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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Nov 01. 2022

서울 사람의 서울에서 한 달 살기

20년간 살던 동네에서 집을 사지 못하고 2017년에 집값이 갑자기 꿈틀대자 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알아본 후 크게 오르기 직전 서울에 집 한 칸을 살 수 있었다. 그때도 이미 많은 지역의 집값은 올라있었고 그나마 교통이 좋고 살던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30년 돼가는 집을 샀다. 집은 사놨지만 될 수 있으면 살던 동네에서 살려고 했다. 남편 직장에 가기 편리한 곳이고 아이들의 유치원 초, 중고등학교의 추억이 남아있고 친한 친구들이 있는 곳이라 떠나는 게 쉽지 않았다. 나도 동네에 친한 엄마들이 많아서 서운한 마음은 더 컸다.


하지만 절대로 들어올 일 없다던 집주인이 갑자기 오른 집값과 세금 때문에 실거주해야겠다는 통보를 했다. 또다시 전셋집을 찾는 일에 지쳐서 이제는 내 집으로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간단히 인테리어를 해야지 하고 실측을 하러 갔는데 간단한 인테리어로는 안 되는 상태였다.


30년 된 아파트는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견적을 받아보니 한 달 동안 대대적인 공사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결국 공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이사날짜를 맞춰보니 전세를 내 보낸 후 공사기간 동안 우리가 살 곳이 필요했다. 보관이사를 하고 한 달 동안 살 레지던스를 구해야 했다.


처음엔 살던 동네에서 구하려고 했다. 그러다 이왕 한 달 사는 거 그동안 살아보고 싶었던 동네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알아본 곳이 인사동 쪽에 있는 오라카이 인사동 스위츠였다. 30평대 아파트 형태로 간단한 요리도 할 수 있고 빨래도 할 수 있게 기본적인 가전이 다 갖추어져 있는 레지던스형 호텔이었다. 코로나 시국으로 원래 가격보다 굉장히 싼 가격으로 계약할 수 있었다.

호텔 내부 모습 간단한 요리도 할 수 있다


광화문과 종로구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서 찾는 곳이다. 인사동 끝자락에 위치한 호텔은 걸어서 3분 만에 익선동에 도착할 수 있고 조금만 더 걸어가면 안국역이었다. 안국역 부근에는 작지만 유명한 맛집과 디저트 집들이 즐비했다. 안국역의 어느 출구에서 나가도 그 나름의 멋진 길들이 나왔다.


조금 더 걸어가면 경복궁이 있고 광화문이 나온다.

원래 나는 집에 있으면 잘 나가지 않는다. 나가면 집에 들어가기 싫고 집에 있으면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어한다. 그런 사람인데 이곳에 사는 28일간 매일 나갔다. 추운 1월이었는데도 매일 만보 가까이 걸었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득 찬 동네라 매일매일이 신났다. 하루는 걸어서 교보문고까지 가서 책과 볼펜 하나를 사 오고, 어느 날 저녁엔 가족들과 익선동에 있는 핫한 이탈리안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저녁시간의 익선동을 걸어 다녔다. 평소 저녁시간에 시내에 있을 일이 별로 없었는데 너무 좋았다.


눈오는 날의 익선동과 전광수 커피 내부


어느 날엔 덕수궁으로 갔다. 덕수궁 돌담길은 알아도 그 뒤에 있는 이화여고가 있는 그 예쁜 길을 처음 알게 되었다. 정동길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좋은 길을 왜 이제야 알게 됐는지. 서울시립미술관에는 가본 적이 있었는데 더 들어가니 그런 멋진 길이 있었다. 오래됐지만 잘 관리된 가구를 보는 느낌이었다. 근대식 빨간 벽돌 건물들이 멋졌다. 그곳에 있는 전광수 커피집도 아주 좋았다.


내가 원하는 여행이 이런 거였다. 현지인은 거의 오지 않고 관광객들만 북적대는 관광지만을 가는 그런 여행에 지쳐가고 있었다. 맛집에서 유명하다는 음식을 잔뜩 먹어 속이 부대끼는 그런 여행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평생 살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서울에서도 곳곳에 살펴볼 곳이 많았다. 아직 모르는 길이 많았고 경험해 볼 장소 천지였다.


레지던스에서 산 28일은 정말 행복했다. 또 한 가지 좋았던 이유는 매일매일 청소와 정리를 누군가가 해준다는 거였다. 나갔다 들어오면 침대 정리가 되어있고 화장실 두 개가 새것처럼 청소되어 있었다. 이렇게 좋을 수가 있다니. 늘 일하거나 놀다 들어오면 엉망이 된 집을 마주하고 쉴 새 없이 식사 준비와 청소를 하곤 했었는데 살림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친한 친구들과 후배들, 친한 엄마들도 불러서 내가 발견한 새로운 장소들을 알려주고 맛있는 식사를 하며 좋은 시간들을 보냈다. 이런 경험을 한 후 사람들이 왜 한 달 살기를 하는지 이해가 됐다. 남편 은퇴 후 이렇게 원하는 장소에서 한 달 살기를 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가서 살아보기로 했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제주도나 강릉, 남해도 좋고 외국의 조용한 마을에서 한 달이나 몇 달 살기를 해보려고 한다. 며칠 여행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또 다른 경험이 될 거라는 기대감으로 나이 먹는 것도 잊은 채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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