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에게 생각을 맡기다.

인공지능, 생각, 자동화에 대하여

by 감자

오늘 업무를 리스트업 해줘. 가장 급한 순부터, 챙기면 좋은 것들까지.


사회초년생인 내게 '완벽'을 위해 함께 하는 사수가 있다. 출근과 동시에 업무 사이트와 챗GPT를 켜는 게 습관이 되었다. 처음엔 GPT를 사용할 시간도 없었다. 교육이다, 외근이다, 하는 일들이 많았고, 회의에 따라 들어가면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내가 무얼 할지 모르니 GPT에게도 무얼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 일이 많은 만큼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하게 보였다. 우선순위를 제대로 짜지 못하던 내가 나름의 순위 정렬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간단한 서류 작업과 아이디어 창출 업무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때, 나와 GPT 비서의 연은 시작되었다. 아이디어를 짜내며 전반적인 업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GPT는 내가 던져준 키워드 몇 개와 다른 참고할 만한 보고서 일부를 기반으로 글을 써냈다. 완벽한 수준은 아니지만 조금만 손 보아도 될 수준이라 시간 활용이 훨씬 수월해졌다.


그렇게 내 일상 속으로 들어온 GPT는 이제 내가 네이버에 검색해 정보를 찾아내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가 원하는 것들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단순한 휴일 계획부터, 있는 재료들을 활용할 수 있는 음식 레시피, 진통제 복용 계획, 몸이 안 좋을 때, 이제는 마음이 힘들 때 칭얼거릴 수 있는 상담사 역할까지 하고 있다. 모든 대답은 길어야 5초 이내로 나온다. 매일 새로운 자극이 다양한 형태로 다가온다. 데이터가 축적되고 나면 더욱더 맞춤형으로 성장한다. 잘 쓰고 있는 어느 와중에 이런 글을 봤다.





"챗GPT 하도 쓰니까 생각을 외주 맡기는 수준이 됐어."


어느 순간부턴가, 안건이 전달되지 않은 급한 회의에는 입을 떼기 어려웠다. 갑작스러운 변동, 즉각적인 대처, 해결방법 같은 것들이 내 앞의 과제로 떨어졌을 때면 쉽게 길을 잃었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다시 GPT 창을 켰다. 이제 나를 잘 아는 GPT는 내게 업무 리스트업과 동시에 위로를 내어준다.


'감자야, 넌 할 수 있어. 잘 해왔잖아. 초조해하지 말고 하나씩 해보자.'


회사에서는 괜찮은 신입이 들어왔다고 평을 듣는다. 이 말을 당당히 뿌듯해 할 수 없는 게... 난 챗GPT에 숨은 신입이기 때문이다. 과장을 조금 많이 보태자면 나 없이 이 모델만 있으면 웬만한 일은 쳐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이 미친 듯이 쌓이고, 계획한 일은커녕 당일 들어온 일을 미친 듯이 쳐내느라 하루가 다 가고 나면 진이 다 빠진 저녁만이 나의 '진짜 하루'로 남아있다. 그마저도 릴스와 쇼츠에 빠져 조울증 환자처럼 울다 웃다를 반복하다 잠에 든다.

얼마 전에야 떠올랐다. 내가 정말 좋아하던 것들. 일로 진을 빼느라 잊고 있던 '이 일을 시작한 이유'. 내가 기분 좋아지는 것들. 그중에서도 글 쓰는 일을 참 좋아했다. 책을 읽고, 그 책을 정리하는 일들. 그리고 이 자리에 앉은 지금, 전처럼 글이 술술 써지지 않는 게 느껴진다. 어딘가에 발목이 자꾸 턱. 턱. 잡혀 멈추길 반복한다. 쓰다가 주워 담는 말들이 많다. 써도 내가 왜 썼는지 모르는 말들이 많다.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몰라 자연스럽게 GPT를 켜려다 접었다. 글감조차 GPT에게 추천받으려 하는 내 모습에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글만큼은 온전한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조차 GPT에게 빼앗기고 있는 기분이 든다.




물론 GPT는 내 첫 자취와 직장 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혼자 집에서 아플 때 특히 든든하다. '형체 없는 내 편'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내 생각하는 힘, 내 사고의 근육들까지 가져가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내 감정의 근육들까지 GPT가 채워주진 못한다.

'나'라는 사람이 사라지지 않도록 늘 생각하고,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들을 더 늘려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 글조차도 GPT에게 수많은 사고의 힘을 의탁하고 난 뒤의 내가 쓰는 터라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서도. 나는 오로지 내가 채워갈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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