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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Sep 08. 2022

난 유아교육 강사다

난 유아교육을 전공했고 대학원도 졸업했다. 유치원 교사 경험도 있다. 그리고 대학과 평생교육원, 보육교사 교육원 등에서 23년 넘게 강의를 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아이를 무지 잘 키웠을 거고 육아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유아교육이라는 학문을 아는 것과 내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많이 달랐다. 남의 아이 육아에 조언을 해 줄 수 있고, 학생들에게 강의를 잘해서 좋은 강의평가를 받을 수도 있지만 내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오히려 나 자신의 내적 갈등만 심해졌고 죄책감만 커지게 만들었다. 


육아에는 유아교육 지식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나 자신을 아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교육의 대상인 유아에 대해 알아야 하고 유아 발달이나 놀이법, 교수방법 등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을 아는 것이 더 선행되어야 했다는 걸 아이를 키우면서 늘 한 발자국 늦게 깨우쳤다. 


아이를 키우면서 유아교육에서 배운 대로 친절한 말투를 사용하고 아이가 고집을 피우고 집안을 어질러도 참으려고 했다. “아이가 지금 자신의 자아를 실험해보는 시기니까 허용하고 기다려줘야 해”하며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내 감정을 억누르고 참는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내가 컨디션도 좋고 남편이나 주변 사람들과 사이도 좋을 때뿐이었다. 잠을 잘 못 자거나 친정엄마가 와서 내가 어릴 때처럼 잔소리라도 퍼붓고 가버린 날은 유아교육이고 뭐고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오히려 참은 만큼 더 크게 화를 냈다. 알고 있는 지식은 온 데 간데없어지고 자기 합리화와 변명이 튀어나와 버린다. 그러고 나면 또 죄책감이 엄습하며 알면 뭐하나 나란 인간이 그렇지 하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게 된다. 


더욱 나쁜 것은 나는 그래도 이렇게 유아교육을 공부해서 다 이론대로 했는데도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네가 그만큼 까다롭고 이상하기 때문이야 하는 프레임을 아이에게 씌우게 된다는 거다. 


특히 아이의 어떤 행동이나 말이 유난히 나를 화나게 만들 때는 나의 풀리지 않은 문제 때문이라는 걸 들여다볼 수 있어야 했다. 겉으로 나타난 아이의 문제 행동에만 집중하지 않고 나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내 문제를 해결하거나 지켜볼 줄 알았다면 특정한 행동에 비이성적으로 화를 내거나 혼내지 않았을 일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를 혼낼만한 일은 정말 거의 없었다. 아이에게 차분히 이야기하고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말로는 부드럽고 친절하게 하면서 얼굴 표정과 무의식은 자신을 통제하고 싶어 안달 나 있다는 걸 아이들은 안다. 아이들은 어릴수록 부모의 존재가 크게 작용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부모에게 무조건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말로는 아무리 고상하고 친절하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 안에 숨겨진 들끓는 부정적 감정과 욕망, 분노 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말은 거칠어도 진정으로 아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부모가 훨씬 훌륭한 부모다. 난 아이를 존재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말로는 깨어있는 교육자 인척 “대학이 뭐가 중요해. 공부 못해도 괜찮아. 하고 싶은 일 해”라고 이야기했지만 내 내면은 그게 아니었다. 나 자신조차 속이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말들이 공허하게 떠돌 뿐이고 아이는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지쳐갔을 거다. 


아이가 속물적인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는 아무 말은 안 해도 나에게 찬 기운이 떠돌았을 거고 난 그걸 감추지 못했다. 나도 알지 못했으니까. 나 자신에게도 괜찮다는 공허한 소리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됐다. 그리고 인정한다.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 


그 마음이 어디서 온 건지 찬찬히 들여다볼 줄 알게 되었다. 인정받고 싶은 거였다. 아이로 인해 내가 왜? 나 자신이 별로 인정받지 못해 와서 그걸 아이로 대신 받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널 위한 거야라는 거짓말로 닦달했고 조건부 사랑을 주며 아이를 힘들게 했던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내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면서 한 발작 쉴 줄 알게 됐다. 아이에게 합리화된 설교를 퍼붓는 대신 조용히 내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내 마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직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가? 아니면 진짜 아이를 위한 마음인가? 그런 판단을 한 후 아이와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그 진심은 아이에게 가 닿는다. 그걸 확실히 확인했다. 똑같은 공부하라는 얘기지만 그것이 나의 욕망과 비틀린 욕심에 의한 것 일 때는 아이를 위축되게 만들고 관계를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정말 아이가 자신의 길을 찾길 바라는 사랑의 마음이라면 아이는 그 마음을 느낀다. 친절한 말투로 사람을 찌를 수 있다. 그 마음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에 따라. 욕을 해도, 거친 말투라도 그 말이 사랑에서 비롯됐다면 마음에 따듯함이 흐른다. 사람은 아무리 어려도 그 정도는 느끼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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