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지만 차가운 맥주에 대한 나의 애정에 대해 쓰고 싶다. 이렇게 글을 쓰고 싶을 만큼 맥주를 좋아하지만 마실 수 없기에 글과 그림으로 그 마음을 달래 보려 한다.
맥주는 나의 가장 강력한 위안이었다. 육퇴 후 텔레비전을 보며 마시는 맥주는 한 줄기 빛이었다. 맥주 캔을 탁 딸 때부터 이미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거 같았다. 요즘 음주를 너무 조장한다는 경고를 받은 <나 혼자 산다>에서 출연자들이 힘든 하루를 보낸 후 저녁에 혼자 술 마시는 모습을 보일 때 패널들이 “그래 이거지, 이걸 위해 달려온 거지”, “저게 행복이지”라고 한 마디씩 거드는 말을 백 번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하루종이 대화할 상대라고는 아이들밖에 없고 주변에 장난감과 그림책들로만 둘러 쌓인 상황에서 나의 갈증을 채워주는 것이 맥주였다. 맥주를 마시면 자유로웠던 결혼 전의 나로, 예술을 좋아하던 나로 잠시나마 돌아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육아와 강의로 빼곡하게 채워진 정신없는 일상으로 바짝 말라버린 나의 감성을 맥주를 마시는 시간이 조금은 채워 주는 거 같았다. 잃어버린 나를 다시 만나는 거 같았고, 아이 친구 엄마들과 진짜 친구가 된 거처럼 즐거웠다. 친구를 만나기도 힘들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던 그 시기에 본래의 나로 돌아가게 해주는 손쉬운 수단이었다. 은유작가는 그렇게 육아를 하며 자신을 잃어갈 때 책장으로 달려가 시집을 읽었다고 하던데 난 맥주를 마셨다.
맛있고 정갈한 음식에 곁들이는 차갑고 아름다운 맥주 한 잔의 로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에서부터 키워졌다. 주부들만 돌아다니는 낮시간에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걷다 예사롭지 않은 식당에 들어가 점심에 곁들여 마시는 딱 한 잔의 맥주에 대한 묘사가 평범한 듯하면서도 너무 탁월해서 그 매력에 빠졌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다른 사람들도 일본여행에서는 끼니마다 맥주를 마시는 게 국룰처럼 통한다. 일본의 그 맛있고 아기자기한 음식 옆 기린이나 아사이, 사포로 맥주잔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로 표현되는 시원함은 많은 사람들을 홀린 거 같다. 술을 못 마시는 남편조차 일본에 가서는 그 한 잔의 맥주를 꼭 마시니 말이다.
그렇게나 맥주를 좋아하고 스트레스받는 사건이나 힘든 노동 후에 마시는 그 시간을 좋아했는데 얼마 전부터 맥주를 마시면 몇 달간 고생하는 일이 자주 생겼다. 담낭제거 수술 후 그 증상이 심해져서 정말 내 몸이 이제는 맥주를 거부하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맥주도 저걸 마시면 또 배가 아프고 고생하겠지 하며 피하게 된다.
그래도 누가 맥주를 마시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채널을 돌리다가도 넋 놓고 쳐다본다. 어느 날은 카페에서 여행 때 찍은 사진들을 보다 일본에서 마셨던 너무 맛있었던 맥주잔과 카스맥주병을 대충 끄적여 그려봤다. 너무 대충 그려서 완성도는 떨어졌지만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재밌었다.
나만큼이나 맥주를 좋아하는 후배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보여줬더니 너무 좋아하면서 나중에도 그 그림을 보고 싶다고 전송해 달라고 하고 다른 맥주도 그려보라고 했다. 역시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은 통하는구나 생각하며 한 번 제대로 그려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로도 맥주를 마시고 싶은 순간은 너무 많았지만 전기 자극에 불쾌감을 느껴 다시는 버튼을 누르지 않게 학습된 실험실의 쥐처럼 이제는 혼자서는 마시지 않는다. 누굴 만날 때는 어쩔 수 없다고 핑계를 대며 그럴 때만 조심하며 마신다.
그동안 내가 마셔본 맥주, 마셔보지는 못했지만 병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진들을 검색해서 그려보았다. 제일 많이 마시고 좋아했던 하이네켄과 카스, 클라우드, 스텔라도 그리고 예쁜 병들을 찾아 그리며 맥주 마시는 시간만큼이나 기분이 좋았다.
난 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맥주를 좋아하는 거였다. 같은 술이라도 술을 마시고 취하는 느낌이 다르다. 소주나 와인, 위스키 같이 독한 술은 순식간에 취하면서 정신이 없어진다. 난 잔잔한 취기 속에서 기분이 조금 상승하고 평소보다 좀 더 진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좋아하는 건데 독한 술들을 마시면 단번에 취하며 술에 압도당하는 거 같이 힘만 든다.
막걸리가 그나마 맥주와 비슷하게 기분이 좋아지는데 너무 달아서 처음 한두 잔 이상은 마실 때 부담이 느껴진다. 최근에는 남편이 선물 받아온 전통주도 마셔봤는데 취향이 아니었다.
맥주는 마실 때 꿀꺽꿀꺽 넘어가는 탄산의 기분 좋은 청량감이 있는데 그걸 대체할 술은 없는 거 같다. 이렇게 술을 서서히 줄여나가는 게 내 나이에 다행이긴 하지만 맥주와 함께한 사람들과의 행복한 그 분위기, 여행에서의 기분, 사춘기 때 같은 풍부한 감성을 되살려주는 마법의 음료로서의 느낌은 대체불가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림이라는 다른 방삭으로 계속 접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 그림을 보면 다 좋아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하다.
어제도 을지로의 <노말에이>라는 독립서점에 갔는데 맥주에 대한 설명으로만 가득 찬 책이 있었고 위스키에 대한 비슷한 시리즈도 있었다. 독립출판물인 거 같았다. 그 책들을 보고 이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맥주그림 그린 게 뭐 별 건가 생각했는데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고 알아본 것이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수첩 크기의 작은 스케치북에 <Beer Book>이라고 이름 붙이자 정말 근사한 책이 만들어진 거 같았다. <Flower & Plant book>이라는 꽃과 식물 그림으로 꾸며질 다른 책도 병행해서 만들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뭐든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꼭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문학적으로 가치 있는 글만 책이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꼭 출판해야만 책은 아니다. 이 작은 수첩이 책이 되었다. 너무 재밌고 맥주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아도 돼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