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수종 Apr 06. 2023

꽃놀이를 다녀봤다.

평생 처음 꽃놀이라는 걸 해봤다. 평소에도 꽃을 좋아하고 아파트 주변에 핀 꽃들을 주의 깊게 본다. 사진도 찍고 때로는 그림으로 그릴만큼 좋아하지만 본격적인 꽃놀이를 가봐야지 하는 생각은 없었다. 늘 30년 이상 된 오래된 아파트단지에 살아선지 그 세월만큼 크고 우거진 나무들이 많아 단지 안에서의 모습도 충분히 아름다웠기에 꽃을 보러 새삼 나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도 그러고 친구도 꽃 보러 가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주민 분이 올려주신 단지 벚꽃길


친구는 꽃이 좋기로 유명한 곳의 정보를 매일 올리며 가보자고 하고 남편도 이제 맛 집에 대한 흥미가 조금 시들해지면서 경관 좋은 곳에 다니고 싶어 했다. 곧 일이 많아질 거 같다고 놀 수 있을 때 놀아야 한다며 여기저기 가보길 원한다. 남편은 일밖에 모르고 취미랄 게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그래도 좋아할 만한 일이 생긴 게 다행이라 최대한 맞춰주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산수유 마을과, 화담 숲, 덕수궁까지 짧은 시간 동안 알차게 돌아다녔다. 정말  좋았다. 단지 내에 있는 꽃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과 멋이 있었다.


제일 먼저 3월에 축제가 시작되기 며칠 전 이천의 산수유마을에 갔다. 난 사실 산수유와 개나리를 잘 구분하지 못했다. 아니 꽃을 보니 그런 건 아닌 거 같다. 산수유를 자세히 보니 개나리 하고 같은 점이라고는 색 밖에 없었다. 색도 개나리는 쨍한 노란색이라면 산수유는 채도가 낮은 노란색이었다. 그냥 큰 관심을 끌 만큼 화려한 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데도 몰랐던

거였다. 이번에 산수유 마을에서 잔뜩 피어있는 꽃들을 보고 확실히 알게 되었고 수수하지만 그 나름의 멋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보니 바로 집 앞에도 산수유나무가 있었는데 못 알아봤던 거였다.

산수유 마을


이천 산수유 마을은 관광지로 조성하려는 거처럼 보였다. 여러 포토 스폿과 조경을 해놨고 다가오는 축제를 준비 중이었다. 이천이라 서울에서도 가까워 가볍게 다녀올 수 있었다. 이천 맛집과 카페까지 알차게 하루를 보냈다.


몇 주후에는 화담숲에 갔다. 이곳은 예매를 하고 입장료까지 내야 하는 곳이다. 곤지암 리조트 바로 옆에 있었다. 숲길에 데크와 안전울타리가 꼼꼼히 쳐져 있어서 올라가기 편했다. 꽃들도 잘 관리되어 있었다. 마침 수선화 축제 기간이라 수선화라는 꽃도 처음으로 자세히 많이 볼 수 있었다. 노랗고 하얀 수선화가 너무 아름다웠다. 사진으로는 절대 담을 수 없는 황홀한 느낌이었다.

화담숲


올라가는 길이 진달래 영역, 수선화 영역, 자작나무 영역 이런 식으로 관리되어 있었다. 남편과 나는 저질 체력이라 꼭대기에 있는 자작나무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한창 절정에 있는 진달래와 수선화를 실컷 봤다. 숲 속 가득 피어있는 꽃을 보며 어딘가 다른 차원에 머무는 듯한 황홀한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고 힘들어도 꽃을 보러 다니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비가 쏟아지는데도 덕수궁 앞에서 친구들과 만났다. 친구 한 명이 비가 오는 날 덕수궁에 가서 석어당이라는 건물을 꼭 보고 싶다고 했다. 그 건물에는 단청이 없는데 비가 올 때 나무색이 달라지면서 평상시와 다른 느낌이 생겨난다고 했다. 12시 시청 앞 1번 출구에서 만났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잠깐 걸었는데도 바지와 운동화가 다 젖었다. 갑자기 추워지고 힘들어서 정동에 있는 샌드위치 집에 들어갔다. 평소 가보고 싶었지만 늘 사람이 붐벼서 지나쳤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자리가 있었다. 샌드위치와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비가 좀 잦아들고 나서 덕수궁으로 향했다.


우리는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감탄을 연발하느라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궁궐에 있는 나무들은 정말 남달랐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었다는 신기한 감정과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어제 유난히 그 아름다움이 온전히 느껴졌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해가 없어서 눈도 찌푸려지지 않고 색이 햇빛에 반사되지 않아선지 특별히 더 선명하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석어당에 다가가자 오래된 집에서 나는 특유의 나무 냄새와 진해진 나무색깔이 인상 깊었다. 아름다운 계절이라 특별히 열어놨는지 뒷문이 열려있어 문을 통해 보는 뒤뜰의 아름다움은 정말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친구들과 계속 보고 또 보고 사진 찍고 또 보고도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막 연두색으로 돋아나고 있는 주변 나무들의 싱그러운 느낌이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는 듯했다. 비가 와서 추웠는데도 하나하나 자세히 보고 사진 찍느라 긴 시간을 보냈다.

석어당 문에서 본 풍경


석어당 옆의 유명한 살구나무는 빗살무늬 기둥도 특이하고 멋졌다. 정말 잘 생긴 나무였다. 석어당 뒤쪽의 풍경도 대단했다. 사람이 일부러 만들어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매화꽃과 이름 모를 분홍색 꽃이 잔뜩 피어있는 나무와 오래된 건물이 어우러져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석어당과 살구나무


덕수궁에서 웨딩 사진도 찍었었고 어릴 때 사생대회 하러도 왔던 곳인데 그때는 왜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을까? 나이가 들어서야 자연과 주변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는 게 신기하다. 젊을 때에는 뭐에 정신이 팔려 이런 좋은 것을 알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수종사’ 가는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