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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이스라엘을 전폭적으로 지지할까?

유대인의 역사와 사회 이야기 #2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초강대국으로 거듭나 전 세계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미국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인구의 3%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유대인들이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들은 각 계 각 층의 리더를 맡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잘 보여야 하고, 선거일 전에는 이스라엘을 방문해 확실한 지지 입장을 밝히는 것이 관례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 내에서 소수 민족에 불과한 유대인들이 이런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300년 역사가 유대인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자.      

1492년은 유대인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해였다.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후손들의 편안한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해 콜럼버스의 신대륙행 배에 기독교인들과 함께 대거 승선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신대륙 역사는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을 피해 탈출한 유대인들이 정착한 브라질을 중심으로 남미에서 이루어졌다. 브라질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담배와 사탕수수 농장 운영, 지하자원 탐사, 해안 탐험과 요새 건설 등의 일을 하며 상인이나 금융가 계층을 형성했다. 하지만 남미에 정착한 기독교인들은 신대륙을 수탈하는데만 혈안이 되었고, 마녀사냥식 종교재판도 답습했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종교재판을 피하려던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와 힘을 합쳐 포르투갈이 차지하고 있던 기지들을 빼앗았다. 하지만 1654년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의 전쟁에서 패했고, 유대인들은 네덜란드를 도왔다는 혐의로 브라질에서 추방되어 흩어지게 되었다.      


브라질에서 추방된 유대인들 중에 23명이 북미 최고의 항구 뉴암스테르담에 도착하면서 미국 유대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0년 뒤 1664년에 영국이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뉴암스테르담은 찰스 2세의 동생 요크 공의 차지가 되었고, 요크 공의 이름을 따 '뉴욕(New York)'이 되었다. 국제 연합 본부가 있는 뉴욕은 현재 세계 최고의 항구 도시이자 세계의 문화 수도, 국제 외교의 중심 도시다.      

미국의 유대인들은 네 번에 걸친 이민 파동을 통해 미국의 역사에 의미있는 흔적을 남겼다. 1654년~1825년까지의 첫 번째 이민 파동으로 1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이주했다. 유럽과는 달리 미국의 유대인들은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정착해서 미국 사회에 빠르게 동화되어 갔다. 1825년부터 1880년까지의 두 번째 이민 파동으로 25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촉발된 유럽의 혁명 세력과 반 혁명 세력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700만 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탈출해 미국에 정착했다. 이 시기가 바로 미국 역사의 황금기로 불리는 '서부 개척 시대'였다.      


1880년부터 1920년까지의 세 번째 이민 파동으로 200만 명 정도의 러시아계 유대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러시아와 동유럽을 휩쓴 대규모 유대인 학살을 피해 탈출한 것이었다. 뉴욕의 맨해튼에 정착한 러시아계 유대인들은 부모 세대의 근검절약과 자녀 세대의 학업성취로 동부의 아이비리그 명문 대학에 많이 입학하게 되었다. 주로 법학과 의학을 전공한 유대인 이민 2세들은 1940년대에 뉴욕 전체 의사, 법률가의 60%를 차지하게 되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네 번째 이민 파동으로 30만 명의 독일계 유대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서 탈출한 것이었다. 독일계 유대인 중에는 아인슈타인과 스질라드 같은 과학자, 레오 스트라우스 같은 정치 사상가, 학자, 작가들이 많았다. 이로써 독일의 지성은 퇴보하고 미국의 지성은 도약하게 되었다. 노벨상 수상자로 보면 1901년부터 1931년까지는 독일이 35명, 미국이 14명이었지만 1943년부터 1955년까지는 미국이 29명, 독일은 5명으로 역전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미국을 형처럼 생각하고, 미국이 이스라엘을 동생처럼 생각하는 것은 두 나라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다. 첫째, 미국은 청교도들의 신앙을 국가 성립의 기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친유대주의 성향이 강하다. 둘째, 미국은 넓은 영토에 비해 인구가 많지 않기때문에 유대인들을 핍박할 필요가 없었다. 셋째, 미국에서 이스라엘 문제는 인종적인 관점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의 관점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넷째, 미국 내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의 유대인들과 달리 자신들을 '미국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유대인을 '이스라엘 유대인', '미국 유대인', '기타 유대인'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미국의 유대인들이 이방인이 아니라 미국인으로 자리 매김을 했기 때문이다.      


부부나 친구, 선후배 등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오랜 시간 동안의 역사적 사건들이 모여서 좋고 나쁨을 결정하듯이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도 역사적 사건들이 하나 둘 쌓여서 우호적이 되거나 적대적이 된다. 미국의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이해한다면 이스라엘을 무조건 예뻐하는 형의 모습이 그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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