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 감정의 노예인가?’라는 생각으로 기운이 빠질 때가 많다. 감정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불쾌한 기분에 빠져들어 주변에 관심을 두지 못하고 사랑의 마음이 메말라가는 이 삶의 행태를 끝내고 싶다.
화장실에 아무렇게나 마구 꺼내져 있는 여러 장의 수건들을 볼 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아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28살이나 돼서 뭐 하는 짓이야’라고 소리치고 화를 내고 싶었다. 그 화에 숨겨져 있는 마음은 뭘까?
감정이 뭘까? 감정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건 맞는데 감정의 노예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평생 내 감정의 노예로 비위를 맞추며 살아왔다. 그렇다고 그 감정을 제대로 파고들어 잘 알아본 것도 아니다. 그냥 팩 화를 내 거나 회피하고 꾹꾹 눌러버려 불쾌한 채로 살아왔다.
나처럼 쉽게 불쾌하지는 사람은 세상이 그저 그렇다. 수건 좀 여러 개 꺼낸 게 뭐라고 금방 기분이 상해서 아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까지 한 달음에 달려간다. ‘한 번 쓴 축축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기 싫었구나, 요새 날씨가 꿉꿉해서 그럴 수 있지. 그래도 지금은 아빠도 출장 중이고 혼자 쓰는 화장실이니 그렇게 매번 새로 꺼낼 필요는 없는데’라고 알려주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만인데 금방 노여워진다.
아들도 한 번 쓴 수건으로 절대 얼굴을 닦지 않는다. 본인의 피부는 금쪽같이 여기면서 치우는 엄마의 수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 같아 괘씸하다. 아들이 군대에 가 있기에 좀 나아졌나 했더니 이제 안 그러던 딸까지 계속 새 수건을 꺼내 쓰고 그대로 겹쳐서 걸어 놓는다.
그 광경을 본 순간 화가 훅 올라왔지만 아이 방으로 달려가는 대신 잠시 소파에 앉아 그 화에 숨겨져 있는 마음이 뭘까? 생각해 봤다. 처음 느껴진 노여움은 28세나 됐는데 그렇게 전 수건을 정리하지 않고 새로 꺼내서 아무렇게 걸어둔 무심함 때문이었다. 28세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의 행동에 화가 난 거였다.
딸아이도 최근에 한 번 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 피부에 안 좋다는 기사를 본 걸까? 아토피도 있고 피부가 예민하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림은 엄마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관심이 없으니 이미 걸린 여러 장의 수건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차분하게 한번 이야기하면 되는 일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래도 책을 읽고 배워서 마음을 식히고 그 감정 속에 숨어있는 나의 진짜 욕구를 찾는 과정을 거칠 수 있게 됐구나 하며 마음이 가라앉았다. 책을 읽고 배운 것 중 가장 좋은 일이다. 화가 날 때 바로 그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그 속에 숨은 내 진짜 감정과 욕구를 찾는 과정을 거칠 수 있게 됐다.
친정 엄마는 잔소리가 심하고 무서워서 저렇게 수건을 여러 개 꺼내 놓는다거나 한 번 먹은 컵을 씻어 놓지 않은 채 새 컵을 꺼내는 일은 해보지 못했다. 앞 접시 하나 새로 꺼내거나 새 컵을 꺼낼 때마다 잔소리를 들었다. 화장실을 사용한 후 잔소리를 듣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 머리카락이 한 개라도 떨어져 있으면 혼났다. 우리 집에서 1년간 같이 살았던 외삼촌도 누나의 화난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지금도 화장실을 사용하면 꼭 정리하고 나온다고 한다.
그런 엄마 밑에서 많이 힘들었기에 그런 사소한 일로는 아이들에게 잔소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도 나이가 차고 엄마의 수고로움을 알아챈다면 알아서 조심해 주겠지 라는 혼자만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는데 그 시나리오에 맞지 않는 결과가 나타날 때마다 화가 나는 거였다. 또한 나의 해결되지 않은 억울함 때문에 더 큰 화가 올라온 거였다.
친절하게 잘해주면 알아서 좀 해주리라 기대했는데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화가 나는 거였다. 과도하게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으려고 너무 애를 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훈육이 필요한 순간에도 그저 놔 둔적도 많았고 너무 허용적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받고 싶었던 사랑과 관심을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 자연스럽지 못한 양육이 된 부분이 많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8살, 23살 된 성인을 어린애처럼 대해놓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 거에 화가 나는 거였다. 일거수일투족 잔소리하는 엄마 덕분에 난 일찍부터 세심하게 눈치껏 알아서 잘해왔다. 지금도 화장실을 나올 때 ‘머리카락 주워라, 샤워할 때 물이 너무 많이 튀었다’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늘 머리카락을 세심하게 줍고 물이 튀지 않게 조심스럽게 씻는다.
감정의 일렁임의 순간이 나를 돌아보라는 신호다. 그 신호를 무시하고 겉으로 나타나는 상황이나 사람 탓을 하며 화를 낸다면 영원히 나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런 순간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이번 일로 아이들에게 화가 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은 그냥 “그렇게 수건이 아무렇게나 마구 꺼내져있는 걸 보니 엄마가 기분이 좀 나빴어. 그렇게 아무렇게나 사용하면 내가 쓰지도 않는 화장실을 청소해야 하는 엄마는 배려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어 서운해.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 거니 쓰던 수건은 빨래 통에 넣고 새로 꺼냈으면 좋겠어”라고 이야기하면 된다.
실제로 아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니 다시는 수건을 마구 꺼내 늘어놓는 일은 없었다. 좋게 이야기해도 다 알아듣는다. 혹시 또 그런 일이 생겨도 아이가 바빴거나 실수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여유도 생겼다. 나를 도우미 취급하느냐고 괜한 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면 화가 나지 않는다.
이 일은 이렇게 넘어갔지만 아이들이나 남편의 무심한 행동에 감정이 극한으로 달려 나가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이런 순간을 잘 다스리라고 알려주는 책의 저자들은 모두 완벽히 극복했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거다. 아는 것과 실제 행동하는 건 다르니까.
그래도 이제는 한 템포 참는 횟수가 많아지고 전보다는 유연하게 잘 다스리고 있다. 감정을 잘 다스려서 성공하는 횟수가 많아지니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고 충고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한 없이 가벼운 인간이기도 하다. 다른 상황에서 나 또한 그처럼 화내고 있을게 뻔한 데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