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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Sep 15. 2022

그림은 아무나 그리나

아무나 그려도 됩니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난 늘 뭔가를 그리거나 만들거나 쓰고 있었다. 누군가의 비판을 듣고 평가를 듣기 전에 난 놀이를 위해 뭔가를 만들었다. 주로 종이 인형이나 인형 옷들, 사촌동생들과 같이 학교 놀이를 하기 위해 국어, 산수, 사회교과서를 직접 그리고 써서 만들었다. 시장놀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팔 물건들, 종이돈, 그 물건들을 싸는 포장지까지 필요한 것들은 그냥 다 만들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필요한 것을 찾아냈고 별 고민 없이 사촌 동생들과 의논도 없이 혼자 뚝딱뚝딱 만들어냈다. 나보다 2살, 4살 어린 사촌동생들은 내가 하는 대로 따라주고 재미있게 놀아주었다.


초등학교 4학년쯤에 부루마블이 인기였다. 옆집 아이가 가지고 있었는데 난 그걸  직접 만들었다. 카드들과 호텔, 집 등의 모형을 옆집 아이의 부루 마블을 보고 똑같이 만들어서 방학 내내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다. 만든 부루 마블이라 재미가 덜하지 않았고 만드는 재미까지 느끼고, 만든 것이라 더 재밌게 놀았던 거 같다. 난 왜 저 장난감이 없는지 그런 비교도 그래서 그 비교에서 오는 고통도 없이 난 즐겁게 문제를 해결하고 그 과정을 즐기기까지 했다. 그 진취적이고 긍정적이고 행복했던 나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때는 인생에 걱정이 없었고 늘 하루가 가득 찬 느낌이었고 행복했다.  


늘 만들고 오리고 그리고 있었다. 잘 못할까 봐 위축되지도 않았고 그냥 척척 그리고 만들고 재밌게 놀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내가 언제부터 그 모든 놀이를 그만뒀을까? 어느 날 그림동화를 그리고 썼다. 색깔 요정들이 나오는 흥미로운 동화였다. 그때 그렸던 요정들의 모습까지 생각난다. 스스로 너무 뿌듯해 아빠에게 보여드렸다. 그때 아빠는 칭찬 한마디 없이 “누군가의 글을 베끼는 일은 아주 나쁜 짓이야”라고만 했다. 아빠 눈에도 잘했다고 생각했으니까 기성작가의 작품을 베꼈다고 이야기했을 거다. 그 후로 동화 만드는 일을 그만둔 거 같다. 너무 속상해서 그 그림동화를 어딘가 쳐 박아 버렸는지 찢어버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속상하고 부끄럽고 무안했다. 아니라고 베낀 게 아니라고 이야기했는지 아무 말도 못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의 그 말로 너무 충격을 받고 그 뒤의 기억은 지워버린 것 같다. 아빠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이의 마음을 읽지도 헤아리지도 못했다. 그 일과 학교에 들어가서 내 그림이 평가받고부터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었던 거 같다.


그 뒤로도 많은 시간이 흐르고 식구들과 대만 여행을 갈 때 작은 수첩을 가지고 갔다. 거기에 너무 맛있었던 대만산 금메달 맥주 캔을 그렸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 느낌이 반영되는지 기술적으로 잘 그리진 않았고 서툰 감이 있지만  마음에 드는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 뒤로 나의 그림에 대한 감각이 떠올랐고 그 여행 내내 맛있게 먹은 와플이나 아이들의 모습을 간단한 내용과 함께 그려 넣었다.

그 대만 여행 수첩은 지금도 너무 귀엽고 예쁜 여행기로 남아있다. 나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길 수도 있다. 그냥 그 순간의 느낌을 마음 깊이 간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림과 그때의 생생한 느낌을 글로 남긴 순간 그 여행은 훨씬 더 강렬하게 내 마음에 남게 되었다. 그저 그런 여행이 아니라 스토리가 가미된 한 편의 여행기가 되었다.


그림을 다시 그리고 좋은 점 중에 하나는 세상을 잘 관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그냥 지나쳤을 나무, 꽃, 거리의 풍경이 새롭게 다가왔다. 같은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들이 그토록 다채로운 색깔로 반짝이고 있는지 처음 알았고 우리 아파트 동 앞 작은 화단에 딸기가 자라고 있는지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올해 들어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처음으로 지켜보게 되었다. 저 꽃을 그릴 때 저 부분은 이렇게 표현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더 오래 쳐다보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어지러운 생각들로 주변에 뭐가 있는지 언제 나뭇잎이 저렇게 푸르러졌는지 꽃이 졌는지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생각들은 늘 미래에 해야 할 일에 대한 걱정, 과거의 부정적 일에 대한 생각들, 인간관계에서 오는 서운함, 분함 등 등 거의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똑같은 인생이고 똑같은 하루하루지만 내 하루가 더 풍성해지고 흑백사진에서 색이 입혀지는 느낌이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모지스 할머니 이야기>란 책을 읽었다.  모지스 할머니가 76세 무렵부터 100세 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그린 그림을 보았다. 자신의 인생에 미련이 없고 잘 살았다고 표현하신 글을 보았다. 그 그림에는 진실성이 있었다. 자신이 살아낸 인생의 모습이 투박하지만 소박하게 담겨있어 보는 사람이 슬며시 미소 짓게 만들어준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 얼마나 행복하셨을까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림을 그리는 모지스 할머니를 상상해본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늦게라도 찾고 해내고 싶다. 아이들이 어릴 때 하는 모든 일은 모든 사람들이 평생 즐길 수 있는 일들이다. 모든 사람들은 타고난 예술가이며 음악가이다. <유아 미술교육>, <유아 음악교육> 교재 1장은 늘 그렇게 시작한다. 유아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존재다. 가만히 놔두면 평생 즐길 수 있는 것들을 학교가, 부모가, 사회가 빼앗았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미술학원으로 피아노 학원으로 몰아 대며 평가하고 자르고 늘려 본래 가지고 있던 예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파괴한다.


아이들이 우연히 자른 색종이 조각을 보고 “토끼야”, “기차야”라고 할 때 아무런 평가를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 우연히 자른 색종이 조각을 보고도 경이로운 눈빛을 보내는 아이들의 예술혼을 꺼트리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어른 자신도 잘 모르는 예술을 섣불리 판단하고 평가하여 아이들의 어린 예술혼을 죽이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아이가 직접 만져보고 같이 놀아 본 강아지를 그릴 때 그냥 작은 선들을 가득 그려 넣은 경우가 있었다. 아이가 신나서 ‘강아지를 그렸어요’라고 했을 때 뭐라고 얘기하겠는가? 학교에서 그 그림이 과연 뽑힐 수 있을까? 아이에게 물어보니 “강아지를 쓰다듬었을 때 너무 부드럽고 털이 예뻐서 그 털을 그린 거예요”라고 했다. 과연 그 작품이 누가 봐도 강아지처럼 그린 그림에 비교해서 낮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게 바로 표현주의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이지 않은가?


아이들은 보통 자신에게 강렬하게 느껴진 부분을 과정 해서 그리곤 한다. 잔소리하는 엄마가 무서울 때 이를 괴물처럼 날카롭게 그리고 매일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하는 누나를 애벌레로 표현하기도 한다. 누가 이런 아이의 작품을 옳다 그르다, 잘했다, 못 했다로 평가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본인의 마음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고 섣부른 평가를 받지 않는다면 모든 아이들은 자신의 또 다른 표현 수단으로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랄 것이다. 아이가 신나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작가의 작품에 대한 평을 그저 듣고 궁금한 거는 물어보고 열심히 한 것에 대해 인정해주면 된다. 영혼이 없는 억지 칭찬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버린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떻게 그렸는지, 아이가 보기엔 이 그림이, 이 작품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는지 스스로 생각하도록 질문해주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감상자의 자세다. 아이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질문을 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설사 발견하지 못하고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로 충분한 것이 맞다. 부모 자신도 그림 감상에 대한 안목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면서 섣불리 잘했다, 못했다 평가해서는 안 된다.


천재적 재능이 있는 사람만이 예술을 창작해내고 즐길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힘든 인생을 살아나간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은 힘겹고 그나마 쉬는 시간에는 자신을 소모하는 활동이 대부분이다. 순간적인 즐거움은 있으니 잘 쉬었다고, 충전되었다고 머리로는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순간은 너무도 짧고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더 허탈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쇼핑, 시끄러운 만남들, 알코올과 담배, 음식, 스마트폰 같은 중독성 강한 것들, 시간이 남고 공허할 때 쉽게 달려갈 수 있지만 인생이 점점 더 텅 비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만으로 인생을 채우기에는 부족한 느낌이 늘 있어왔다.  


< 아티스티 웨이 >는 그런 점에서 아름답고 멋진 책이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나에게 다가와 다시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괜찮다고 너는 예술가라고 속삭여주었다. 그 책을 읽은 순간순간이 행복했고 내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예술에 대한 나의 사랑이 현실이 되는 느낌이었다. 나같이 재능이 없는 사람은 예술에 대한 사랑까지도 숨겨야 된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그래서 저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그 사랑을 다시 슬며시 꺼내 와서 먼지를 털어주고 반짝반짝 빛나게 닦아주었더니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 있던 어린 예술가의 모습이 드러났고 꺼내 주길 몇십 년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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