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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Oct 12. 2022

미운 사람 손을 잡고 사랑노래를 불러주세요

밴드 들국화를 좋아했다. 친구가 녹음해서 선물해준 테이프로 듣고 유명한 <행진>이나 <그것만이 내 세상> 외에 서정적이고 좋은 노래들도 많다는 거를 알게 됐다. <제발>, <오후만 있던 일요일>, <이별이란 없는 거야>, <또다시 크리스마스>, <머리에 꽃을> 이런 노래들이 더 좋았다.


특히 <내가 찾는 아이>라는 노래도 정말 귀엽고 좋았다. 그 노래의 가사 중에 “미운 사람 손을 잡고 사랑 노래 불러주는 워~~ 흔히 없지 예~~ 볼 수 없지”라는 부분이 있다. 테이프를 준 친구와 “미운 사람 손을 잡고 사랑 노래 불러준다니 정말 위선이지 않냐?”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극악스럽게 큰 목소리로 화내는 사람, 착한 척 겸손한 척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 무반응인 사람, 모두 자신의 아픈 곳을 보호하기 위해 키워온 애처로운 삶의 무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그러한 삶의 전략을 키워왔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비이성적으로 화를 내고 밉살스럽게 굴 때 지금 바로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건 보살핌과 관심과 사랑이다. 사랑의 부족함을 그렇게 분노와 미운 행동으로 표현한다. 오랫동안 그 미운 행동에 똑같이 미움과 화로 대응했다. 이제는 그 속마음을 봐보려고 노력한다. 이때가 정말 사랑해줘야 하는 때라는 걸 계속 일깨운다.


대하기 어렵고 짜증 나는 사람이 정말 필요한 건 순수한 관심과 사랑이었다. 그걸 내 자식에게 주기도 참 힘들었다. 아이가 미운 행동을 하면 내 아이인데도 참 밉고 화가 났다. 아이의 미운 행동이 나의 내면 아이를 불러 세워서 둘이 힘겨루기를 했다. 많이 그랬다. 상처받아 나를 주저앉힌 그대로 남아있던 내면 아이가 현재의 나의 아이와 싸우고 화를 냈다. 그렇게 나의 아이들에게 똑같은 상처를 물려줬다.


아이를 봐야 했다. 상처받았고 많이 힘들다는 걸 알아차려야 했다. 외적인 행동과 태도만을 문제 삼으며 화내고 몰아붙이지 말았어야 했다. 무조건적인 관심과 사랑을 줬어야 했다.


친정엄마는 화가 나면 나를 몰아붙이고 무섭게 화를 내는 성격이셨다. 늘 답답하고 억울했다. 어릴 때 할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심하게 짜증을 낸 적이 있었다. 뭐가 맘대로 되지 않았는지 버릇없이 할머니 앞에서 연필을 던지고 짜증을 냈다. 엄마 앞이었으면 심하게 혼날 일이었다. 엄마 앞이 아니니 편하게 성질을 냈던 거였다. 그때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나가시더니 가게에서 요구르트와 내가 좋아하던 초코파이를 사서 내미셨다.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아무 말 없이 위로를 건네셨다. 포근하게 감싸지는 느낌이었고 위로받는 기분이었고 지금까지 그 따뜻함을 잊지 못한다.


간디가 어린 시절에 담배도 피우고 고기도 먹으며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한테 들켜서 심하게 매를 맞고 혼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도 없이 용서해주셨다고 한다. 간디는 그 이후 비폭력의 힘을 깨닫고 비폭력 주의자가 됐다는 일화를 본 적이 있다.


영국에 썸머힐이라는 학교가 있다. 아이가 원하지 않을 때는 언제까지도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담배를 피워도 되고 나체로 수영을 해도 되는 곳이다. 도둑질을 해도 혼나지 않고 원하는 일은 뭐든지 할 수 있는 극단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학교다.

썸머힐

이 학교의 교장 니일은 아이가 도둑질을 할 때 같이 했다고 한다. 니일 교장은 사전에 도둑질할 장소의 주인에게  양해를 받았다고 한다. 아이는 보통 이 학교에 오기 전에 상처받은 대상이 있고 주로 교장이나 교사 같은 권위자에게 그 대상을 투사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을 줌으로써 상처를 치유할 시간을 주기 위해 그렇게 한다고 한다.


아이가 상처받은 기간과 깊이에 비례해 비행 행동과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진다. 썸머힐 교사들의 사랑과 따뜻한 기다림은 아이들을 치유하고 결국 본인 스스로 교실로 돌아오게 된다. 난 대학교 때 이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내 아이가 생기면 저렇게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실제 내 아이가 생겼을 때 저런 다짐과 이론은 온 데 간데 없어지고 자라지 못한 내면 아이가 아이와 맞서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키울 때 할머니의 따뜻함보다는 엄마의 다그침에 더 가까웠던 거 같다.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어린 시절 멈춰버린 억울한 내면 아이가 더 먼저 드러났다. 그걸 일찍 알았다면 아이들한테 좀 더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줬을 텐데 그 부분이 늘 후회가 된다.


이렇게 알게 되었어도 자꾸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사람들이 내 맘에 들지 않고 미워 보일 때 더 사랑하자고 매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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