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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Sep 08. 2022

도덕적 인간은 누구인가?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실토하는 것이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면서 나는 그와 다른 도덕적으로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자신도 시어머님을 요양병원에 모시기 전에는 아픈 부모를 어떻게 저런 곳에 모시고 웃고 떠들고 여행도 가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속으로 흉을 봤고 그렇게 흉을 볼 수 있는 나는 도덕적으로 좀 더 우월한 느낌을 갖게 되어 기분이 좋았던 거 같다.


시어머님이 뇌종양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게 되고 정상세포까지 파괴하는 바람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시게 되자 자식 셋에 며느리, 사위까지 있었지만 전적으로 집에서 모실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쫓아가고 식사를 준비하고 응급실에 119를 타고 가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거기다 아버님도 쇠약하셔서 밤 시간에 화장실도 혼자 힘으로 가지 못하시는 어머님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셨다. 나중에는 내가 있는 상황에서도 화장실에서 머리를 못 들고 화장실 옆에 거꾸로 쓰러져 계시는 어머님을 맞닥들였을 때의 두려움은 정말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경험이었다.


응급실로 뛰어가야 하는 상황이 계속 됐을 때도 가정에서 그걸 오롯이 견뎌내야만 효자인걸까? 24시간 지켜보고 내 생활을 팽겨 치고 흔히 이야기하듯이 내 몸을 갈아서 봉양해야 도덕적으로 흠 잡히지 않을 수 있는 걸까? 그때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비판하고 싶을 때는 나의 몰이해를 먼저 들여다 봐야한다는 것을...


남을 비판하기는 쉽다. 그리고 그게 남의 일 일 때는 모두 변명처럼 들린다. 나에게 들이대는 잣대와 남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같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 누굴 비난할 수 있는가?


인생에는 이런 병마와 슬픔과 괴로운 순간들이 늘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늘 슬픈 와중에 지나가는 귀여운 강아지나 아기를 보고 웃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그때 딱 그 상황에서만 그 사람을 보고 “어머니가 아픈데 저렇게 환하게 웃고 있다니” 이렇게 비난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또는 어떤 상황을 볼 때 다양한 면을 살피고 판단과 비난은 제일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태도이고 예의인 것 같다.


이렇게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는 토대는 유아기 때 마련된다. 처음 도덕성이 형성될 때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무조건 다그치고 벌을 주어서는 자율적이고 고차원적 도덕관이 형성되지 못한다. 그저 권위 있는 누군가의 말이기 때문에 따르고 벌을 받고 경찰이 잡으러 올까봐 따르게 되는 무의미한 두려움에 떠는 성인으로 자라게 된다.


도덕성이 외부에서 무조건적으로 부과될 때 더 악한 것이 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는 기계적인 도덕관은 폭력일 수 있고 악이 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나치 장교 아이히만을 보면 그는 그저 상부의 지시를 따른 충실한 군인일 뿐이었다. 한 번도 그 명령을 의심하거나 그 명령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에 대한 고민 없이 기계적 복종의 결과는 더욱 악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는 유태인 한 명 한 명도 자신과 같은 귀중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가족이 있다는 가장 간단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유아가 자신의 입장밖에는 볼 수 없고 타인의 입장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유아기적 도덕관에 머문 인간이었다.


Piaget에 의하면 어른이 된다고 도덕관이 저절로 발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문제적 상황에 대한 설명과 그 결과를 납득할 수 있도록 친절히 알려주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Piaget에 의하면 유아기는 그 연령의 인지적 특성상 자신의 관점 외에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단계에 있다. 그렇기에 문제 상황에서 계속 다른 사람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대화 나누는 과정을 거칠 때 아이는 공감능력과 수준 높은 도덕관을 발달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유아가 스스로 그 결과를 판단했을 것으로 오해하고 결과만으로 아이를 다그치고 벌을 주었을 때 아이에게 남는 것은 두려움과 분노뿐일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그 행동이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아이는 스스로의 판단력을 키우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내면의 힘에 의해 판단하고 선택하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유아가 얼마든지 자신의 내부의 소리에 맞춰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내 자신의 편협한 인생의 잣대로 – 그것 또한 내 것이 아닌 나의 부모, 학교, 미디어, 사회에서 주입된 잘 맞지 않는 잣대인 경우가 많다 - 또다시 아이를 재단해서 맞지 않는다며 잘라내고 부족하다고 억지고 잡아 늘려 아이를 다치게 한다. 아이는 무력하고 슬퍼하며 피를 흘리고 아파하는데 삶은 원래 고통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이상한 말을 주입한다.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고... 삶은 원래 고통이니 참으라고 계속 노력하면 언젠가 좋은 시절이 온다고...


그게 언제일까? 54세가 되었지만 왜 눈은 늘 미래를 향해있고 한 번도 현재에 머무른 적이 없는 것 같다. 충분히 충만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데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 없는 어른들은 그것을 대대로 물려준다.


지금이라도 그런 나 자신에게 제동을 걸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판단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내가 아이들에게 앵무새처럼 잔소리하는 내용이 진실만이 아니고 도덕적이지 아닐 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 내가 가지고 있는 틀만을 들이대는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상대방에게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 상대방의 입장과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하고 그의 입장에서 최대한 이해해보려는 자세가 될 수 있다. 무의식적인 판단과정을 작동 시킬 때는 상대방의 이야기보다는 재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나의 옳은 말을 언제쯤 들이댈까, 언제쯤 가르쳐서 내가 도덕적 우위에 있다는 기분 좋은 느낌을 갖게 될까? 라는 과정만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지는 과정이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나는 저들과 다른 훌륭한 사람이라는 자만심만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 그런 말들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는 깨닫지 못한 채 그런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심지어 사랑하는 자녀에게 이런 과정이 되풀이 되고 본인과 똑같은 사람으로 키워내고 있다.

   

나 자신도 순간순간 알아차리지 못할 때 똑같은 일을 되풀이 하고 있다. 특히 아이들에게 그렇다. 내가 모든 걸 제일 잘 알고 있다는 착각, 내가 제일 옳다는 착각,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가르치지 않으면 잘못된 행동만을 할 거 라는 착각을 늘 하고 있다.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리가 타인을 볼 때는 그 순간 그 상황에서만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직장을 다니고, 같은 동네에 산다고 해도 그를 온전히 다 알 수 없다. 그가 어떤 성품의 부모님에게 컸는지, 경제적 상황, 어떤 친구들을 사귀었고, 어떤 형제 자매와 자랐는지 너무나도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 한마디, 한 순간의 행동으로 성급하게 판단하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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