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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Oct 26. 2022

작고 귀여운 것의 힘

20년 넘게 살던 동네를 떠나 지금 이곳으로 이사 온 지 9개월이 되어간다.

아직 동네 여기저기를 탐험해보지 못했다. 며칠 전에는 걸어서 카페골목에 가봤다. 대학교 때 몇 번 와본 후 몇십 년 만에 가보는 거였다. 변한 듯 아닌 듯 재밌었다. 새로 조성된 핫한 동네에는 기를 쓰고 가보려 하는데 정작 내가 사는 동네는 이사 온 지 일 년이 다 돼가는데도 아직 다 못 다녀봤다.


우리 아파트 위쪽에 작은 골목길들이 있다. 거기도 처음 가봤는데 그곳의 주택들은 어릴 때 살던 동네와 주택을 떠오르게 한다. 집집마다 감나무가 있고 작은 마당들이 있었다. 어릴 때 그 작은 골목길에서 어둑해질 때까지 뛰어놀았다. 그 애들이 학교 친구였는지 동네 친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집과 옆집 사이의 작은 골목에서 여러 가지 놀이를 했다. 그 작은 골목이 그때는 크게 느껴졌는데 어제 본 그런 비슷한 길이 엄청 작아서 깜작 놀랐다.


그 시간들, 오래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이 희미하다. 꿈인지 현실이었는지조차 구분되지 않는다. 국민학교 때의 기억이 그렇게 희미해졌다.

이런 시시콜콜한 추억을 찾고 이미지를 찾아 모으는 일, 일상의 작은 행복을 찾는 일이 좋다는 걸 알고 그런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의 책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음에도 평상시에 잘 생각하지 않는다. 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고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것 같다.


아이들 문제, 부모님 문제,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 부족한 돈에 대한 생각, 아직도 버리지 못한 일상에서 벗어난 화려하고 멋진 생활에 대한 욕망 이런 것들이 내 생각의 90%를 채우는 것 같다.


일상을 대단히 재밌고 의미 있는 일들로만 채우기는 힘들다. 매일매일 혼자서 해내는 일상으로 채워진다. 어렸을 때의 기대감을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많은 시간이 지루하고 의미 없고 시시하다고 불평하는 것 같다. 인생의 많은 시간은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다. 혼자서 보내는 시간을 쓸데없는 생각들로 채우고 의미 없이 흘려보낸다. 묵묵히 여유롭게 작은 행복을 쌓아 올리면서 사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어릴 때는 그런 인생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늘 중요하고 화려한 어떤 일들을 막연히 꿈꾸었던 것 같다. 매일 밥 해 먹고 나 자신을 돌보고 가족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의무감으로 빨리 해 치워야 하는 일로 생각하고 살았다.

밥도 빨리 만들어서 먹고 청소도 의무적으로 해치우고 며칠 전부터 부담으로 다가오는 강의 때문에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한 채 보내다 일을 끝내고 오면 느긋하게 맥주 한잔과 야식을 먹으며 또 다가오는 한 주를 그렇게 맞이하는 일상이었다.


나는 이런 의무감으로 살아갔지만 일상을 예쁘고 의미 있게 사는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해서 자주 들여다보는 블로그 주인들이나 책의 저자들은 거창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변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발견해서 자신의 언어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사람들이었다.


냉장고 파먹기로 재밌는 게임을 하듯이 부족한 재료로도 근사한 식사를 차려 멋있게 플레이팅 하는 사람, 비싸고 흔치 않은 재료로 명품 식기에 차려내는 음식들보다 재밌어 보였다. 작고 귀여운 물건들을 수집하면서 하나하나에 얽힌 추억을 들려주는 사람, 저 깊숙이 파묻혀 있던 추억의 영화와 그 영화 속 패션과 음식을 소박한 그림으로 그리고 표현해서 책으로 만든 사람, 매일 먹는 흔한 아침식사를 찍어 올리는 사람들. 그냥 그런 나와 비슷한 일상에 빛을 비추자 바라볼만한 것, 마음속에 작은 기쁨이 느껴지는 순간들로 변했다.


흔히 지나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풀잎 하나, 물건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순간을 포착해  말과 그림, 사진 등으로 표현해 내는 사람들의 결과물들을 보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 뒤에 나의 생활을 다르게 보고 그 행위에 의식을 집중해보려 노력했다. 요리를 할 때도 빨리 만들어서 먹어야지 하며 늘 다른 생각을 하고 의무적으로 했다면 지금은 그 과정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즐기려고 한다. 예전에 의무적으로 요리하고 설거지할 때는 손도 자주 베이고 다치고 그릇도 많이 깨뜨렸다. 느긋하게 과정 하나하나에 집중하자 다치거나 그릇을 깨는 일이 거의 사라졌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많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만든 음식 사진을 찍고 텔레비전을 켜지 않고 음식에 집중하며 먹는다.


늘 지나치던 동네와 장소들도 새로운 눈으로 보려고 한다. 음악을 들으며 내 생각에 빠져서 어디를 지나치고 있는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 채 걸어 다녔는데 지금은 주변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뭐가 있는지 그 동네에서 풍기는 느낌과 사물들을 본다. 별거 아닌 것들도 내 눈길을 끌면 사진으로도 찍고 오래 들여다본다. 더 예뻐 보이는 거는 그림으로도 그려본다. 후에 그 그림이나 사진을 보면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나면서 혼자의 시간도 아름답게 추억된다. 일상을 의무감에서 살아갈 때는 내 인생을 생각하면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텅 빈 것처럼 느껴졌었다. 죽기 전에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는데 난 한 10초도 생각할 것이 없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혼자서 보낸 흔한 일상도 흔한 풀 한 포기도 커피 잔 하나도 그 순간에 기억 날 것 같다. 일상에 관심을 갖자 덜 공허하고 작은 기쁨의 순간들이 늘어갔다. 혼자서 지내는 시간들도 훨씬 재미있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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