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1박 2일로 부산여행을 다녀왔다. 처음으로 아이들만 놔두고 간 여행이다. 남편이 부산에 일이 있는데 같이 가겠냐고 해서 망설이다 따라나섰다. 남편은 일을 봐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돌아다녀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했는데 사실 더 좋았다. 난 늘 혼자 여행을 해보고 싶었는데 낯선 호텔에서 혼자 묵는 일이 두려워서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 KTX를 타고 혼자 돌아다니다가 저녁을 먹을 시간쯤에 맛집에서 만나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경치 좋은 곳에서 맥주 한잔은 같이 마실 수 있어서 좋았다.
혼자서 천천히 걸어 다니고 한 참 들여다보고 사진도 마음껏 찍고 다르게 쳐다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았다. 혼자여행의 장점이다. 아주 이상적인 여행이었다. 사람 많은 맛집과 술집은 혼자 들어가기 부담스러운데 그런 곳은 남편과 같이 가고 내가 가보고 싶던 곳은 혼자 가서 여유롭게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그동안의 여행은 늘 아이들 위주였다. 아이들이 좋아할 놀이공원이나 물놀이할 수 있는 곳, 아이들이 경험하면 좋은 곳 위주로 다녔다. 나의 취향이나 내가 여유롭게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애들이 좋아하는지 잘 노는지를 관찰하고 여행보다는 아이들에 집중했다. 난 멀티플레이가 안 되는 사람인 것 같다. 아이 키울 때는 그렇게 아이들만 바라봤다. 근데 그게 또 푸근한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감에 가득 차서 한 행위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간 곳이 유럽의 어느 나라인지, 일본인지, 대만인지, 제주도인지 큰 차이가 없었다. 장소에 대한 풍부한 기억과 느낌은 없었다. 그냥 가족과 같이해서 즐겁고 화목함을 키울 수 있었고 지금도 아이들과 그때 했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같이 기억할 수 있는 좋은 경험들이 있음은 감사하다. 가족은 남았지만 ‘나’는 없었다.
이번 여행은 기차를 타면서부터 좋았다. 다 좋았다. 누군가와 같이 가면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냥 있어도 괜찮을까? 신경이 써지기도 하는데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글도 끄적이고 잠깐 졸기도 했다. 창 밖의 풍경도 제대로 봤다. 한강다리를 지나는데 늘 다니는 한강이 이토록 아름다웠는지도 새삼 느꼈고 어릴 때 대구의 외갓집에 갈 때 지루하게 펼쳐지던 시골 풍경들이 정겹고 좋아 보였다. <이지혜의 영화음악>이란 라디오를 듣는데 영화음악과 시골 풍경들이 어우러져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Hans Zimmer의 신비한 분위기가 몇 배는 더 신비롭게 들렸다.
혼자서 이렇게 멀리 와보는 경험이55세가 될 때까지 없었다. 부산역에서 흰여울 문화마을 가는 버스를 탔다. 같은 한국인데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에 조금 긴장은 했지만 네이버지도가 있으니 든든했다. 흰여울 문화마을은 바닷가를 면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해안가 절벽 끝에 바다를 따라 난 좁은 골목길 안쪽으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피난민들의 삶이 시작된 곳이자 현재는 마을주민과 함께하는 문화마을공동체라고 한다.
visitbusan에서 가져온 사진
마을은 70년 ~ 80년대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어릴 적 기억 속의 희미해진 동네들을 다시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택에 살 때 옥상에 올라가던 계단이라든지 집안에 있던 작은 마당과 꽃과 나무들의 느낌이 생생하게 다시 살아났다. 늘 꿈에 나와서 그게 꿈이었는지 실존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어릴 때 방문했었던 누군가의 집 같은 그런 오래전 마을이었다. 혼자 와서 내 마음에 맞는 것을 찾아 오래도록 멈춰서 쳐다볼 수 있는 여유가 좋았다.
흰여울 문화마을 곳곳이 포토스팟이었다.
여유롭게 둘러보고 오늘 묵을 호텔이 있는 해운대로 갈 광역버스를 탔다. 1시간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버스에서 내려 지도를 보고 호텔을 찾아가는데 호텔 옆에 너무도 아름다운 수국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동안 3-4번 부산에 왔었지만 늘 한여름이나 한겨울 아이들 방학 때에만 여행을 다녀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본 건 처음이었다. 감탄을 금치 못할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이 수국들의 향연이 바다보다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호텔옆 수국이 만개한 산책로
점심을 먹지 못해 배가 고파 호텔 쪽에 가면 뭔가 요기할만한 식당이나 편의점이 있겠지 했는데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20분은 걸어가야 식당가가 나온다. 이미 13000 보정도 걷고 배가 고파 호텔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남편이 6시쯤에 도착한다고 했다. 6시에 만나 해운대 먹자골목 쪽에 있는 <해목>이라는 히쯔마부시 전문점까지 걸어갔다. 해운대 해변을 따라 걷는데 적당히 시원하고 관광객들이 즐겁게 웃으며 사진 찍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히쯔마부시는 너무 맛있었다. 음식이 나오기 전 마신 맥주 한잔에 벌써 취하는 거 같았다. 배가 고팠던 만큼 음식과 맥주도 꿀맛이었다. 음식을 먹고 다시 호텔 쪽에 있는 동백섬을 걷기로 했다. 동백꽃은 이미 졌지만 녹음이 푸르러진 동백섬은 여전히 좋았다. 배를 조금 꺼뜨리고 <더베이 101>이라는 곳에서 피시 앤 칩스와 맥주를 먹었다. 마음이 앞서서 음식을 많이 시켰는데 이제 늙은 부부는 그 양을 소화하지 못하고 안주는 거의 남겼다. 그곳의 야경은 홍콩 못지않았다. 너무 배가 불러 또 소화시키기 위해 그 일대를 걸어 다녔다. 나중에 호텔에 들어와 보니 2만보를 걸었다. 너무 보람찬 하루였다.
히쯔마부시와 더베이 101 야경
다음날 아침에 늦잠을 자고 체크 아웃을 하고 아침 겸 점심으로 <개미집>으로 갔다. 예전에는 국제시장에 있는 본점에서 낙곱새를 먹었는데 이곳 해운대점도 맛있었다. 아점을 먹고 그랜드조선호텔에 스타벅스 로고가 보이길래 거기로 갔다. 앞에 바다가 보이는 너무 예쁜 스타벅스였다.
그랜드조선 호텔 스타벅스
남편은 3시쯤 다시 일이 있다고 해서 그전에 보수동 책방거리와 차이나타운 만두집에 가보기로 하고 광역버스를 탔다. 보수동 책방거리에 있는 헌책방에서 옛날 내가 좋아했던 스크린이나 소녀시대 같은 잡지책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그건 너무도 오래전 일이었나 보다. 나에게는 별로 오래 전도 아닌 십몇 년 전 정도의책들만 있었다. 그 옛날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의 물건들은 이제 골동품이 되었나 보다. 보수동 책방거리도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서 시간여행을 하는 거 같았다. 부산에는 이런 동네들이 많아서 영화 촬영지로 인기가 있는 거 같다.
보수동 책방골목
점심으로 차이나타운의 신발원에 가려고 했는데 줄이 너무 길어 그 바로 옆의 마가만두라는 곳에 갔다. 그곳의 만두도 정말 맛있었다. 예전에 명동입구쯤에 있던 중국인이 하는 만두집의만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명동 중국집에 대한 기억도 이제는 희미하다. 이번 부산여행은 혼자여행의 예행연습이면서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아 예전 기억이 많이 떠올랐다. 외갓집, 어릴 적 동네, 음식들 좋은 기억들을 많이 찾아온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