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아는 부모가 되자.
- 부모의 양육태도
부모와 아이가 편안하고 행복한 관계가 되기 위해 아이를 키울 때 알아야 할 것이 뭐가 있을까를 아이를 키운 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니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유아교육을 전공했기에 자신이 없진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좋은 그림책들을 많이 갖고 있었고 대화법이나 유아발달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아이를 낳기 전부터 강의를 하고 있었고 모든 과목 이론 편에 유아발달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신체적 발달뿐 아니라 사회성발달, 정서발달, 인지발달을 이론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나의 관심은 항상 아이에게 가 있었다. 아이가 재밌어하고 좋아할게 뭘까? 재밌는 놀잇감과 놀이에 대한 아이디어가 넘쳐났다. 내가 유아들의 놀이와 장난감등에 관심이 많아서 즐거운 일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그림이 아름답고 좋은 책들을 아이 잠자리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주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 강아지가 너무 귀엽지? 얘가 지금 엄마 심부름 가는 중이래,” 이런 식으로 그림책을 보며 이야기해 주고 쉬지 않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에게는 클래식도 좋지만 가장 좋은 음악은 엄마의 목소리라는 내용을 보고 잘하지 못하지만 노래도 많이 불러줬다.
아이에게 자극이 되고 흥미로울 곳으로 많이 데리고 다녔고 이유식도 여러 책을 참고해 정성껏 만들어 먹였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울거나 칭얼거리면 민감하게 즉각적인 대응을 해주었다.
이러면 다 될 줄 알았다. Piaget의 교육 목표에 가까운 한 명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시민으로 아무 문제 없이 우뚝 서 있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재밌는 놀이와 수준에 맞는 책 읽기, 영어 학습 등은 성공적이었지만 아이의 마음에 사랑만을 주지는 못했다. 육아의 과정 중 예상치 못한 많은 것들을 만나게 되었고 어쩌면 아이에게는 그게 훨씬 더 큰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었겠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나도 아이와 함께 힘들었고 나의 경계와 통제 수준, 나의 부모님과의 관계,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문제들과 열등감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싫어도 그 과정을 마주해야만 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힘들어도 나의 부모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해결해야 했고,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야 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나의 경계와 통제 수준을 알게 된다. 그 당시에 깨닫기 쉽지 않았다. 무조건 내가 옳다는 생각에 갇혀있었으니까. 주변에도 보면 본인은 허용적이고 좋은 엄마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굉장히 엄격하고 답답하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남들이 봤을 때 나도 그럴 수 있다. 부모의 가치관, 성장과정과 환경 등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그 안에 있을 때는 깨닫기 힘들다. 자신의 경계를 넓혀가는 과정이 쉽지 않다. 본인의 자아가 깨지는 고통과 뭔가 잘못될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걸 극복해야 아이가 크게 잘 자랄 수 있다. 아이를 위해 이 정도는 허용하는 게 맞고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큰일이 아님에도 굉장히 고통스럽다. 그런 고통을 겪으며 엄마인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거 같다.
나의 아이들이 작은 그릇의 엄마를 깨우치게 하려고 많은 고통을 겪었으리라. 나는 스스로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재밌는 놀이와 환경에 있으면서 뭐가 불만이길래 자꾸 경계를 넘어가려고 할까?’라고 아이를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좋아하는 아이돌 공연도 가라고 쿨 하게 허락하고 친구들과 슬립오버도 자주 해주고 학원도 싫다고 하면 바로 끊어주는데 왜 자꾸 나를 시험에 들게 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나의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는 이런 일만으로도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거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했고 세대와 상황이 다른 우리 아이들에는 당연하거나 불만족스러웠으리라.
나를 힘들게 했던 일들이 항상 그 시기를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나이의 아이가 할 수 있는 너무도 평범한 일들이었다. 근데 나는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내 기준이 높았고 내 경계가 좁디좁은 답답한 인간이었다. 엄마보다 아이는 자신을 더 잘 알았고 그렇게 맞는 길을 찾아 잘 가고 있었다.
아이의 문제 행동이라고 여겨지는 행동들, 성격이 사실은 나의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크게 웃거나 과장되게 행동하는 일이 불편했다. 잘 생각해 보니 어릴 때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부모님이 제지하고 무안을 주는 일이 많았다. 무남독녀였지만 집안 아이들 중에 가장 연장자여서 항상 의젓하게 행동해야 했고 동생들에게 양보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어리광을 부리거나 감정표현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부모님에게 영향을 받아 그런 아이의 모습이 나도 불편했던 거였다.
아이를 낳고 내가 배운 방법대로 키우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최고의 스펙을 갖춘 아이로 자라리라는 생각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아이, 그러면 그런 아이를 키운 나까지도 인정받고 존경받을 것 같은 그런 마음이 깊숙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대단한 아이들이 너무도 많은 지역에 살면서, 아이의 학년이 높아질수록 나의 기대가 조금씩 깨져나갔다. 그걸 아이 탓을 했던 거 같다. 결국 나의 인정욕구와 열등감을 아이를 통해 만회하려고 했는데 그게 내 기대만큼 되지 않자 아이 탓을 하며 화가 났던 거 같다.
이렇게 쓰는 일이 사실 고통스럽고 부끄러워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나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봤을 때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갔으면 하는 일, 남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직업을 가졌으면 하는 일이 정말 아이를 위해서 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맞지만 또 일부분은 나의 인정욕구였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아이를 지금 있는 그대의 모습으로 인정하고 바라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아이들에게서 거슬리고 문제 행동이라고 여겨지는 일들의 실체를 하나하나 깊이 들여다보면서 그 문제들은 항상 엄마인 나 자신과 연관되어 있었다. 모든 문제를 아이만의 문제로 보고 아이가 잘못되었다는 비난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더 커진다. 왜냐하면 나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융에 의하면 인간은 자아실현을 위해 무의식이 해결되지 않은 나의 문제를 현실에서 보여준다고 한다.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해결될 때까지 본질은 같은 문제를 여러 상황으로 되풀이해 제시한다고 한다.
자식 문제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주변에서도 그런 상황을 많이 볼 수 있다. 아이에게 문제 있다. 주변에서 보면 아이의 문제 이면에 있는 부모의 여러 문제가 확연히 보인다. 부모만이 그걸 보지 못하고 아이를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데리고 다니며 해결하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문제는 심화되고 되풀이된다. 그럴 때 방향을 부모 자신에게 돌려볼 수 있어야 한다.
아이 키우는 일은 인생에서 완수해야 할 나의 인생과제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