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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Oct 16. 2023

글쓰기는 고해성사다.

날씨 좋은 어느 날 친한 후배들과 남산 둘레길 산책을 다녀왔다. 10월엔 하루도 집에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날씨는 좋고 세상은 아름다웠다. 그렇게 좋은 계절에도 내 마음속엔 가시덩굴이 자라는 공간이 존재한다. 춥고 날카로워 쉽게 헤치고 들어갈 수 없는 공간, 누구에게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덩굴이 더 크고 험한지 아닌지의 차이일 뿐.


벤치에 앉아 눈은 아름다운 나무와 하늘을 보고 있지만 입으로는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시덤불에 대한 이야기가 자꾸 삐져나온다. 이런저런 대화 끝에 고해성사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내가 그토록 망설이면서도 엄마 이야기를 브런치에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고 공감받고 죄 사함을 받고 싶은 이유다. ‘네 잘못이 아니야, 괜찮아’, ‘네 상황에서 그럴 수 있어’라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긴 시간 동안 간절히 필요했다.


혼자서 아무리 그렇게 떠들고 외쳐도 도돌이표처럼 원래 자리에 돌아와 죄책감과 불안감 속에 갇혀버린다.


책에 그토록 매달리는 것도 불편한 마음을 이해하고 확인받고 싶어서였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 늘 확인받고 싶다. 책에서 그 이유를 찾고 확인할 때 마음이 편해지곤 한다. 불편한 마음과 의문을 해결하고 나의 입장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 위로와 죄의 사함을 받는 일이 필요했다.


내가 천주교 신자여서 매주 신부님께 조금씩 풀 수 있었으면 이토록 오랜 시간 고통받지 않았을 거 같다. 종교의 역할이 참 크고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믿고 고민을 말하고 위로받을 전적인 내 편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내가 그런 존재가 돼주고 싶은데 얼마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가장 그럴 수 있지만 아이들이 가장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존재가 바로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아이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내 비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부모 자신의 삶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아이에게 과하게 희생하거나 몰입하지 않아야 한다. 희생하고 모든 걸 다 해주면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그런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보상해주고 싶은 마음이 병적인 죄책감과 책임감을 키운다.


부모역할이 어려운 이유다. 부모로서의 의무는 하되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자식을 위해 희생했다는 말은 하지 않을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프리카에 병원이 부족하고 정신과는 아예 없는 지역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아이디어를 냈다. 마을에서 신임받고 있는 할머니 몇 분에게 벤치에서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더니 마을이 평화로워졌다는 내용이다. 오히려 잘 모르는 할머니에게서 필요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나 보다.


인자한 표정의 할머니에게 답답한 속을 털어놓고 싶은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상담사한테까지 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답답한 속을 좀 털어놓고 가벼워지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노트하나를 마련해서 인자한 할머니에게 털어놓는다고 생각하고 글을 써보면 좋을 거 같다. 그 할머니가 답을 알려주지 않아도 털어놓으면서 스스로 답을 찾을 수도 있고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파리가 유리창에 계속 부딪힐 때 살짝 문을 열어줘 나갈 곳을 터주듯이 글쓰기가 그런 역할을 해줄 수도 있다. 가로막혀 있던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도와준다. 글을 써나가다 보면 문제의 본질이 보일 때가 있다. 명확한 해답은 아닐지라도 사건의 다양한 면들이 보이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 준다. 스스로에게 틈을 주고 고착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자책을 많이 하는 편이라 그런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사람들과의 문제에서도 늘 자신을  탓한다. 그는 그의 삶을 살고 있는데 왜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고 그렇게 탓하고 싶고 탓하는 내가 맘에 들지 않아 어떻게든 맞추려 하는지 괴롭다. 내 생각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내가 잘하면 해결될까 하며 스스로를 깎고 다듬는 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을 곁에 오래 두기도 했다.


내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을 억지로 이해하고 좋은 척 대하면서 마음속은 곪아갔다. 신경을 건드리는 일들을 그대로 두고 지나가면 되는데 난 굳이 그것을 씹지도 소화시키지도 않은 채 꿀꺽 삼켜버린다. 그래서 진짜 내 위가 그리도 약해진 걸까?


내 인생의 과제는 그냥 지나쳐 가는 것, 그 사람과 그 일은 거기에 두고 난 떠나가는 것, 그것이다. 나의 위장병을 고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누구나 내가 다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다. 계속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는 파리 같은 짓을 그만두고 싶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그냥 그대로 살아가도록 놔두고 나는 그냥 날아가고 싶다. 놔주고 싶은 말들을 노트에 써두고 나는 그대로 일어나서 내 삶 속으로 날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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