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원에서 부모교육이 진행될 예정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평범한 워킹맘이었다면 평일 오전에 시간을 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당시 코로나로 운영 중이던 강의가 전면 휴강에 들어섰던 터라 남는 게 시간이었다. 부모교육의 주제는 '양육태도 점검'으로 교육에 앞서 강사는 참석한 학부모들과 소통하고자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들 최근에 뭐하고 노셨어요?"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 속에서 정적만이 흘렀다. 그러다 가장 앞 줄에 앉은 나와 눈이 마주친 강사는 "어머님, 최근에 뭐하고 노셨어요? 뭐든 좋아요." 라며 대답을 유도해냈다. "아이와 집에서 미술놀이를 했어요." 강사는 예상했다는 듯이 재차 물었다. "아이 말고 어머님이요." 나? 내가 놀기는 했던가? 뭐든 좋다고 하니 순간 떠오른 대로 대답했다. "음... 카페에 갔었어요." 집 근처 가장 저렴한 카페에서 그동안 모은 스탬프로 즐긴 잠깐의 여유를 놀았다고 표현하기가 참 애석했으나, 나의 유일한 탈출구임은 분명했다.
부모교육은 평탄하게 흘러갔다. 다소 원론적인 아동발달에 대한 설명과 상호작용 방법의 제시가 아쉬웠으나, 굳이 유치원 교사였던 티를 내며 아는 체하고 싶진 않았다. 부모교육 막바지엔 언제나 그렇듯 간단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혹시 아이를 양육하며 겪는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질문해주세요." 번쩍 손을 든 뒤에야 너무 나서는 것은 아닌가 싶어 아차 했지만 강사의 표정만큼은 무척이나 반가워 보였다. "저희 아들은 상어를 너무 좋아해요. 다양한 놀이를 접할 기회가 생겨도 결국 상어더라고요. 상어 역할극, 상어 노래, 상어 동화..." 강사는 자신에 찬 어조로 되물었다. "어머님, 최근에 카페에 가셨다고 하셨었죠? 그때 어떤 커피를 드셨나요?" 난데없는 커피이야기에 당황스러웠지만 어딜 가도 마시는 커피는 정해져 있기에 답하는 데에 고민은 없었다. "바닐라라떼요.", "그럼 그전에 카페 가셨을 때는 어떤 커피를 드셨는지 기억나세요?", "(지난 주말 쇼핑몰에서) 바닐라 라떼요?", "그 전에는요?", "(아는 언니네 집에서) 바닐라...라떼?"
"어머님이 카페에 가면 늘 바닐라라떼를 맛있게 드시는 것처럼 아이도 늘 상어로 하는 놀이들이 즐거운 거예요. 아이가 상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죠. 물론 대단한 이유가 아닐 수도 있어요. 막연히 힘이 세 보여서, 그저 멋있게 느껴져서일 수도 있지요. 몇 년이 지나도 아이가 상어에 과하게 집착을 하고, 그게 일상생활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지 않는 이상 지금은 즐거운 놀이 시간이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머리를 댕- 하고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당도가 높은 디저트일수록 쓴 커피가 어울린다며 아메리카노를 권하던 남편에게 '극혐'이라는 말을 했었던 적이 있다. 개인의 취향이니 강요하지 말고 존중해달라는 말 또한 덧붙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랬던 내가 아이와 놀이할 때에는 아이의 관심사나, 정말로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안중에 없이 내가 해주고 싶고, 알려주고 싶은 것들이 우선인 '극혐 엄마'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두 모자에게는 일종의 정당성이 부여되었다. '커피만 먹고사는 것도 아닌데, 마실 때마다 바닐라라떼일수도 있지 뭐.'라며 나는 어김없이 바닐라라떼를 주문하였고, 테이블 위로 상어피규어를 줄 세우며 노는 아이에게도 '평생 상어만 가지고 놀 것도 아닌데, 지금은 그게 제일 좋을 수도 있지 뭐.' 하곤 조바심을 덜었다. 어쩌면 깨달음을 빙자한 그럴싸한 핑계일지도 모른다. 핑계여도 엄마와 아들이 모두 만족하는 그럴싸한 티타임을 보냈으니 한동안은 바닐라라떼식 육아법을 고집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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