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속품으로 일하던 사람이, 역할을 만들어가는 곳으로
퇴사 후 데이터 사이언스 부트캠프 과정을 들으며 나는 나의 강점을 비교적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코딩이나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일은 시간을 들이면 따라갈 수 있었다. 문제를 읽고, 구조를 파악하고, 해결 방향을 정리하는 일도 가능했다. 다만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수강생들과 속도를 경쟁하기는 어려웠다. 각자 공부할 때는 괜찮았지만, 팀으로 결과물을 만들어야 할 때는 선택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역할을 나눴다. 젊은 친구들이 코드의 뼈대를 잡고 구현을 맡았고, 나는 전체 흐름을 정리하며
무엇을 먼저 만들지, 어떻게 보여줄지를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프로그램의 목표는 생각을 코드로 구현해 실제로 동작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무엇을 만들지 정하고, 순서를 세우고, 각자의 역할을 나누고, 그 결과를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일이 필요했다.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그 안에 결과물을 제출해야 했기에 각자의 강점을 살려 역할을 나누는 것이 최선이었다. 발표 결과는 나쁘지 않았고, 그 경험은 나에게 자신감을 남겼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 나는 혼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흐름을 만들고, 정리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해야겠구나. 이 깨달음은 내가 스타트업을 선택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과 경쟁하기보다, 새로운 경험을 쌓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나에게 더 잘 맞는다고 느꼈다. 회사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했던 조건은 연봉이 아니었다. 연봉을 다소 낮추더라도 마음 편하게 내가 잘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회사의 Job Description에 적힌 근무 시간은 놀라웠다. 10시 출근, 5시 퇴근. 거리는 다소 멀었지만, 아이를 등교시키고 출근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적게 일하고, 적게 받겠다”는 마음으로 연봉을 먼저 낮춰 제시했다.
물론 현실은 다를 것을 예상했고, 입사 후 경험한 회사는 그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퇴근 시간을 넘겨 일하는 날도 있었고, 주말에 일을 해야 하는 상황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시간들이 크게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의 완성과 고객의 신뢰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노력을 알아봐 주는 팀장과 팀원들 덕분에 오히려 성취감으로 남는 순간들도 있었다.
이 회사에 와서 가장 낯설었던 건 분위기였다. 이전 회사는 수백 명 규모였고, 팀과 본부 사이의 경계가 분명했다. 회의실에는 웃음보다 긴장이 먼저 떠올랐다. 반면 이 스타트업에서는 대표와 임원, 팀장들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하고, 프로젝트 단위로 3-5명이 움직였다. 회의 중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낯설었다.
이렇게 나는 큰 회사에서 작은 AI 스타트업으로 옮겨왔다. 이곳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자유롭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책임이 큰 곳이었다. 마음 편하게 일하고 싶어서 선택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더 자주 나 자신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이 질문이 다음 적응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