자보다는 현지인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동네였다.


편리함이 우선순위였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번화가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은 '진짜 생활'을 엿보는 것. 나는 에어비앤비 앱을 켜고 지도 가장자리,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시골 동네를 콕 집어 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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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출 앱으로 부른 기사님조차 길을 헤맬 만큼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나, 에어비앤비에서 보았던 대문 앞에 섰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들 때쯤에 철장으로 된 미닫이문을 활짝 열며 반겨준 건 환하게 웃는 여자 호스트였다.


건물 이름에 왜 '스마일'이 들어가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그녀의 환한 미소 때문이었다. 그 미소 한 방에 길을 헤매며 쌓인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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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미소만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그 가녀린 체구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20kg이 넘는 내 육중한 캐리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계단이 20개 정도 되고 꽤 가팔랐는데, 그녀는 중력을 무시한 사람처럼 성큼성큼 2층까지 짐을 옮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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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받은 방은 사진보다 훨씬 아늑했다. 침대 위에는 하얀 망사가 풍성하게 드리워져 있어 마치 고귀한 성에 사는 공주님 침대 같았는데, 알고 보니 모기가 워낙 많은 탓에 설치한 생존용(?) 모기장이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방은 기품 있으면서도 아늑한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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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은 또 있었다. 2층에는 방 3개와 화장실 1개가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화장실은 오직 나만을 위한 전용 공간이었다.


사실 같은 층에 동갑내기 남자 게스트도 머물고 있었다. 그 방에도 욕실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호스트님은 그에게 1층 화장실을 쓰도록 안내했다고 한다. 방 안에 욕실이 없는 내가 혹여나 불편할까 봐, 남녀 동선을 분리하고 2층 화장실을 통째로 비워주신 배려였다. 퇴실할 때쯤에야 이 사실을 알았지만, 어쩐지 머무르는 내내 마음이 편안하더라니. 그런 세심한 배려와 공간의 온기 덕분에 나는 금세 이 낯선 시골집에 정이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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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낭만에는 늘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짐을 푼 다음 날,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고 돌아왔는데 방문이 열리지 않았다. 열쇠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봐도 묵묵부답. 등줄기에 식은땀 방울이 하나하나 느껴질 정도로 긴장감이 맴돌았다.


호스트에게 연락을 취해보려 했지만, 무슨 일인지 닿지 않았다. 나는 굳게 닫힌 문과 씨름도 하고 에어비앤비 한국지사와 연락하며 1시간 넘게 땀내 나는 시트콤을 찍어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청소 중이라 연락을 못 받은 것이었고, 이 문을 여는 데는 섬세한 요령과 막강한 힘이 동시에 필요했다.


그날 이후 나는 딱히 훔쳐 갈 귀중품도 없겠다, 그냥 방문을 잠그지 않고 다니기로 했다. 덕분에 내 방은 언제든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는, 의도치 않은 '오픈 하우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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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이가 하루 종일 끊겨 세상과 단절되기도 하고, 모기들에게도 살기 좋은 환경인지 밤낮없이 치열한 사투를 벌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불편함마저 여행의 일부처럼 느껴지던 그 집에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매력의 절반은 함께 머물던 이웃들 덕분이었다.


2층에는 나 외에 두 명의 일본인이 더 살고 있었다. 한 명은 나와 30대 동갑내기인 조용한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우리 엄마뻘쯤 되어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도착한 첫날은 워낙 피곤하기도 했고, 낯가림이 있는 편이라 그저 오며 가며 가벼운 눈인사 정도만 나눴다. 앞으로도 적당히 거리를 두며 오롯한 혼자만의 여행을 즐길 생각이었다. 그날, 카페에서 우연히 그녀를 마주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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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이 굳게 닫힌 그날,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지친 마음으로 숙소 근처 카페를 다시 찾았다. 노트북을 펴놓고 멍하니 앉아 있던 내게, 그녀가 먼저 다가왔다.


"Where are you from?"

"I'm Korean."


짧은 대답에도 그녀는 소녀처럼 해맑게 웃었다. 자신도 딸과 함께 한국을 여행한 적이 있다며, 휴대전화 속 앨범을 뒤적거려 서울의 풍경들을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서툰 영어와 손짓발짓이 오가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엄마와 딸 같은 나이 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홋카이도에서 왔다는 그녀. 눈이 많이 내리는 그 추운 곳을 떠나 따뜻한 치앙마이로 왔다는 그녀의 미소가 참 따뜻했다. 통성명을 마치고 어색함이 조금 가실 무렵, 그녀가 툭, 한 마디를 던졌다.



"오늘, 나랑 같이 여행할래?"

그 한마디가 나의 마지막 일주일을
완전히 바꿔놓을 줄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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