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타지에서 건네받은, 엄마의 마음 같은 한 끼.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벌써 사흘 넘게 숙소 근처만 맴돌고 있었다. 지리도 낯설고 교통편도 어려워 멀리 나갈 엄두를 못 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나보다 먼저 와 있던 옆방 동갑내기 일본인 청년에게도 이전에 다른 곳을 같이 가자고 물어봤지만, 거절당했다고 했다.
사실 조금 의아하긴 했다. 그녀도, 그 친구도 치앙마이라는 먼 타국까지 와서 왜 도통 숙소 밖을 나가지 않는 걸까. 속으로는 '왜 여기까지 와서 방에만 있어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각자의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꿀꺽 삼켰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외출을 나서며 마침 그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 물어보았다.
"우리 왓 우몽 가는데, 너도 같이 갈래?" 하지만 돌아온 건 역시나 정중한 거절이었다. 아마도 그에게는 관광이 아닌 쉼이나 일 같은 다른 목적이 있는 듯했다.
결국 나를 바라보며 '같이 가고 싶다'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낸 건 그녀뿐이었다. 그 눈빛에 묘한 책임감이 샘솟았다. 그렇게 우리의 예고 없는 즉흥적인 동행이 시작되었다.
첫 목적지는 '왓 우몽(Wat Umong)', 숲속의 동굴 사원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지도 앱을 켜고 호출 앱으로 차를 불렀다. 화려한 금빛으로 치장한 도이수텝과 달리, 숲속에 고요히 파묻힌 이 사원은 투박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을 풍겼다.
"신발을 벗어야 해요."
우리는 나란히 신발을 벗어들고 미로 같은 동굴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동굴이 있는 사원이라니. 미로 같은 길목마다 불상이 놓여 있는 구조가 독창적이면서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동굴 안을 흐르는 서늘한 공기가 그날의 무더움을 말끔히 씻어 내려주는 것만 같았다.
동굴을 나와서는 하늘 위로 치솟아 오르는 듯한 탑 주변을 돌았다. 자연 그대로의 흙과 돌을 맨발로 꾹꾹 밟으며 걷는 시간. 발바닥에 닿는, 서늘하고 까슬까슬한 감촉에 기분이 묘했다. 마치 어릴 적 모래가 깔린 놀이터를 뛰어다니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발이 새카맣게 더러워질수록, 우리 사이의 어색한 벽도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닮은, 세월의 흔적이 짙은 사원을 거닐며 나는 그녀가 왜 이곳에 오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세속의 소음이 지워진 그 자리에는 오직 자연의 소리만 가득했다.
웅장했던 숲속 사원 투어를 마치고, 우리는 열기를 식히러 님만해님의 시원한 카페로 향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길 찾는 법도, 호출 앱을 사용하는 법도 전혀 모르셨다.
"대체 이 구석진 숙소는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놀란 표정으로 묻는 나에게, 그녀는 주소가 적힌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이며 그걸 보여주고 숙소를 찾았다고 했다. 그 아날로그 감성에 나는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이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P' 성향의 여행자였다.
나는 즉시 그녀의 휴대전화에 호출 앱을 설치해 드렸다. 치앙다오에 이어, 여기서도 의도치 않게 '일일 모바일 강사'로 데뷔하게 된 것이다. 목적지 설정부터 차량 번호 확인하는 법까지 하나하나 알려드렸다. 잠시 후 선약이 있어 그녀를 먼저 숙소로 태워 보내야 했는데,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보는 기분이랄까. 타들어 가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표정은 세상 해맑아 보이기만 했다.
"기사님 오시면 차량 번호 꼭 확인하고 타세요!"
나도 모르게 이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며 신신당부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나중에 내가 숙소에 도착해서도 잘 들어갔는지 확인 메시지까지 보내야 했다. 다행히 그녀는 무사히 도착해 있었고, 습득력도 생각보다 빨랐다. 그 뒤로는 혼자서도 척척 앱을 이용해 외출하곤 했다.
그 뒤로 우리는 각자 별일 없으면 종종 함께였다. 어느 날은 숙소 근처 식당에서 상다리 부러지게 한 상 차려놓고 배가 터지도록 푸짐한 식사를 즐기기도 했고, 아침이면 그녀가 한국에 계시는 우리 엄마처럼 과일과 요거트로 예쁘게 꾸민 아침 식사를 차려주시기도 했다.
그녀의 다정한 배려에 마음이 녹아들 때쯤, 그녀가 자신의 방을 구경하라며 나를 초대했다. 문을 열자마자 "우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내 방보다 1.5배는 족히 넓은 데다, 운동장만 한 전용 욕실까지 딸려 있는 게 아닌가. 내 방이 아늑하고 포근한 아지트 같다면, 그녀의 방은 널찍하고 시원시원한 매력이 가득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분위기의 방을 오가며, 짧은 시간 동안 금세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갔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끔은 그 시간이 버겁기도 했다. 혼자 밥 먹고, 혼자 걷고, 혼자 사색하는 여행에 익숙한 나에게 '누군가를 챙겨야 한다'라는 감각은 꽤 낯설고 피로한 일이었다. 마치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 관광을 온 가이드가 된 기분이랄까. 친절하고 상냥한 그녀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늘은 좀 혼자 있고 싶은데...'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나의 그 얕은 마음이 부끄러워진 건 여행 마지막 날 점심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눈이 일찍 떠져 혼자 밖을 나섰는데,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점심 같이 먹으려고 하는데, 시간에 맞춰 꼭 숙소에 돌아와야 해!"
나는 그저 평소처럼 과일이나 요거트 정도겠거니 생각하고 숙소 1층 공용공간으로 갔다. 세상에나. 가자마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녀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식탁 위에는 새콤한 매실장아찌(우메보시)를 넣은 볶음밥과 계란을 듬뿍 푼 따뜻한 국수가 한 상 가득했다. 그리고 그 옆엔 수줍게 미소 짓고 있는 그녀와 동갑내기 일본인 친구가 앉아 있었다. 낯선 타지에서 나를 위해 손수 만든 밥상이라니. 안 그래도 눈물이 많은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한 숟가락을 입에 넣는 순간, 콧날이 시큰해졌다. 치앙마이에서 먹었던 그 어떤 맛집의 음식보다 따뜻하고 마음을 울렸다. 나는 고작 호출 앱 이용법을 알려드리거나 함께 다니면서도 때론 귀찮아했었는데. 그녀는 나에게 언제나 자식을 품는 엄마의 마음을 내어주고 있었구나. 혼자라고 생각하며 잔뜩 웅크리고 있던 내 마음을, 그녀는 이 따뜻한 한 상으로 녹여내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연락해요. 홋카이도 우리 집에 꼭 놀러 와요!"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각자의 나라로, 각자의 계절로 돌아갔다.
치열한 현생에 치여 사느라 정신없이 보낸 1년 2개월. 문득 사진첩을 열어 우리가 함께 맨발로 거닐던 그 동굴 사원과 그녀의 환한 미소를 들여다본다. 낯선 이방인을 기꺼이 딸처럼 품어주었던, 홋카이도에서 온 나의 여행 친구.
그때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안부를 2026년 1월이 거의 다 지난 지금에서야 허공에 띄워 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곳에서는 여전히 눈이 많이 내리나요? 당신이 만들어준 우메보시와 국수 온기 덕분에, 저는 여전히 이 차가운 계절을 잘 버티고 있어요. 잘 지내고 계시나요?"
반가운 답장이 바로 도착했다.
추운 걸 싫어하는 그녀는
따뜻한 나라 하와이로 또다시 여행을
떠났다는 답장이었다.
역시,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